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이 마주한 감정 소비의 역설
오늘은 25일, 월급날이다.
은행 앱을 켜고 잔고를 확인한다.
"돈은 들어왔는데…"
흠. 하며 안도감과 함께 묘한 허전함이 스며든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린 택배를 받았는데, 막상 뜯어보니 생각했던 것과 다른 느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깐. 갑자기 "이제 뭐 하지?"라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툭 건드린다. 이내 "이 돈 가지고 뭐 하지?"라는 혼잣말을 하고야 만다.
그저 돈이 없어서 불안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돈이 생겨도 공허할 때가 있다. 분명 수치상으로는 플러스인데, 마음의 계산기는 자꾸 마이너스를 찍는다.
대체 이 감정은 뭘까.
남들도 다 비슷한 생각이다.
그리고 왜 급여 생활하는 직장인들은 이런 허전함을 공통으로 느끼는 걸까.
돈이 들어오자마자 사라지는 시대의 잔혹함
한국의 대부분 회사는 25일 즈음이 월급날이다. 카톡 단체방에서 "오늘 월급 들어왔나요?"라는 말이 돌면, 하루가 왠지 가벼워진다. 동료들과 "오늘은 치킨이다!" 하며 웃기도 한다.
하지만 기분 좋은 것도 잠시다. 며칠 지나면 "벌써 카드값 빠졌어?", "대출이자도 오늘 빠지네", "보험료랑 통신비까지 나가면 얼마 안 남아" 하는 얘기가 줄줄이 튀어나온다.
월급이 '돈'이라기보다 '채무이행 수단'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그 돈에 감정적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다. 내 손에 머물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돈을 보며 "내가 한 달 동안 고생한 게 이거였나?" 싶은 허탈감이 든다.
더 잔혹한 건, 이게 단발성이 아니라 매달 반복된다는 것이다. 월급날의 기쁨도 잠깐, 월말의 절망도 잠깐. 그 사이에서 우리는 점점 감정이 무뎌진다.
쓴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많은 이들이 월급 받은 주말에 이렇게 말한다. "뭐라도 하나 사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막상 사고 싶은 게 없어."
이상한 일이다. 분명 돈은 생겼는데, 소비에 대한 욕구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왜일까?
명품 가방도, 비싼 카페도, 배달앱의 맛있는 음식도 이미 다 해봤다. 처음엔 설렜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무언가를 사는 행위가 더 이상 '나를 채우는 경험'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월급날이 기쁜 이유가 바뀌었다. 예전엔 '나를 위한 소비'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면, 이제는 그냥 '한숨 돌릴 수 있는 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비의 순간적 쾌감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오는 공허함도 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지고, 더 무기력해진다. "돈을 써도 행복하지 않다면, 대체 뭘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월급 = 노력의 증명'이라는 낡은 환상의 붕괴
우리는 늘 배워왔다.
월급은 노력의 대가라고.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라고.
그런데 막상 현실은 다르다. 누군가는 힘 안 들이고도 더 많이 벌고, 누군가는 정말 열심히 해도 늘 빠듯하다. 같은 회사, 같은 나이인데도 연봉 차이는 꽤 나기도 한다.
SNS를 보면 더 혼란스럽다.
또래는 해외여행 사진을 올리는데, 나는 점심값도 계산기 두드려가며 먹는다는 사람들의 글도 자주 보인다. 노력의 양과 보상의 크기가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매일 목격한다.
그래서 월급날이 되면 이상한 감정이 든다. 기쁘기보다는 복잡하다. '이게 나의 값인가?', '나는 한 달 동안 도대체 뭘 위해 이렇게 달렸던 걸까?'
노력과 보상이 불균형해진 시대, 월급은 보람보다 상실의 느낌을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상실감은 소비로도, 휴식으로도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결국은 '마음의 월급'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답은 명확하다. 돈은 분명 들어왔다. 하지만 누군가의 진심 어린 인정, 따뜻한 대화, 성취감, 보람 같은 '비금전적 보상'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은 텅 비어 있다.
직장에서 하루 8시간을 보내지만, 정작 내 마음을 채워주는 시간은 몇 분이나 될까? 상사의 칭찬 한 마디, 동료와의 유쾌한 대화, "오늘 일을 잘 마무리했다"는 뿌듯함. 이런 감정들이 하루에 몇 번이나 찾아올까?
현대인의 진짜 피로는 "돈은 돌고 있는데, 나는 점점 고장 나는 기분"에서 비롯된다. 은행 앱은 잘 켜지는데, 내 마음의 잔고는 늘 마이너스다.
그러니까 월급날의 허전함은 돈 문제가 아니다. 감정 문제다. 물질적 월급은 받았지만, 정서적 월급은 받지 못한 상태. 그 격차가 우리를 공허하게 만든다.
감정 소비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법
고통과 영광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고통과 영광을 떨어뜨려 놓으려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말로는 '고통과 영광은 양립할 수 없는 운명 공동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달콤하기만 하지도 않고, 쓰디쓰기만 하지도 않은 '단쓴단쓴'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의미가 없어지는' 일을 하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월급을 감정 소비의 해소제로 쓰지 말자.
허전할 때마다 "뭐라도 사자"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건 마치 배고프지도 않은데 계속 뭔가를 입에 넣는 것과 같다. 충동구매는 텅 빈 마음을 더 깊은 공허로 이끌 뿐이다.
대신 이렇게 물어보자. "지금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물건이 아니라 감정일 확률이 높다. 인정받고 싶거나, 위로받고 싶거나, 성취감을 느끼고 싶거나.
월급날마다 작은 의식을 만들어보자.
돈이 들어온 날, 그냥 지나치지 말고 나만의 작은 의식을 만들어보자. 카페에서 혼자 커피 한 잔 마시며 한 달을 돌아보기, 산책하며 나 자신을 칭찬하는 메모 쓰기,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고생했어"라고 중얼거리기.
핵심은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월급이라는 숫자보다 '내가 한 달 동안 버텨낸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
지출 계획표보다 감정 계획표를 먼저 써보자.
가계부는 많이 써봤지만, 감정부는 써본 적 있는가? "이번 달 나는 어떤 감정을 살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자.
새로운 취미로 성취감 사기, 친구들과의 시간으로 소속감 사기, 혼자만의 시간으로 평온함 사기. 돈이 아니라 '내 삶의 리듬을 사는 법'에 집중해 보자.
현대인의 공허함, 그 실체를 마주하기
사실 월급날의 허전함은 더 큰 문제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 비슷비슷한 업무, 형식적인 인간관계. 그 사이에서 '나다운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월급은 그런 일상의 마지막 보상인데, 그마저도 허전하니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돈이 아니다. 더 많은 '나다운 순간들'일지도 모른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걸 하는 시간, 내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들, 누군가와 진심으로 연결되는 경험들.
그런 순간들이 쌓일 때, 월급날도 단순한 '돈 들어오는 날'이 아니라 '나를 위한 날'로 바뀔 수 있다.
마무리: 당신의 마음에도 월급이 입금되길
지금 당신의 통장에 돈은 들어왔을지 몰라도, 마음의 통장은 여전히 잔고부족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정상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제 알았으니, 조금씩 바꿔볼 수 있다. 진짜 월급은 숫자가 아니라 감정이라는 걸. 우리가 한 달간 감내한 피로와 외로움, 억울함을 보듬어줄 '정서적 월급날'도 필요하다는 걸.
돈은 잠깐이지만, 나를 돌보는 감정은 오래간다. 물질적 풍요보다 정서적 안정이 더 깊은 만족을 준다는 걸,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의 마음에도, 따뜻한 월급 하나 입금해 보면 어떨까. 오늘 하루 고생한 나에게, 이번 달 버텨낸 나에게. 작은 칭찬 하나, 따뜻한 위로 한 마디라도.
그게 진짜 월급날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아직 먼 다음 달 월급날을 기다리며.
Here With Me
알파시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