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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Dec 27. 2018

1 홀가분해서 더 여유로운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훌쩍 떠납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혼자 떠나는 것 그 차제에 있다.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리 일정을 맞춰야 하고 무얼 먹고 어디에 갈지 일일이 조율해야 한다. 이것 말고도 고려해야 할 게 많다. 물론, 이렇게 계획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 충동적으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건 혼자여야 가능하다.


춘천은 내가 그럴 수 있게 해주는 여행지다. 여행의 부담이 적은 그런 곳이다.


봄이면 유독 공허함이 크게 느껴진다. 특히, 바쁜 작업이 끝난 후에 더욱 그렇다. 그러한 날이 매일 이어지면 잠들기 전, ‘내일 바람 좀 쐬러 갈까?’하며 마음이 일기 시작한다. 핸드폰을 켜 춘천행 열차를 조회한다. 일반실을 선택한 후 창측 자리를 골라 결제한다. 5분 안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날이 밝았다. 출발 시간 10시 58분. 평소처럼 일어나서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지하철로 3정거장만 가면 춘천행 열차의 출발역인 용산역에 도착한다. 전철 승강장처럼 생긴 그곳에 가 열차를 탄다. 서울과 그리 멀지 않아서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풍경, 예를 들면 논과 밭, 산이 펼쳐지는 목가적인 풍경은 춘천역에 다다라야 등장한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의 서울을 빠른 속도로 훑어볼 수도 있고, 익숙한 듯 낯선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니 말이다. 그러다가 잠시 눈을 감는다. 시야를 차단하고 기차가 지나면서 나는 쇠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다. 이렇게 감각을 이동시키며 나름대로 여정을 즐긴다. 가까워도 어쨌든 여행 전날 밤, 열차표를 예약하고 나서 잔잔하게 일렁이던 마음도 자연스럽게 가라앉는다.


12시 14분. 춘천역에 도착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시내버스를 탔다. 점심 메뉴는 베트남 쌀국수다. 어젯밤 잠들기 전, 이불속에서 찾아본 것으로 이전에는 습관처럼 막국수를 먹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늦겨울의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봄이었기에 뜨끈한 국물 요리가 떠오르기도 했고, 춘천에 와서 닭갈비를 먹지 않는다며 불평할 동행인이 없었기에 가능한 선택이기도 하다. 식당은 춘천중앙시장에 있다. 주말에는 내국인 관광객이 많지만 평일에는 베트남 손님이 많단다. 그 맛은 보장된 집이다. 평일인데다 점심 손님이 이미 한 차례 빠져나간 뒤였기에 한산했다. 쌀국수 하나 주문했다. 레몬즙과 청양고추도 양껏 넣었다. 시고 매콤한 맛, 내가 좋아하는 맛이다. 건강 걱정 때문에 국물은 적게 먹는데 이번만큼은 남김없이 먹었다. 덕분에 든든했다. 식당에 들어설 때 몸 구석구석에 붙어있던 한기가 사우나의 고온 다습한 공기로 바뀐 게 느껴진다. 움츠러든 몸도 활짝 폈다.


산책이 하고 싶다. 운전면허가 있지만 운전 연습장을 제외한 곳에서 운전한 이력은 전혀 없는, 무면허나 다름없다.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다음 목적지, 춘천에 오면 늘 가는 그곳으로 향했다.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의암공원이다. 에티오피아벳이라는 카페와 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기념관에서 공지천교를 건너면 도착한다. 공원은 농구 코트를 비롯한 각종 스포츠 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가장자리에는 벤치와 전구 장식들, 의암호와 맞닿은 곳에는 잘 정비된 산책로가 있다. ‘내가 춘천에 왔구나’를 실감하게 해주는 장소다. 산책로를 따라 유유히 흐르는 강을 보고, 그 위에 물살을 가르며 느릿느릿 지나가는 오리배도 구경한다. 배도 부르고 시간 맞춰 할 일도 없기에 여유롭게 걷는다. 맞은편 공지천 유원지를 따라 벚꽃이 줄지어 폈다. 벤치에 앉아 그 풍경을 한없이 바라본다. 거리가 멀어 사진으로 담는 건 일찌감치 포기. 저 멀리서 꽃잎이 흩날리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하나의 미디어 아트 같다. 여기에 오기까지 서두르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나도 모르게 조급증이 발동했는지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쌀국수와 걷기의 여열이 가실 때쯤, 일어나 다시 걷는다. 공원 산책로가 끝나면 나무 데크 산책로가 이어진다. 이 길은 의암호에 더 가깝다. 그리고 더 깊숙하고 고요하다. 나무도 훨씬 우거져있다. 덕분에 나뭇잎이 바람에 사부작대는 소리와 새가 지저귀는 소리, 이따금씩 호숫물이 바닥에 철썩 부딪히는 소리가 생생하다. 이따금씩 코에 들어오는 흙냄새는 물 비린내를 가라앉혀준다. 저 멀리 산 뒤에 산이 있고 그 뒤에 또 산이 있는, 산들이 겹겹이 이어진 풍경도 인상적이다. 난간에 기대 그 산이 몇 개인지 세어 본다.


아쉽지만 산책에도 끝은 있다. 어쩌면 이 길의 최종 목적이기도 한 카페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건축가 고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로 원래는 강원 어린이회관으로 쓰이다가 2014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면서 생긴 곳이다.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붉은 벽돌 외관이 인상적이다. 이 카페의 명당은 의암호가 보이는 창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눈치 싸움은 평일에도 예외 없다. 하지만 욕심을 덜어내면 손쉽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널찍한 테이블과 안락한 의자 말고 조금 덜 푹신하고 등받이가 세워진 의자가 마련된 쪽을 택하면. 허리가 좋지 않은 나는 이쪽 자리가 오히려 더 편하다. 테이블도 노트를 꺼내 끄적이기에 적당한 높이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멍하니 창밖을 본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하게 됐다. 아이들 교육 걱정하는 엄마들 이야기, 진행 중인 작업에 대한 애로 사항을 털어놓는 회사원들의 이야기… 기억에 남는 건 바로 옆자리에 앉은 두 아주머니의 이야기였다. “춘천에 이사 왔을 때, 유배 온 것 같았잖아. 이 동네에 대해 아는 것도, 아는 사람도 전혀 없으니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뒤죽박죽 섞였다. 내게는 아무 생각 없이 떠나와 자연을 느끼며 공허함을 채우는 여행지가 다른 이에게는 유배지처럼 느껴졌다니. 낯선 곳이라면 매일매일이 처음처럼 새롭고 무얼 하든 재미있을 거라는 꿈에 부풀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최근까지 남편과 낯선 도시에서 한 달 살아보기에 대해 한창 이야기를 나누었던 터라 의외였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렇게 충격받을 일도 아니었다. 타의로 생활의 터전을 완전히 옮긴 것과 자의로 그것도 충분히 사전 조사한 후 한 달만 살아보는 것을 동등하게 놓는 건 영점을 맞추지 않고 저울질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휴, 하마터면 마음이 무거워질 뻔했다. 하지만 계속 그 대화를 듣고 있으면 그 무거운 기운에 전염될 까 봐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5시다. 6시 17분 열차를 타려면 이제 슬슬 출발해야겠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왜 그리 서두르냐고? 갈 때는 올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을 마주하고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열차 시간에 딱 맞춰 출발해선 안 된다. 여유를 즐기려면 잠시 쉬어가야 하니까. 그렇게 또 한 번 산책을 즐기고 공원을 나선다.


남춘천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8시. 집에 도착했다. 짧지만 여유로웠던 여행이 끝났다. 때마침 퇴근한 남편도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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