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안정을 추구한다
처음 취리히에 발을 딛었던 때 나는 만 23살이었다. 당시 나는 스위스에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에 도착했다. 그런데도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그때만 해도 '친구는 만들면 되지' 라는 생각이었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함께 공부하고 어울릴 생각에 신났던 것 같다. 현실은 상상과는 매우 다를 수 있다는 걸 아직 몰랐다.
기숙사에 도착한 후 아직 방 키를 받지 못해 갈 곳이 없는 내게, 유일하게 연락해볼 만한 사람은 대학원 유학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알게 된, 나보다 1년 먼저 취리히에 온 대학 동문 언니였다. 우연히도 내가 배정받은 기숙사에 그 언니가 이미 살고 있었다. 언니에게 연락하니 고맙게도 자신의 플랫에 나를 데려와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다. '아, 이제 적어도 같이 어울릴 사람 한 명은 있구나.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언니가 말했다. 남자친구와 데이트가 있어서 곧 나가봐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언니에게 이미 안정적인 관계가 있을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적잖이 놀랐다.
'여기 온 지 1년 만에 벌써 남자친구도 있다니...'
낯선 땅에 홀로 와 아는 사람 하나 없었던 내게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하는 언니의 모습이 너무도 여유롭고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유학생활 3개월 만에 이곳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진지한 파트너(애인)이 있고, 그들과 같이 살다시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에 있는 내 친구들은 지금껏 솔로로 지내온 친구들도 많았기에,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벌써 안정적으로 파트너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이곳은 연애를 하는 게 정말 '디폴트' 인 곳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자리에 파트너를 불쑥 데려오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어딜 가나 항상 함께 다닌다. 같이 사는 경우도 많고, 서로의 부모님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들 어디서 그렇게 잘만 만나는지 궁금했다. 진지하게 만나는 애인이 없는 친구들은 지금껏 만난 사람들 중에 10% 가 안 될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사람들이 가장 큰 컬쳐쇼크가 무엇이었냐 물어보면 연애 문화라고 답한다.
물론 한국도 연애에 진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를 안 하는 사람들 또한 꽤 많다. 싱글의 삶을 즐기는 사람도 많고, 요즘에는 싱글이 혼자서 즐길 수 있을 만한 놀거리도 많다. 혼자 노래방을 가도 되고, 혼자 맛집에 가도 되고, 혼자 영화를 봐도 되고, 혼자 스포츠를 배워도 된다. 한국은 싱글들을 위한 동호회도 잘 되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저녁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주말 대부분을 가족/연인과 보내는 유럽에서는, 내 가족 없이 홀로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도 외롭다. 물론 여기 사람들도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들과만 어울리고, 그들의 그룹에 끼는 것은 정말 힘들다. 우리도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굳이 내 주변의 친한 친구들을 놔두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외국인들과 굳이 어울릴 생각이 들지 않는다. 특별히 관심사가 겹치는 게 아니라면, 그들과 절친한 관계가 되는 것은 어렵다고 느낀다.
다행히 나는 석사과정 동안 운이 좋게도 정말 친하다고 부를 수 있는 친구 두 명을 사귈 수 있었다. 지금은 서로 다른 도시에 살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일년에 한두 번은 꼭 만난다. 감사하게도 마음이 맞는 남자친구도 만나게 되어 지금은 결혼을 생각할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름 안정적인 인간관계를 가진 내가 이 주제로 글을 쓰게 된 것은 최근 두 명의 친구들이 우리집에 다녀가고 나서 든 생각 때문이다.
한 명은 지난번에 포스팅한 15년만에 만난 중학교 친구다. 나와 만난 지 10분 만에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여기서 싱글 여성으로는 혼자 평생 못 살 것 같아'
그 친구는 위치만 독일에 있는 한국 회사를 다니고, 한인 교회를 다니고, 한국인 룸메와 살고 있는데도 해외살이가 힘들고 외롭다고 했다. 한국 살 땐 몰랐는데 자기가 생각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 것 같다며,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단다. 친구는 진지하게 한국 영구 귀국을 고려하고 있었다. 해외에 살면서 오히려 결혼 생각이 커졌다며, 어서 짝을 찾아 안정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놀랍게도 내가 유학 첫 날 만났던 대학 동문 언니다. 언니는 취리히에 5년 정도 머물다가 석사 졸업 후 비자 연장이 안되어 한국에 돌아갔다. 조금 적응했나 싶었는데, 휴가 내고 스위스에 다시 놀러온 언니가 내게 말했다. 한국 회사랑 자기랑 안 맞는 것 같다고. 한국 친구들도 이제 다 자기 짝을 만나고 결혼하느라 만날 시간이 없다고. 그리고 자기는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 결국 헤어졌다). 하지만 곁에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둘은 서로 상황도, 성격도 달랐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이 감정은 해외생활을 하면서 점철된 외로움과 함께 극대화되었다.
그들을 너무나도 이해하기에, 쉽게 위로할 수 없었다. 타국에서 오는 외로움은 단순한 것이 아니니까. 아무리 친구를 사귀어도, 결국 그들 또한 자신들의 파트너에게 돌아가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안정에 대한 추구는 깊어지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어진다. 노력하는 만큼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도 아니다. 평생 함께할 배우자 만나기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라고 느낀다.
안정에 대한 추구와 해외에서의 커리어 찾기는 파트너 없이 양립할 수 없는 걸까.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이 감정을 이겨내고 있을까.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일까.
많은 생각이 떠오른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