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의 위상이 높아지는 중
나의 첫 유럽생활은 대학교 학사 3학년 때, 교환학생 신분으로 오스트리아에 머물 때였다. 당시는 2018년으로, 지금에 비하면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때였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사우스 오어 노스?' 라는 말이 돌아오는 것이 부지기수였고, 케이팝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BTS도, 오징어 게임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그런데 3년이 지나 2021년 가을 스위스 취리히에 석사생으로 첫 발을 내딛었을 때, 아주 약간은 한국에 대한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었다. 오징어 게임 때문이었다. 그 해 할로윈 데이에 오징어 게임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영화 '기생충'을 봤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기는 했다.
시간이 흘러 2025년. 그 사이 BTS가 더욱 유명해지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나오면서 K-컬쳐에 대한 인지도는 수직상승했다. 이제는 한국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이사한 후 인사 겸 작은 소개글을 적어 이웃에게 돌린 적이 있는데, 한 분(마케도니아 출신)의 답장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딸과 아내가 있는데, 둘 다 한국 아이돌에 빠졌어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해요.' 우연히 마주친 다른 이웃(크로아티아 출신)이 처음 뵙는 가족분과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걸 듣더니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 한국에 가고 싶어해요! 한국이 인기가 많아요!' 라고 하셨다.
해외살이를 하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으니,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은 그들보다 더 특별한 사람들, 바로 나의 한국어 학생들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때는 2025년 3월이었다. 한국어 과외 선생님으로 등록해 놓은 플랫폼에서 연락이 왔다. L로 시작하는 여자 이름의 학생이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데 전혀 모른다면서,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대면으로 수업을 원하는 분이었다. 전혀 문제 없다고 하고, 시범수업을 진행하자고 제안해서 우리집으로 그분이 오시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놀라웠던 것은, 그분이 백발에 푸른 눈의 할머니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케이팝을 좋아하는 청소년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나이 드신 분께서 대문 앞에 서 계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분(L씨)은 나이가 꽤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말씀이 상당히 많으신 분 같았다. 책상에 앉자마자 자신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셨고, 한국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한국문학 책도 찾아보고 있다고 했다. 한국 작가 황석영과 공지영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실로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이분은 토종 스위스인으로 한국과의 접점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L씨의 열정은 대단했다. 감수성도 상당히 풍부한 분이셔서, 한국전쟁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우실 때는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했다.
다행히 나의 시범수업이 마음에 드셨는지, 본격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수업을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이다. 한글도 읽을 줄 모르던 L씨는 지금 기본적인 문장을 구사할 줄 안다. 다행히 L씨의 한국어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고 있다. 수업 외에도 매일 듀오링고 학습과 단어 암기를 두 시간씩 하신다. 그에 따라 실력은 눈에 띄게 늘었다. 스위스와 한국을 연결해주고 있다는 뿌듯하고 보람찬 마음으로 이분과의 수업을 진행 중이다. 다만 L씨는 굉장히 당찬 분이시라 가끔 에너지 컨트롤이 쉽지 않을 때도 있다. L씨는 한국 가수들도 좋아하는데, 한번은 내가 잘 모르는 비투비의 서은광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으셔서 진땀을 뺐다. 그래도 그분이 한국 문화를 접하면서 행복감을 느끼시는 것을 볼 때 기분이 좋다. L씨는 곧 한국을 직접 방문할 예정이다.
두 번째 학생은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됐는데, 바로 A씨다. 이분도 역시 흰머리의 작은 체구를 지닌 할머니셨다. 어떻게 두 명 연속으로 할머니 학생을 만나게 되었는지 나도 신기할 따름이다. 왠지 내 프로필이 연세 있으신 분들이 보기에 신뢰도가 높아 보였나? 아무튼 스위스에 이렇게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할머니들이 계신 것도 신기한데, A씨 또한 그 중 한 분이었다. 약 2년 전부터 넷플릭스에 한국 드라마가 뜨는 것을 보고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 후 한국 드라마에 매료되어 웬만한 시리즈는 다 섭렵하신 듯했다. A씨는 굉장히 예의 바르고 조용조용하신 분이었다. 한국어를 배우고는 싶지만 너무 어려워서 자기가 포기하게 될까 겁이 나신단다.
A씨와는 차분히 조금씩 수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역시 한글부터 시작했다. A씨는 시작한 지 오래 되지 않아 아직 한국어로 문장을 만들지는 못하시지만, 이제 한글을 다 떼셨고 받침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 다행히 A씨도 한국어 수업을 굉장히 즐기고 계시고 열정 또한 갖고 계신 것 같다. 간간히 한국의 음식이나 예절 등의 문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얼굴로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을 느낀다. A씨의 한국어가 앞으로 얼마나 늘게 될지 기대가 된다.
이분들께는 내가 얼마 안 되는 '토종 한국인과의 접점' 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사는 곳은 소도시라 한인이 아주 많지 않기도 하고, 다들 바쁘기 때문에 한국어 수업을 한다고 해도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할머니 학생들은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 컴퓨터 사용을 조금은 불편해하시고, 직접 만나서 배우기를 원하신다. 나 또한 스위스 현지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소소하게 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이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한국어도 전파하고, 지역 공동체 내 네트워킹도 원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