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 크로나 Krona
오래 전부터 서양 학자들과 동양 학자들 사이에는 미주 대륙을 누가 먼저 발견했냐는 논쟁이 이어져 왔다. 이 논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던 동양 학자들은 명나라의 해군 참모총장 ‘정화‘가 콜럼버스보다 훨씬 이전에 미국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학술적인 논쟁에 1960년 이후 제3자가 끼어들었다. 바로 북유럽 학자들이다. 북유럽 학자들은 바이킹 사람들이 11세기경에 미주 대륙을 발견했다고 하고, 캐나다에 식민지까지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어느 측의 설이 맞는지 잘 모른다. 다만, 바이킹 설에서 계속하여 언급되는 아이슬란드 출신 레이프 에이릭손 (Leif Ericson 970-1020)이라는 탐험가에 대해서 연구하다 아이슬란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공부하면 할수록 신기한 사연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얼음의 나라라는 의미의 아이슬란드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군대가 없는 유일한 나토 회원국이다. 그리고 전통이 제일 오래된 국회는 아이슬란드의 국회인 알팅그(Althing)이다. 930년에 시작된 알팅그는 19세기 초 잠시 공백기가 있었으나 다시 1844년에 정식으로 열렸다. 지금 현재 알팅그 건물도 1881년에 건설된 것이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1986년에 열린 정상회담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핵 경쟁에 대해서 대화를 했던 정상회담으로서 냉전 종식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 글에서 정치사보다 종교사 중심으로 신기한 사연들 전하고자 한다.
아이슬란드는 유럽연합의 회원국이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지만, 국교가 없는, 소위 말하자면 세속주의 국가가 아니다. 아이슬란드의 국교는 아이슬란드 복음 루터 교회이다. 사실은 아이슬란드도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애초에는 천주교를 믿었다. 16세기 초기까지 교단 조직이 국내 북부에 있는 홀라르(Holar) 대주교청과 남부에 있는 스칼홀트(Skalholt) 대주교청 중심으로 되어 있었다. 1534년에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왕국에서 즉위한 크리스티안 3세가 루터교를 받아들이자, 그 당시에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왕국의 속국이었던 아이슬란드에서도 루터교의 확산이 시작되었다. 1540년에 천주교 스칼홀트 대주교청이 해제되었고, 루터교 스칼홀트 대주교청이 창건되었다.
스칼홀트 대주교들 중에 제일 유명한 비숍은 아마도 1000 크로누르 앞면에 사진이 있는 브린욜푸르 스웨인손(Brynjólfur Sveinsson)일 것이다. 1639년부터 1674년까지 스칼홀트 대주교칙을 맡은 그는 아이슬란드 문학에 큰 기여를 했던 시인이기도 하다. 아이슬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의 바이킹들이 사용했던 고대 노르드어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던 그는 시인 혹은 문학가로 유명했지만, 시보다는 교회로 더 유명했다. 1000 크로누르 뒷면에 보이는 브린욜프 교회는 브린욜푸르 비숍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동시에 행정기관이었던 브린욜프 교회는 역대 유럽 성당들과 달리 돌이 아닌 목재로 만들어졌었다. 그러나 목재로 만들어져서인지 브린욜프 교회는 지진과 화산 폭발이 종종 일어났던 아이슬란드에서 약 150년 견뎠지만 19세기 초기에 없어졌다. 물론 현재 비슷한 자리에 교회가 있지만, 브린욜프 교회의 후신이 아니다.
스칼홀트 중심의 아이슬란드 남부는 루터교를 쉽게 받아들였지만, 홀라르 중심의 북부는 그렇게 쉽게 루터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천주교 홀라르 대주교청의 마지막 대주교 존 아라손(Jon Arason)은 덴마크의 루터교 포교 정책에 크게 항의했다. 아이슬란드 국회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던 존 비숍은 수도로 내려가서 루터교 세력과 전투를 벌일 작전을 짰다. 예상과 달리 국회의 다수는 루터교 세력을 지지했고, 존 비숍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 1551년에 국회는 국교를 루터교로 정했고, 루터교 홀라르 대주교청이 1552년에 창건되었다.
아이슬란드 북부는 날씨가 너무나 추워서 인구가 남부 비해 훨씬 적었다. 하지만 북부 사람들의 종교심이 남부에 비해 더 강했다. 존 대주교 사망 후에 새로운 종교의 포교를 위해서 많은 루터교인들이 애를 썼다. 그 종교인들 중에서 여자인 라인헤이오우르 존스도티르(Ragnheiður Jónsdóttir)를 잊으면 안 된다. 5000 크로누르 앞면에 초상화가 실린 라인헤이오우르는 아이슬란드 북부 루터교뿐만 아니라 아이슬란드 여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기준이 된다.
1646년에 목사의 딸로 태어난 라인헤이오우르는 그 당시 아이슬란드 북부에서 신부감 1위로 꼽혔고 그 결과 홀라르 대주교 기슬리 토를락손(Gísli Þorláksson) 비숍과 결혼했다. 그녀는 특히 결혼하고 나서 시골 이곳 저곳을 다니며 아이슬란드 북부에 사는 여자들을 교육 시키면서 설교 활동을 활발히 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 10년 넘게 과부로 생활했던 그녀가 다음에 결혼한 사람도 역시 그 당시에 홀라르 대주교였던 에이나르 토르스테인손(Einar Þorsteinsson)이었다. 신기한 것은 루터교가 북부에서 확산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이 여성의 아버지 이름이 한 때 루터교에 항의했던 천주교 대주교 존 아라손과 똑같다는 것이다.
다시 라인헤이오우르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녀의 바느질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5000 크로누르 앞면에는 아이슬란드 전통 의료 무늬가 보이고, 뒷면에는 라인헤이오우르가 여자들에게 자수를 가르치는 모습이 있다. 그녀를 통해서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아이슬란드 여성중에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아그네스 시구로아르도티르(Agnes Sigurðardóttir)이다. 아그네스는 아이슬란드 복음 루터 교회의 대주교이다. 1801년에 홀라르 대주교청과 스칼홀 대주교청이 아이슬란드 복음 루터 교회라는 이름하에 통일되었다. 특히 20세기부터 아이슬란드 복음 루터 교회의 대주교는 선거로 선출되었는데, 2012년에 선출된 마지막 대주교가 여성이라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 되었다.
아이슬란드는 일반적인 북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종교심이 비교적 깊은 나라다. 반면, 동성애 분야에서는 제일 진보적인 국가일 것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 되었고, 더군다나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밝혔던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Jóhanna Sigurðardóttir)가 2009년 선거 때 29.79% 지지율로 당선되어 총리가 되었다. 합법적 결혼을 통해 공개적인 동성애 삶을 보낸 정치인이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 최초의 사례였다.
이 글은 한국경제신문 https://www.hankyung.com/thepen/article/65330 에도 실렸습니다.
돈 밝히는 남자 알파고 시나씨의 아이슬란드 화폐 탐구는 여기까지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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