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의 선민의식과 문화적 갈등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우리집에 오신 지 8일 째. 드디어 그분이 독일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왔다. 오늘이구나! 아침부터 상쾌하게 눈이 떠졌다. 이 화목한 듯하면서도 어색한 듯한 분위기도 안녕이구나! 그분과 함께한 일주일은 한국의 시댁같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의 불편함은 당연히 존재했다. 최대한 그분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려 노력했다. 워낙 독립적인 분이라 끼니를 챙겨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물론 저녁에는 어차피 요리해 먹기에 식사를 함께하긴 했지만.
그분께서는 일주일씩 우리집에 머무르는 것이 조금 미안하셨는지 전날이었던 금요일 저녁은 자기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는 중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었다. 주말이 다가와서인지, 맥주를 한 잔 마셔서인지 나는 기분이 평소보다 조금 나아졌고(어떤 날은 어머님이 정말로 불편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남자친구의 어린 시절이나 조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하며 즐거운 식사를 했다. 어머님께서도 음식이 정말 맛있다며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인 오늘. 토요일 아침이니만큼 느긋하게 일어나 혼자 유튜브를 보며 침대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남자친구는 스키를 타러 아침 일찍 나간 상태였다. 나는 오후에 온라인 독서모임과 한국어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독서모임을 하는 동안 어머님은 잠깐 외출하고 돌아오셨다. 한국어 수업을 위해 외출해야 했기에 집에 돌아오면 그분이 떠나 있을 거라 미리 인사를 하기로 했다. 그분은 내가 어제 건넨 한국에서 가져온 브로치 선물이 마음에 드셨는지 답례로 꽃을 한 다발 사들고 오셨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외출하기 전 잠깐 나눈 대화에서 생겼다. 어머님은 6월에 있을 우리 아빠의 방문에 대해 언급하시며 어떤 활동을 함께할지 물으셨다. 나는 부담 가지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추가로 우리 아빠는 굉장히 보수적이며 유럽 사람들과는 다른 사고를 하시는 분이니 이해를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어머님은 별 거 아니라는 듯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의 결혼 전 커플 동거 문화가 그리 활발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이것 때문에 아빠가 결혼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다. 놀라시지 말라고.
어머님은 "독일은 결혼 안하고 같이 사는 커플들 천지고, 부모의 주장 때문에 자녀가 결혼해서는 안 돼. 나 또한 내 아들의 선택을 존중할 거고." 라고 하셨다. 이미 그들의 문화는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크리스마스에 매년 함께 그의 가족을 방문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국인으로서 낯설지만 그를 존중한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거기에 하신 말씀.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게 있어. 넌 네 선택으로 유럽에 온거야. 네 선택으로 이곳에서 공부했고, 네 선택으로 이곳에서 살고 있어. 그건 우리 아들 선택이 아니지. 그리고 유럽에 살면 이곳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거야."
틀린 말씀은 아니었다. 내 선택으로 유럽에 온 게 맞고, 내 선택으로 이곳에서 살기를 결정한 것도 맞다. 그런데 유럽에 산다고 반드시 유럽의 문화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운 문화는? 우리 가족들은? 나의 거주지 때문에 내가 살아온 문화를 전부 무시하고 이곳의 문화만을 따르며 그렇게 살아가는 게 맞는 건가?
솔직히 그 말씀을 듣고 서운했다. 그렇구나, 너희 나라 문화는 그렇구나. 낯설었겠다. 정도만 해 주셔도 좋았을 텐데. 그러나 어머님은 한술 더 떠 말씀하셨다.
"너희, 앞으로 어디 살 진 정했니? 스위스라면 결국 유럽 생활인데, 너도 이곳에 오래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국의 문화는 뒤로하게 되지 않을까?"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인가. 나는 나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릴 생각이 추호도 없다. 입장 바꿔 당신 아들이 한국에 살면 크리스마스에 오지 말라고 할 건가. 당연히 아닐 거다. 결국 이 말의 깊은 내면에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넌 유럽보다 못한 나라에서 왔고, 더 좋은 나라 살고 있으니 이곳의 문화에 맞추며 열등한 너희 나라는 조금 잊어버려도 되지 않니?"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며 가슴이 시려왔다.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고 한국인 가족이 있는 사람인데. 왜 내가 유럽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내 문화는 존중받지 못하는 걸까. 그제서야 어제 선물을 드릴 때 약간은 떨떠름해하시던 그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선물을 맘에 들어 하셨지만, 독일에서는 선물을 자주 하는 문화가 아니라고 하셨다. 거기에 덧붙인 말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하층 계급일수록 더 큰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가진 게 없을수록 보여주려고 해서 그렇다고. 선물 문화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아니셨겠지만 정성스레 선물을 준비한 내게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싶었다. 졸지에 명절 선물을 열심히 주고받는 한국인들을 미개한 사람들로 만들어버린 느낌이었다.
어머님의 충격적인 발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나의 의견을 피력하려 노력했다. 이곳에서는 가만히 듣기만 하는 사람은 바보니까.
"어머님,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당연히 저도 유럽에서 살고 유럽인 파트너를 둔 사람으로서 그의 문화를 존중해요. 하지만 저도 제가 살아온 문화와 환경이 있고 제 가족들은 전부 한국인이에요. 제가 유럽에 산다고 해서 한국 문화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곳에 맞춰 살 수만은 없어요. 그리고 적어도 제 파트너는 그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어머님은 자신의 아들은 좋은 사람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며, 특별히 더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너희의 행복을 바랄 뿐이라며 더 나를 공격하지는 않으셨다. 나도 안다. 어머님이 특별히 나쁜 분이 아니라 그저 너무도 한국에 대해 알지 못하기에 무지함에서 그런 발언을 하셨다는 걸. 그러나 이 대화를 통해 그분의 기저에 깔린 선민의식 또한 뼈가 시리도록 느꼈다. 그리고 이건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지독한 무관심은 잘못된 판단을 낳았고, 그 화살은 나에게 꽃혔다.
이분은 겉으로는 굉장히 열린 마음을 갖고 계시고 영어도 유창하시고 항상 나에게 잘해주셨기에 충격이 조금 컸던 것 같다. 그래도 웃으며 보내드려야 했기에 최대한 밝게 이야기하며 서로 포옹 인사로 마무리했다.
집을 나서 기차역으로 걸어가는데 순간 울컥해 눈이 시렸다. 내 고국의 문화가 그분의 발언에 의해 한순간에 미개하고 별 것 아닌 게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파왔다. 은근히 무시당하는 것 같아 불쾌했고, 왜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서러워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한국어 수업을 했다. 70세 노인이신 나의 스위스 할머니는 한국어 공부에 이리도 열심이신데. 왜 내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그런 말밖에 하실 수 없는 걸까.
집에 돌아오니 남자친구가 집에 돌아와 저녁을 하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그였지만 오늘 일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이야기했다. 말하면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렁그렁한 눈에서 수없이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놀라며 그런 일을 겪게 해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경솔한 발언을 했다며 자기가 얘기해 보겠다는 그를 말렸다. 그거야말로 고부 갈등의 시작이라고. 해결할 거면 나와 그 분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설명했다. 내가 나중에 편지나 이메일을 쓰던 어떻게 하던 해보겠다고.
나를 끌어안으며 위로하는 그가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바로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결국 그분이 그의 어머니인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나는 이런 문화적 차이와 갈등을 견딜 준비가 되어있는 걸까.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많이 이런 상황 속에서 가슴 아파하고, 차이를 극복하려 노력하고, 양가에 이런 부분을 이해시키려 노력해야 할까. 속상함에 얼마나 더 많은 눈물로 밤을 보내야 할까. 생각이 복잡해져 글을 끄적였다. 요즘 국제커플은 차고 넘치는데, 다들 어떻게 이런 갈등을 해결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우린 잘 이겨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