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
둘째가 백일이 채 안 되었던 3월,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첫째 친구 엄마들은 오랜만에 화장을 했고, 구두를 신었다.
바빴던 남편은 첫째의 입학식에도 휴가를 내지 못했다.
유모차에 둘째를 태우고 유모차 안에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커버를 단단히 정비한 채 아기 띠와 기저귀 가방을 유모차 걸이에 걸었다. 운동화에 품 넉넉한 오리털 점퍼를 입고 화장을 했지만 영 멋이 나지 않았다. 한 손은 첫째의 손을 잡고 한 손은 유모차를 밀고 첫째의 입학식에 참석했다.
배정된 교실을 찾아 아이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연신 나를 찾아 뒤를 돌아보았다. 유모차를 교실 안으로 들여보내기가 뭐해 교실 밖에 두고는 교실문 사이에서 둘째의 미동을 살폈다. 나를 찾는 첫째의 눈을 자꾸만 놓쳤다.
교실 안에서 담임선생님과 인사하고 입학식이 열리는 강당으로 이동하라는 이야기에 부랴부랴 유모차 안에서 잠들어 있는 둘째를 아기 띠에 메고 강당을 찾아 4층까지 계단을 올랐다.
내 생애 처음 내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킨 그날의 기억,
10년이 지났음에도 그날의 나와 아이는 여전히 애잔하다.
일찍 감치 말문이 틔었던 첫째는 하루 종일 무언가를 말하거나 만들거나 몸을 움직이는 아이였다. 또래보다 조숙했고 감각적이면서도 영민했다. 결혼하지 않은 미혼의 대학 동기들 눈에도 첫째가 가진 재능이 눈에 들어온 만큼 특별한 면이 있었다.
첫째가 8살이 되기 직전 그토록 원하던 동생이 태어났다. 둘째는 첫째의 각별한 사랑으로 더 많은 사랑을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첫째가 3학년이 되던 해, 셋째가 찾아왔다. 뜻하지 않았던 임신은 당시에 나에겐 너무 큰 혼란이었고 당황스러움이었다. 둘도 버거울 거 같아 하나만 낳아 키우려던 내게 셋째라니.
학교를 갔다 돌아온 첫째가 안방 문을 두드렸다.
"엄마, 고민하지 말고 아기 낳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남편도 분명 똑같은 말을 했지만 첫째의 말만큼의 든든함을 주진 못했다. 바쁜 아빠를 대신해 첫째가 주었던 그때의 그 말은 내가 셋째를 낳기로 결심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토록 주고 싶지 않았던 첫째라는 무게를 나는 그렇게 물려주고 말았다.
젊고 혈기 왕성했던 엄마는 뭐든 주는 것 이상을 해내는 첫째에게 만족의 크기가 달랐다. 잘하면 더 잘하길 원했고, 그 이상을 해낼 수 있음에도 그만큼에서 만족하는 아이에게 아쉬움이 남았다.
아이는 늘 칭찬에 목말랐다. 작은 것에도 칭찬을 바랐다. 가진 재능이 충분함에도 그만큼에서 만족하는 아이가 엄마인 내 눈에는 그저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아이는 자주 반짝였고 그 반짝임으로 엄마인 나는 더 큰 꿈을 꾸었다.
정해진 규칙과 루틴이 편한 1 유형의 엄마는 수시로 반짝이지만 행동이 굼뜨고 자주 공상에 빠지는 4 유형의 딸을 이해하기에 그릇이 크지 못했다. 크면 클수록 나의 시계와 아이의 시계는 서로 다르게 움직였고 이른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우리 모녀의 시계는 완전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첫째의 6학년 봄, 학창 시절에도 겪어본 적 없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아이와 선생님은 단단히 서로에게 대한 빗장을 세우고 있었다. 보통의 아이들이 갖고 있는 생각의 범주 안에서 표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담임선생님의 수많은 질타를 들어야만 했다. 선생님의 시선 안에서 첫째는 부정적이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며 다른 아이들마저도 그렇게 선동하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2시간을 넘게 내 아이에 대한 오해를 풀어내고자 노력했음에도 좀처럼 선생님은 물러섬 없이 아이를 마음에서 밀어냈다.
학교를 나오며 나는 내 아이가 겪어내야 할 앞으로의 시간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는 담임선생님이 말하는 학생의 기준이라는 것에 좀처럼 수긍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내내 상처를 받고 있었다.
평범한 아이들에게 맞춰져 있는 중간의 교육과 규율과 규칙 안에서 내 아이는 모난 돌이었고, 부적응자였다.
그 평범함 중에서도 가장 좁고 엄격한 기준으로 살아왔고 그 기준이 당연히 옳다고 믿어왔던 1 유형의 엄마는 더 넓고 큰 자유와 허용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4 유형의 아이를 품어야 하는 버거운 산을 만나게 되었다.
학교에서의 힘든 시간을 버티며 아이는 좁은 자기 방 안에서 웹툰이라는 친구와 침대라는 휴식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내가 꿈꿨던, 남편이 가졌던 내 아이에 대한 기대들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갔다.
무엇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냥 그 시간 안에 머물러있었다.
지금껏 내가 틀렸다고 믿었던 것들과 좁고 엄격한 나만의 기준들을 나는 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나와 다른 것이 주는 거부감으로 틀렸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그 누구보다 나와 다른 내 아이 대해 나는 알아야만 했다.
아이의 닫힌 방문 앞에서 더 이상 악쓰고 울부짖지 않기 위해 방법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나는 아이에게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말로 전해지지 않는 마음을 글로 적었다. 아침부터 아이를 향해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은 마음이 들 때면 그 분노를 글 안에 담았다. 시작은 분명 분노였는데 끝이 분노로 마무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내가 전하고 싶은 말들만이 그 글 안에 남았다.
학교를 가고 없는 아이의 책상 위에 덮어두면 혹시나 펼쳐보지 않을까 싶어 그날 적은 페이지를 펼쳐 두었다. 어지럽혀진 책상도 말끔히 치워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게, 누가 봐도 티 나게 말이다.
혹시나는 역시나!
다음 날 등교한 딸의 책상 위에는 내가 펼쳐둔 일기 위로 책과 문제집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욕을 입에 담고 책 더미 사이에 끼워져 있는 일기장을 다시 꺼내 들었다.
‘너무하네! 이러면 내가 서운하지!
네가 이래도 내가 생각하는 너에 대한 믿음은 변하지 않을 작정이야!’
독백처럼 나는 아이에게 내 마음을 말 대신 글로 적었다.
초5에 닫히기 시작했던 방문이 중2가 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책상 정리를 하던 어느 날, 문제집 사이에 끼어있던 일기장을 무심히 펼쳐보았다.
“엄마, 요즘은 일기가 뜸하네. 왜 안 써줘! ㅋㅋㅋ”
망할 것!
이 한 줄에 나는 한참을 목이 멨다.
긴 터널 같던 3년의 시간이 지나고 아이는 예전의 요란스러운 웃음을 되찾았다. 그리고 한 번씩 예전처럼 반짝인다.
자신의 꿈을 향해 자기만의 색깔과 속도로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무채색이 보는 원색은 예쁘지만 때때로 버겁고 때때로 어렵다.
친구였다면 나는 너와는 평생 친해질 마음조차 먹지 않았을 거라는 뼈 있는 진담을 농담처럼 건넨다. 그럼에도 친구가 아닌 내 아이로 만날 수 있어서, 내게는 없는 진하고도 확실한 색을 가진 너라서 엄마로 나는 성장할 수 있었다.
다름으로 반복되는 영원한 나의 뫼비우스 띠, 무채색 엄마는 원색의 딸을 향해 오늘도 응원의 마음을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