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산다. 학교나 직장에서의 나, 집에 있을 때의 나, 친구를 만날 때의 나는 모두 다르다.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자아를 가지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골라 ‘나’라고 할 수 없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정치인들 또한 수많은 페르소나 중 하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18대 대선부터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본격화되었다.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유력 후보군으로 거론된 여야 대표주자인 나경원, 박영선이 예능 프로그램 <아내의 맛>에 출연하면서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다시 논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논란만큼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선거법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 선거방송심의에 관한 특별규정에 따르면 보궐 선거 기준 60일 전부터 방송 및 보도, 토론 방송을 제외한 프로그램 출연이 금지된다. 선거법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정치인들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우기 어렵다. 정치인이라고 해서 정치 토론이 핵심인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만 출연할 필요는 없다. 이미 리얼리티 예능이 방송 트렌드가 된 만큼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인, 전문의 의사, 운동선수들도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들은 높은 화제성을 일으킬만한 인물과 소재에 적극적이며 시청자들 역시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예능 프로의 정치인 출연도 시청자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로 사용될 수 있다.
오히려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다양한 국민과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권위적이고 딱딱한 정치는 대중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며 멀어지게 한다.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친밀감을 형성하는 것은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일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정치적 관심을 갖게 하는 것도 긍정적 효과로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의 예능 출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의 예능화’를 걱정한다. 정치인들은 정책과 공약을 통해 평가받아야 하는데,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단순한 이미지만 강조해 정책과 선거 공약에 대한 논의가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아닌 정치인 개인 이미지로 소비될 우려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흔히 방송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표현한다. 아무리 리얼리티 방송이라고 해도 정교하게 짜여있다. TV가 ‘바보상자’라고 해도 시청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요즘 시청자들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불편한 장면을 보게 되면 가감 없이 시청자 게시판을 포함해 각종 sns, 커뮤니티 사이트에 불만을 표출한다. 그 예로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업무 시간이 아닌 새벽에 비서관과 조깅을 하는 모습, 비서관의 가족 식사에 동참하는 모습들을 보며 ‘꼰대 같다’는 반응이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오르내리며 논란을 빚었다.
정치인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으로 소탈한 엄마, 푸근한 아버지, 청년 멘토 등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긴 했지만, 모든 출연자가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명백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정치인의 예능 출연은 흔한 일이다. 2015년 당시 미국 유력 대선 주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유명 코미디 프로그램 SNL에 출연하기도 했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백악관에서의 일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정치인의 모습과 정치인으로서 정치인은 다르다. 판단은 시청자의 몫이다. 시청자이자 유권자로서 정책, 선거공약, 이념 등을 방송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의 예능 출연이 사전 선거운동이 아니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강제할 수는 없다. 예능 피디는 예능 프로그램에 정치인을 섭외할 때 선거에 개입될 여지가 없는지, 공정성에 문제가 없는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정치인의 예능 출연이 불가피하다면, 정치적 이념을 강요하는 듯한 전개는 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특정 선거 공약과 정책을 선동하거나 과도하게 선량한 이미지의 프레임을 씌우는 자막과 편집을 지양해야 한다. 방송은 사적 도구가 아니다. 시청률과 화제성을 위한 의도적인 섭외, 선거를 앞두고 이미지 개선을 위한 불순한 목적이 아니라면 선거법 규정을 위반하지 않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