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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pago Apr 27. 2017

필리핀 화폐로 본 '위대한 유산'

필리핀 - 페소 Peso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던 글로리아는 정계에 들어가기에 앞서 경제학과 교수 생활을 하며, 강연과 저술로 삶을 보내고 있었다. 이후 필리핀의 역대 첫 여성 대통령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의 켐프에 합류한 글로리아는 대통령 당선 이후 경제와 관련된 부처에서 차관급으로 일을 했다. 글로리아가 대통령직을 물려받았을 때에는 경제학자로서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남편을 둘러싼 온갖 의혹들 때문에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수차례 쿠데타 설이 정치판을 떠돌았을 뿐 아니라, 거의 매년 의회에 탄핵안이 제출됐다.  

화폐를 연구하는 필자에게 있어 눈에 띄는 것은 바로 200페소 지폐의 발행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필리핀 화폐 중에 200페소는 없었다. 2002년에 처음 발행된 200페소 앞면에는 글로리아 대통령의 부친이자, 제9대 대통령이었던 디오스다도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의 초상화가 실려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화폐를 보면 “뭐야! 새로운 화폐를 만든다더니, 자기 아버지 사진을 넣었네!”라고 반응 할지도 모른다. 글로리아 대통령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마카파갈 전 대통령은 필리핀 역사에서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진 인물인 것만은 확실하다. 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던 마카파갈 전 대통령은 ‘매수할 수 없는 자(The Incorruptible)’라는 명칭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마르코스 정권이 들어오기 전, 마지막 민주주의적인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마카파갈은 1965년 대선 때, 국민당 후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에 패배하면서 이후 필리핀에서 민주주의는 약 20년 동안 잠들게 되었다.  

계속해서 200 페소 이야기를 해보자. 이 지폐 뒷면에는 글로리아 대통령의 취임식이 그려져 있고, 자기 사진이 들어가 있다. 여전히 살아 있는 상황에서, 자국의 화폐에 자신의 모습이 들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그러나 글로리아 대통령에게 유쾌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 그의 임기 끝난 후 당선된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이 글로리아 전 대통령의 사진을 화폐에서 제거했던 것이다.  2010년에 당선된 베니그노 아키노 3세(Benigno Aquino III) 혹은 노이노이 아키노가 정권을 잡자마자 일차적으로 실행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신권 발행이다. 2010년에 나온 신권은 구권에 비해 디자인 훨씬 화려해졌다. 하지만 구권과 신권의 차이점은 세련된 디자인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200페소에는 마카파갈 전 대통령의 초상화는 그대로였지만, 글로리아 전 대통령의 사진이 지워졌다. 글로리아 정권 때 비리 의혹을 비롯한 각종 논란들 때문에 필리핀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로리아 전 대통령은 기소되어 재판 받기도 했다.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 때 나온 신권에는 또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500페소 앞면에 있었던 자신의 부친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2세 초상화 옆에 모친 코라손 아키노의 사진을 추가했던 것이다. 아마도 일부 독자들이 ‘뭐야~ 다들 당선되면 부모의 사진을 화폐 넣네?’라고 당황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필리핀 역사를 볼 때 아키노 가문은 큰 공을 세운 가족이었다. 베니그노 아키노 1세부터 말하자면, 그는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정치인이었다. 필리핀 공화국 초기에는 농립부 장관, 국회 의장과 부통령직도 맡았던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아키노 2세 혹은 니노이 아키노는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저항했던 야권 지도자로 한 때 이름을 떨쳤던 정치인이었다. 그는 80년대 미국으로 망명 가 있을 때, 김대중 대통령과도 친분을 가졌지만, 김대중 대통령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 1983년에 다시 고국 필리핀으로 귀국할 당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암살을 당했다. 이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공항의 이름이 이후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으로 변경됐다.  

그 당시,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부인 코라손 아키노는 1986년 야당 단일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패배하였다. 그러나 이후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은 무너졌다. 이를 계기로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코라손 아키노는 필리핀의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동시에 마르코스 시대에 후퇴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게다가 몇 번의 쿠데타 위협을 극복해냈다. 특히 1987년대 극우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아들인 노이노이 아키노는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실탄 5발을 맞고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필리핀의 민주주의를 다시 구축해내는데 있어 크나큰 희생을 치렀던 아키노 부부의 사진이 500페소에 실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국가에 큰 공을 세워 유명해진 정치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름을 딴 공항이나 경기장의 이름이 변경되거나 혹은 화폐에서 자신의 얼굴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 유쾌하지 않을 일일 것이다. 특히 그 정치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더 끔찍한 기분이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필리핀의 전 대통령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Gloria Macapagal Arroyo)이다.  

2001년 필리핀의 분위기와 2017년 한국의 분위기는 비슷한 면이 있다.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프 에스트라다(Joseph Estrada)의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상원은 탄핵 절차 밟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처에서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다. 이 시위에 참여했던 글로리아 부통령도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사임하자 곧바로 글로리아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 2004년 대선에서도 당선된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2010년까지, 즉 9년 동안 집권을 했다. 그동안 필리핀에서 오랜 기간 권력을 잡았던 마르코스 대통령을 제외하면, 글로리아 대통령만큼 장기 집권을 한 정치인이 없었다.



이 글은 한국경제신문 https://www.hankyung.com/thepen/article/65722 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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