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양반, 얘 키가 커서 그렇지 유치원생이야! 얘 차비는 못내!"
"어딜 봐서 유치원생이에요? 얼른 차비 내세요!"
"아니라니까! 유치원생인데 키 빼기가 커서 그래!"
"아효 참, 할머니 이번만 봐드려요. 담부턴 차비 내고 타세요."
"얘 유치원생이라니까는....."
읍내 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차비 실랑이.
유치원생 때도 다른 아이들보다 한 뼘은 더 컸던 나를 초등학생이 되었음에도 기어이 우겨 불편한 버스를 타게 만드는 할머니와 읍내 장에 나가는 길이었다.
할머니 실랑이를 참아내는 첫 번째 관문만 통과하면 5일장에 나가는 일은 매번 설렜다. 옷걸이에 매달려 움직이는 새 옷 냄새도, 장터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불어오는 길거리 음식 냄새가 좋았다.
"좀 빼줘!"
"이거 팔아야 남는 것도 없어요."
"이천 원만 빼줘, 얘랑 집에 갈 차비는 좀 빼줘야지."
"아이고, 어르신도 참, 천 원만 빼 드릴게요."
"이왕 빼 주는 거 이천 원 빼줘!"
또 시작된 실랑이.
어떤 물건도 제값을 내고 사는 법이 없는 할머니 목소리가 장터 안에서 점점 더 커져 갔다. 서른에 혼자가 된 할머니는 두 번의 결혼으로 성이 다른 자식 셋을 두었다. 그중 첫 번째 자식이 우리 아빠고 그 자식의 첫 번째 손주가 나다.
학교를 다닌 적도, 글을 따로 배운 적도 없지만 할머니는 한글이며 셈이며 젊은 엄마보다도 빨랐다. 순둥이 엄마는 물건 값을 흥정하는 할머니 스킬을 따라 하지 못했다. 내가 있는 앞에서도 핀잔을 들었지만 엄마에게 할머니 흥정 스킬은 내가 풀지 못하는 최고 수준 수학 문제집과도 같았다.
먹자골목에 들어서자, 떡볶이와 순대, 족발, 통닭들이 더 가까이 코끝에 닿아서는 입안에 침을 흘리게 만들기 시작했다.
"할머니, 저기 저거 먹고 가면 안 돼?"
"버스 놓치면 2시간 길바닥서 기다려야지 돼. 얼른 집에 가서 밥 먹자."
"저거 먹고 싶은데....."
할머니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시계를 보며 나를 잡아끌었다. 눈물이 차 올랐다. 그런들 발길을 돌려 줄리 없는 할머니는 등을 보이며 저만치 앞장서 걸었다.
"버스 오기 전에 얼른 먹어."
시장에서 못 먹은 떡볶이와 순대 생각에 버스 정류장 바닥에 있는 흙을 차며 흙먼지를 피우는 사이 할머니는 브라보 콘 하나를 내게 건넸다.
"집에 가서는 암말 말어."
동생들 몰래 나에게만 주어진 호사였다.
할머니는 그랬다. 인삼밭에 일당을 받고 일을 하러 갔을 때도 중간 새참으로 나오는 빵과 우유를 먹지 않고 챙겨 왔다. 땀에 젖은 옷을 벗기도 전에 나를 따로 불러 동생들과 나눠 먹으라고 주면서도 내게만 몰래 하나를 더 얹어 주었다.
"맛있냐?"
"응. 진~짜 맛있어."
초여름 더위가 한여름 더위 못지않게 묵직한 더위를 뽐내던 그해 여름, 요양원 앞 슈퍼에서는 연이가 한참을 뛰어다니며 카트를 채웠다.
"드실 수 있는 것만 담아야 해. 너 먹고 싶은 거 말고 왕할머니 드릴 걸로 골라."
"나 좋아하는 건 왕할머니도 좋아할걸?"
"그건 네 생각이고!"
"먼저 보니까 왕할머니 아이스크림도 잘 드시던데? 그거 나랑 입맛이 같다는 거거든."
요양원 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맡아지는 냄새에는 항상 알 수 없는 매캐한 코끝의 매움이 있다. 눈치 빠른 연이가 그런 내 눈을 살피는 걸 알면서도 훌쩍였다.
"승희할머니, 손녀딸 오셨네."
간병인 이모에 말에 티브이를 보다가 환해지는 얼굴로 할머니가 나를 맞았다.
"승희할머니 그렇게 좋으셔요?"
"으... 응."
말끝은 어눌하지만 얼굴은 계속 웃고 있다.
"이거 드려도 될까요?"
간병인 이모에게 마트에서 담아 온 간식봉지를 내보이며 물었다.
"너무 많이 드시지만 않게 해 주세요."
간병인 이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이가 아이스크림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엄마, 나 이거 먹을래! 왕할머니도 이거 먹고 싶죠?"
"지가 먹고 싶으니까 왕할머니 팔기는....."
"아냐, 왕할머니도 이거 좋아하죠? 그렇죠 할머니?"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말하는 연이를 보며 할머니가 연신 웃음소리를 흘린다.
"할머니, 맛있어요?"
"으... 응, 마... 이.... 어..."
할머니 손을 타고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렸다. 휴지를 들고 할머니 손에 흐른 아이스크림을 닦아내자 할머니 눈에 어릴 적 연이가 보였다. 다 먹지도 못하면서 끝끝내 혼자 먹어보겠다고 손을 놓지 않던 연이가 그 순간 할머니 눈 속에 있었다.
"왕할머니, 아이스크림 맛있죠?"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할머니를 보며 연이가 말했다.
"저도 맛있어요."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고 내가 말했다.
"나도 참 맛있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 흐르는 아이스크림콘을 먹었다.
더위따윈, 눈물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