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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룡이 Feb 15. 2020

듣기와 말하기는 전혀 다르니까

<아프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인터뷰를 하며 

그 날은 참 운이 좋았다. 대한민국 남단인 부산에서 수도 서울을 왕복하기란 사실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닌데 때마침 자궁 근종 정기 검진과 채널예스 인터뷰가 하루 간격으로 잡혔다. 1박 2일 일정의 절반은 자궁 근종 검진, 절반은 채널예스와의 인터뷰. 서울에서 머무르는 기간 동안 두 가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짜임새 튼튼한 일정에 묘하게 만족감이 든다.


올라가는 길에는 본업인 마케팅 업무를 하고 병원에서는 자궁 상태가 아주 건강하다고 나왔다. 빈혈도 좋아졌고(어쩌면 살이 좀 쪄서...?) 추적 관찰을 위해 9개월 뒤 진료를 예약했다. 몇 년 만에 방문한 광화문 서점에는 신간이 잘 비치되어 있었다. 흐트럼 없는 일정 동선에 남아있던 것은 인터뷰 하나. 



듣는데에 익숙한 사람이 말을 하려면


본인의 이야기를 말로서 한다는 것, 나에겐 낯선 일이다. 친한 친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잘 안 꺼내서 면박 아닌 면박을 듣는다. 그런데 처음 보는 이들에게 내 생각을 말한다는 게 얼마나 낯간지러운 일이었겠는가. 물론 홍보에 가까운 마케팅을 업으로 하기에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는 많이 진행해봤다. 그때마다 인터뷰를 하는 상대방에게 '긴장하지 마세요.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돼요.'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입장이 바뀌어진 지금, 막상 당사자가 되니 정말 무의미한 말이었구나 깨닫는다.




듣기 능력말하기 능력


맥락 있는 질문지엔 맥락 있는 답변을 해야 한다. 개인적 경험이든 사회적 이슈에 관한 생각이든 단단한 구심점이란 게 있어야 한다. 메일로 들어온 질문지는 책의 흐름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들을 뽑아 놓았다. 작가인 나마저도 책의 내용과 책을 쓰게 된 동기 등을 다시금 정리하고 고민해봐야 할 정도였다. 휴, 의미 있는 기자님을 만났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왜 불안감이 들까? 


아, 나는 인터뷰어로 답변을 해본 경험이 적다. 거기에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고 주로 듣는 쪽을 선호한다. 말하는 경험보다 듣는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다. 질문이 입력되고 말을 출력하기까지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매끄럽지 못하다. TV에 나오는 유명 강사처럼 말을 유창하지도 못하기에 생각을 다듬고 말을 다듬는 시간이 필요하다. 




글의 마력


듣는 것만큼 말하는 것도 잘하면 걱정이 없을 텐데, 듣는 기술과 말하는 기술을 서로 상호 작용하지 않는 다른 영역이다. 내가 글쓰기를 선호하는 이유다. 말이라는 것은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이 휘발하지만 글이라는 것은 단단한 돌처럼 다듬어진다. 나처럼 입력과 출력이 오래 걸리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쓰고 지우길 반복하면서 섬세하게 생각을 담을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인터뷰를 하기 전에 질문지의 답변을 생각하고 글로 쓴다. 쓴 글을 다시 읽고 외우고 말하고 고치고 다시 읽고 외우고 말한다. 



말은 휘발하지만
글은 단단한 돌처럼 다듬어진다.



흐름 있는 말하기란 많은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다. 말하기를 업으로 삼기 때문인지 나보다 3배쯤 말이 많은 남편 역시도 중요한 미팅이나 발표를 앞두고는 홀로 방에 들어가 글을 쓴다. 그렇게 쓴 키노트를 고치고 말하고 외우고 또다시 고치고 말하고 외운다. 



흐름 있는 말하기란 많은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다. 





실수를 남기자


질문에 준비를 한다고 시간을 썼음에도 기자님 앞에서 또 얼음이 되었다. 상황은 계획한 대로 흐르지 않고 답변은 동문서답이 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웃음이 나왔다. 이게 마지막은 아닐 테니 준비한 길로 가지 못했다고 주눅 들 필요는 없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적당한 성공이 나으니 주어진 지금 이 시간을 완성에 대한 집착으로 망치지 말아야 했다. 

녹음은 그래서 필요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남기고 싶지 않은 나의 실수를 증거로 남기기 위해서다. 그걸 돌리고 돌려 들으며 '다음엔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다음엔 이 부분을 강조하고 이 부분을 빼야겠다.', '말의 톤을 좀 더 올려야겠다.' 등을 생각한다. 답변 흐름이 빠른 어느 질문에서는 긴장이 누구러졌구나 생각했다. 스스로도 몰랐던 모습들을 무연고 도구로 담아내면 본인을 객관화할 수 있다. 그리곤 다음 인터뷰 기회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세밀한 답변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어느 지점에서는 이어폰으로 혼자 듣기도 부끄러워 홀로 숨기도 한다. 오직 나만 듣고 있음에도 스스로에게 뭔가 부끄러운가 보다. 그럼에도 반복한다. 다음엔 스스로에게 덜 부끄러운 이야기를 남기겠다고 다짐하며. 



 다음엔 스스로에게 덜 부끄러운 이야기를 남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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