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일주일간의 동거
도둑 문제로 이사한 지 세달 차. 전에 살던 곳보다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한 집이었다. 모던한 실내 디자인과 건물, 햇빛이 듬뿍 들어오는 완벽한 남향, 통창 너머로 보이는 산과 호수... 장담하건대 지금까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은 곳에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널찍한 거실과 방 두 개, 화장실 두 개로 이루어진 우리 집은 손님들이 묵고 가기에 손색이 없는 구조였다. 유럽은 호텔 가격이 매우 비싸기도 하고, 집에 초대하는 문화가 강해 방이 남는 경우 게스트룸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거실을 오피스 겸 활용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집 침실을 제외한 다른 방을 남자친구의 오피스 겸 게스트룸으로 정해 두었다. 지난 연말 그의 친구들이 방문할 때를 대비해 제대로 된 매트리스 침대까지 구비해 둔 상태였다.
그의 친구들의 방문을 시작으로, 그의 가족들이 우리 집 방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마침 연초는 스키 시즌이기도 했다. 우리 집은 스위스/프랑스의 유명한 스키장들과 꽤나 가깝다. 이 때문에 매년 스키 여행을 오시는 아버님을 한달만에 우리집에서 또 뵙게 되었다. 아버님의 경우 다음날 바로 스키장으로 떠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하루만 묵으셔서 큰 불편은 없었다.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즐거운 저녁식사를 했다.
그런데, 아버님이 오신 지 3주 만에 남자친구의 어머님이 우리집에 오시게 되었다. 이사하고 얼마 안 되어서 바로 연락이 왔다. 아들이 사는 새 집이 궁금하신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무려 일주일을 머무르시겠단다. 주말에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평일에는 본인이 알아서 하시겠다고 신경쓰지 말라며. 그러나 나는 평소에 집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낸다. 재택근무를 할 때도 있고 거실에서 요가를 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긴 기간에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하지만 어떡하나. 오시겠다고 하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이사 후 첫 방문이기도 하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한편으로는 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평일에는 오피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테고, 저녁은 어차피 매일 요리해 먹으니 1인분만 더 하는 것이 큰 일은 아니다. 어머님은 남자친구의 가족들 중 영어를 가장 잘 하시기 때문에 소통에 크게 불편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냥 불편하다. 타인이 내 공간에 함께 머무르는 것 자체가. 불편함을 대놓고 티낼 수도 없다. 남자친구를 타박하기에는 우리 가족도 올해 방문이 예정되어 있어 그것도 쉽지 않다(그리고 그도 어머님의 장기간 방문을 크게 반가워하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어머님은 흔히들 생각하는 한국, 아니 어쩌면 전 세계에서의 보편적인 '어머니'의 이미지와는 매우 다르시다. 그의 말로는 어머님이 자신을 키우면서 직접 요리를 한 적이 거의 없고(대부분 냉동식품을 오븐에 넣거나 간편식 또는 샌드위치를 먹는 방식), 청소와 빨래 또한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셨단다. 한국의 많은 주부들이 보면 소위 '팔자 편한' 이미지로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어머니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나도 같은 여성으로서 여성에게 가사 일이 당연히 맡겨졌던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웃기게도 그분을 자꾸 우리 엄마와 비교하게 된다. 이전에 우리 엄마가 스위스에서 집에 함께 머무르신 적이 있는데, 우리 엄마는 "당연히" 딸을 위해서 맛있는 것을 잔뜩 해 놓으셨다. 이런 마음이 그분에게는 없는 것이다.
어머님이 우리집에서 요리를 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손님으로 오신 건 맞으니까. 하지만 나와 남자친구가 공들여 만든 요리를 드시고 설거지를 도와주는 둥 마는 둥 한 채로 방에 쏙 들어가 버리시는 모습을 보면 참 자기 멋대로 하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분이 미덥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그분은 작년 스위스 방문 때 핸드폰 요금을 아끼기 위해 데이터 로밍도 하지 않고 오실 정도로 절약 정신이 투철하신 분이다. 뭐 여기까지는 좋다. 경제 관념이 철저한 건 좋은 거니까. 하지만 그분은 정말이지 돈을 안 쓰려고 너무나도 노력을 하시는 게 보인다. 지난 주말 제네바로 나들이를 갔을 때, 커피와 간식 값을 우리가 결제할 때 가만히 계셨고, 평일 우리집에 머무를 때도 점심 값을 아끼기 위해 집에서 챙겨 먹고 나가신다. 당연히 함께 외식은 한 적 없다.
돈에 관련한 그분의 태도는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작년에 어머님께서 남자친구의 남동생분과 함께 미국 여행을 다녀왔는데, 남동생이 경제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이 여행 경비를 전부 지불하셨다고 한다. 남자친구는 어머님과 여행할 때 항상 자기 분의 몫을 지불했기에 공평하지 않다고 느꼈고, 이에 어머님께서 우리 집에 필요한 가구들 중 하나를 사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막상 남자친구가 그 얘기를 꺼내니, "아, 당연히 사줄 수 있지. 그런데 너 얼마 전에 할아버지한테서 돈 좀 받지 않았니?"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셨단다. 어쩜 이렇게 우리 부모님과 다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어떻게든 자녀에게 하나라도 더 주려고 노력하시는데.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든 아닌 것이든 말이다. 어머님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이시라면 당연히 이해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부동산을 몇 개 갖고 계시고, 경제적 여유가 충분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것도 문화 차이인 걸까. 아닌 것 같다. 주변의 유럽인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이분은 특이하다.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만큼, 내가 알고 있었던 '부모' 와 '가족'의 양상이 어떤 가정에서는 매우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