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쓴 글들은 죄다 공무원 힘들어 죽겠다는 말뿐이었다. 그럼에도 의원면직을 하지 않고 계속 다니는 이유 중 하나는 멋진 동료와 선배들 때문이다.
지방직 공무원이라고 해서 다 고리타분하고 틀에 박힌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배우고 싶은 점이 많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을 공무원 조직도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 사무실로 전화가 한 통이 왔다. 기간제 근로자로 지원한 분께서 자기가 합격했는지 확인하려고 건 전화였다. 내 옆에 J계장님이 받으셨다. 그 뒤에 앉은 담당 주임님이 통화내용을 듣다가 그분은 떨어지셨다고 넌지시 말했다.
계장님은 떨어졌다는 말을 곧바로 전달하지 않으셨다. “잠시만요, 잠시 확인하겠습니다.”라고 하시더니 수화기를 품에 안고 몇 초 기다리셨다. 그리고나서 “이번에는 명단에 없으세요. 죄송합니다.” 라고 대답하셨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연속 동작이었다. 상대가 존중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충분한 텀을 두고 응대하셨다. 공직 생활 중에 받은 가장 멋진 충격이었다. 세상 진지한 척 목소리나 깔 줄 알았지, 진짜 고급스럽고 사려깊은 응대는 이런 거구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잔뜩 화가 난 진상 민원인도 이 계장님 앞에서는 푹 누그러지는 걸 자주 봤다는 사람이 많다. 상대방도 수화기 너머로 만나고 있지만 정중하게 진심으로 자기를 대하고 있다는 게 전해지나보다.
보통 “직장 동료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고 하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K계장님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말해주셨다.
우리가 사무실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냐고, 기왕이면 그 시간동안 같이 즐겁고 의지할 친구 같은 동료가 있으면 얼마나 좋냐고 하셨다.
K계장님과는 곧잘 통화도 하고 카톡도 한다. 나이가 15살 넘게 차이가 나지만 우리 사이에는 통하는 게 있다.(라고 말씀드리면 꺄르르 웃으며 좋아하신다.)
계장님은 나 말고도 친한 직원이 많다. 연령을 불문한다. 자기가 트렌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책도 유튜브도 많이 보고 상대 입장에서 공감하려고 시도하는 유연한 분이시다. 자기가 이렇게 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계신다.
계장님처럼 20년이 넘게 직장 생활을 하고도 직장 동료와 친구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데에는 먼저 깔려야 하는 배경이 있다. 자기에 대한 굳건한 사랑과 뚝심이다. 자기가 중심에 있다보니 타인에게 딱 내어주고 싶은 만큼만 곁을 내어준다.
별명이 ‘물대가리’였다는 K계장님은 머리를 두어 번 휘저으면 안 좋았던 일을 다 잊는 초능력이 있다고 하셨다. 자기가 너무 소중해서 즐겁고 소중한 일만 기억하려고 하신다고. 그게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비결이라고 하셨다.
P 팀장님은 퇴근 후 피아노를 치신다. 보컬도 배우셨고 대학원 졸업도 하셨고 자격증 공부도 하셨다. 인품이 워낙 훌륭하기로 유명한 분이 취미가 이렇게 많다니. 그 인품에 부지런함까지 더해지면 사기캐인데 말이다.
H 팀장님은 캠핑을 즐겨 하신다. 넷플릭스 보는 것도 좋아하고 운동도 즐기신다. 무엇보다 이런 취미를 주제로 젊은 팀원들과 이야기할 때 ‘대화’를 하신다. 꼰대도 아니요 설명충도 아닌, 주고받는 소통이 되는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으로 기능하신다.
반면 회사에 목숨걸고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의 전부인 사람들이 있다. 퇴근 후 보내는 시간은 그냥 막 보내도 되는 남는 시간처럼 쓰고 취미 개발할 생각도 없는 사람들. 더 나아가 부지런하게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을 폄하하기까지 한다. 그런 사람들은 숨 쉴 구멍이 좁고 적어서 그런지 밴댕이가 형님이라고 할 지경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부지런히 찾아서 즐기는 사람들 특유의 여유는 밴댕이 형님의 시샘에도 끄떡없다. 일에 과하게 매몰되지 않고 다른 직원을 잘 포용하기 때문이다. 가만 있어도 호봉 쌓이고 안 잘리는 공무원인데도 부지런히 자기계발을 하는 분들을 보면 그저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이런 사람이 상사라면 부하직원은 실수를 해도 두렵지는 않다. 다음에 더 잘하고 싶어질 뿐.
이번 글의 제목은 김혼비 작가님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라는 책 제목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