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 II
서울 촌놈인 남편이 결혼 전 우리 집에 놀러 왔던 날,
"서울 사람은 이런 거 좋아하나 모르겠네."
엄마는 한여름 뙤약볕을 감당하며 당신이 손수 길러낸 옥수수를 찜기에 쪄서는 첫 사위가 될 큰딸의 남자 친구에게 건넸다. 남편은 그때껏 자기가 먹었던 옥수수는 옥수수가 아니었다며 연신 감탄사를 엄마에게 날려주었다. 그날 이후 옥수수는 엄마의 자부심이자 자식에 대한 사랑이 되었다.
서울 촌놈 큰 사위에 이어 5년 후 들어온 인천 촌놈 작은 사위에게도, 20년 후 들어온 일산 도시 며느리에게도 옥수수가 다 익은 이맘때면 엄마는 어김없이 한결같은 이 말로 전화를 돌린다.
"옥수수 다 익었어. 언제 먹으러 올래?"
고3이 되던 해 5월, 두 번의 은행 원서를 고사하고 기다리던 대기업 원서를 받을 수 있었다. 대학을 포기한 내게 그것은 아주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 간절함은 하늘에 닿았고, 나는 우리 학교에서 제일 처음 취업에 성공한 학생이 되었다.
가장의 무게로 삶이 버거워 보이던 아버지의 처진 어깨와 밤이면 이어지던 술주정, 그 무게를 같이 감당하느라 고단해 보이는 엄마의 삶으로부터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자라는 내내 단 한 번도 나만의 독립된 공간을 가져본 적 없는 나는 혼자만의 자취를 꿈꿨다. 우리 집 형편상 목돈이 들어가는 딸의 자취방을 구해준다는 것은 내가 대학을 꿈꾸는 일만큼이나 꿈같은 일임을 알았음에도 나는 그런 꿈을 꾸었다.
그런 꿈을 꾸고 있는 나를 지켜보던 엄마는 대기업 공채에 붙은 5월부터 나 몰래 나를 어디에 맡길까를 두고 말 못 할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작은 아빠네 맡길까, 집에선 멀지만 엄마에겐 의지가 되는 막내 이모네 맡길까를 두고 그해 겨울이 될 때까지도 그 속앓이는 계속되었다.
결국 엄마의 마음은 거리가 멀더라도 엄마에게 의지가 되는 이모네 집이 되었고, 어렵게 꺼낸 엄마의 부탁을 이모가 들어주었다.
내가 꿈꾼 혼자만의 독립은 결국 지금까지도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입사를 앞둔 이틀 전, 엄마는 나를 데리고 옷가지만 든 가방을 들고 이모가 사는 고척동으로 가기 위해 시골집을 나섰다.
2시간에 한 번씩 오는 동네 53번 버스를 타고, 360번 시외버스를 타고, 개봉역까지 가는 1호선 지하철을 탔다. 개봉역에서 내려 고척동까지 들어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도착하니 겨울 해는 벌써 떨어져 있었다. 방 두 칸짜리 빌라에 살던 이모네 가족은 늦은 오후에나 도착한 우리 모녀를 오전부터 기다렸다며 반겨주었다.
그날 밤, 이모부는 여자들에게 안방을 내어주었다. 엄마와 나, 이모와 사촌 여동생은 안방에서 엄마와 이모의 끊이지 않는 대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엄마는 어젯밤에도 했던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이모에게 되풀이했다. 이모 역시 걱정 말라는 말을 엄마에게 되풀이했다.
이모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떠나려는 엄마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시골집을 떠나올 때만큼이나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이모부가 엄마에게 나를 꽉 안아주라는 말을 건네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 멋쩍게 웃을 수 있었다. 엄마는 이모에게 나를 데리고 나갔다가 다시 보내겠다는 말을 하고 이모집을 나섰다.
이모를 따라 몇 번 와봤던 기억을 더듬어 엄마가 영등포역과 연결된 백화점으로 나를 데려갔다. 여성복 매장을 한참 돌고 돌아 티브이 광고에서 오연수가 입고 나왔던 브랜드 매장의 반코트를 하나 골랐다.
"옷이 제 주인 만났네"
내가 입은 코트 앞쪽을 매무새 하며 흐뭇한 얼굴이 된 엄마가 말했다.
서울에 나갈 때나 들고 다니는 엄마의 오래된 가방이 백화점 매대 위에 올려졌다. 엄마는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둔 자주색 레자 지갑을 꺼냈다. 어릴 적부터 보던 엄마의 레자 지갑은 그날따라 더 빈티지스러웠다. 만 원짜리 지폐를 세어 점원에게 주는 동안 나는 엄마의 오래된 가방과 자주색 레자 지갑과 엄마의 외투와 계산되고 있는 코트를 바라보았다.
시골집을 떠날 때부터 생각했던 엄마의 할 일은 내 코트를 사주고 나서야 끝난 모양이었다. 엄마의 발걸음이 백화점 입구를 들어설 때보다 가벼워졌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프지 말고 잘 지내."
백화점을 나온 엄마가 거칠거칠한 손을 내 손 위에 얹으며 말했다.
"응. 엄마도 잘 지내."
자꾸만 떨리고 갈라지려는 목소리가 목 밑에서 올라왔다. 더 긴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나는 엄마와 반대 방향의 개찰구를 향해 걸으며 엄마 쪽 개찰구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순간 애써 삼키는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아 무서웠다.
개찰구를 지나 길게 늘어져 있는 지하철 계단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자꾸만 올라오려는 목멤이 쉽게 삼켜지지 않았다. 코끝에 맺힌 콧물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계단을 내려갔다. 맞은편 방향에서 내려오지 않는 나를 찾는 엄마가 보였다. 오래된 가방을 멘 엄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삼켰던 눈물이 더는 참아지지 않았다. 소리 없이 하염없이 눈물은 그렇게 흘러내렸다. 엄마 쪽 방향의 지하철이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잘 있어"
엄마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잘 가"
나도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6살 터울의 여동생과 같은 방을 쓰는 18살 첫째가 몇 년 전부터 꿈꾸는 미래에는 '독립'이 들어있다. 딸이 꿈꾸는 독립이 혹시라도 내가 꿈꿨던 독립과 같은 건 아닐까?
나는 딸에게 '독립'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괜한 미안함과 괜한 서운함으로 하루를 보내게 돼 곤 한다. 그리곤 이내 미안함보단 서운함이 커지는 나를 발견한다.
마흔다섯 살이 된 열아홉의 딸은 이제야 마흔다섯이었던 엄마와 엄마의 마음이 보인다.
"옥수수 다 익었어. 언제 먹으러 올래?"
올해도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