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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Apr 15. 2023

문학계의 '빨리 감기': 엑기스만 골라읽기

|| Z세대는 기댈 곳이 필요하다. 개성 있는 존재가 되려면 더 많은 작품을 봐야만 한다. 그들은 이 과정을 '가성비 좋게 해결'하길 원한다. 그래서 "봐야만 하는(읽어야 하는) 중요한 작품을 적어달라”고 한다.


그들은 재미없는 작품 때문에 시간 낭비하는 일을 피하고 싶어 한다. 수많은 졸작을 거친 끝에 자신만의 걸작을 만나는 희열을 알지 못한다. 가급적 힘을 덜 들이고 돌아가는길을 피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빨리 감기로 영상을 시청하는동기와 뿌리를 같이 하는 맥락이다. || p.128


—이나다 도요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콘텐츠를 새롭게 소비하는 최근 경향을 다룬 책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는 작품 선정 실패로 인한 시간낭비를 극도로 회피하는 젊은 세대의 성향과, 그래서 누군가 실패하지 않는 시청목록을 제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본문에서도 언급되듯이 영상 콘텐츠에만 국한 되지 않는다. 소비 세대와 소비 환경의 변화는 출판계도 다를 바 없다. 단지 출판계는 영상계에 비해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변화 정도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뿐이다.


나는 국내 출판계, 그 중에서도 문학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런 경향을 '엑기스'라는 단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엑기스는 '진액(津液)'을 뜻하는 일본어 '에키스'(エキス : 越幾斯)에서 온 외래어이지만 이만큼 뉘앙스를 살릴 대체어가 없어 그대로 사용하려 한다.




책은 너무 많다. 소설만 따져도 엄청난 작품들이 이미 출간돼 있다. 하지만 그 작품을 모두 읽을 시간은 없다. 가뜩이나 전 국민 독서량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고(연간 1인당 독서량 7권), 그 중에 소설이 포함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그럼에도 문학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상태. 그렇다면 실패할 수 없는 핵심만 소비하기를 바라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군가가 이 '엑기스'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출판사들이 이런 일들을 선도하고 있다.



우선 고전으로 치면 '세계문학전집'이 있겠다. 대형 문학 출판사라면 모름지기 세계문학전집 라인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수가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엑기스로서의 역할이 희미해지고 있다. 수많은 고전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팔리는 작품들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데미안』, 『인간실격』, 『오만과 편견』, 『1984』 등등. 엑기스의 엑기스인 셈이다.

그밖에 최근 민음사에서 나온 '에센셜' 시리즈를 보라. 이미 이름에서부터 엑기스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 책은 (출판사가 고른) 각 작가의 대표작을 묶은 선집이다.



한국문학으로 오면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과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이 대표적이다. 비슷한 수상작품집들이 너도나도 자신이 '끝판왕' 엑기스임을 자청한다. '이 한권으로 최신 한국 문학을 섭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 문학상들은 신인 보다는 기성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면에서 그런 역할에 더욱 충실하다. 실패의 확률이 더 적은 것이다.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은 2019년 10주년을 기념해 '수상작가들이 뽑은 베스트 7'을 수록한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0주년 특별판』을 내놓은 바 있다. 그야말로 엑기스 중의 엑기스다.



이는 세일즈적 관점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소비자의 니즈가 있으면 생산자는 그에 맞는 상품을 만들어낸다. 엑기스를 잘 만들어 낼 수록 더 많이 팔린다. 출판사에겐 이만큼 안전한 판매고도 없다.


|| 비즈니스는 더 쉽게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끝없는 탐구 과정이라 할 수 있다. || p. 202


—제임스 클리어 『아주 작은 습관의 힘』



소비자도 지름길을 원하고, 생산자도 지름길을 원한다. 이런 경향이야 어느 산업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출판계, 그 중에서도 문학계가 그렇다는 건 우울한 일이다.



큐레이션으로서의 출판사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있는데, 그 큐레이션 성향이라는 것이 몇 가지 유형으로 단조롭게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앞서 언급한 한국문학의 엑기스는 문단 입맛에 맞는 순문학들 중심이다. 출판사가 고급이라 칭하는 문학이 고급 문학이 되는 것이고, 그런 출판사의 취향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학습된다. 그 말은 그 외의 작품은 '저급'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문학의 세계는 단 한권으로 쪼그라들고, 문학출판사는 스스로의 가치관에 빠져 같은 일을 답습한다. 이익의 문제는 현실이지만, 현실 문제에만 몰입하다간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붕괴시키고 말 것이다.



문학의 세계는 우주처럼 넓다. 하지만 스스로 탐험하는 일을 게을리 하며 출판사가 떠먹여주는 일에 익숙해진다면 넓고도 넓은 문학 세계의 입구에만 머무는 꼴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만 머물고 있는 소위 '문학팬'(혹은 출판사의 팬)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대형출판사의 북클럽에 가입한다. 다달이 배달되는 각 출판사의 (재고 처리된) 도서가 그들 문학 세계의 전체를 이룬다. 그들은 서로 비슷한 취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끼리 더 교류는 늘어나고 취향은 더욱 공고해진다. 출판사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 그런데 여기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놀라움과 우연한 발견이 사람들에게 재미와 이익을 안겨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그다지 멋진 일만은 아니다. 가끔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유익하다.


만약 당신이 추리소설 작가 할런 코벤HarlanCoben을 좋아한다면(우리 두 저자가 그렇다) 협업 필터링의 알고리즘은 당신에게 다른 추리소설 작가를 소개할 것이다(우리는 리 차일드Lee Child의 소설을 추천한다). 그러나 가끔은 조이스 캐럴 오츠 Joyce Carol Dates의 작품이나 더 나아가 헨리 제임스 Henry James의 작품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 p. 184


—리처드 탈러, 캐스 선스타인 『넛지: 파이널 에디션』



자신에게 꼭 맞는 자신만의 작품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그저 몇 작품을 엑기스로만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자신의 가슴에 남는 단 한편의 명작을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독자가 지름길이라 생각했던 그 길이 반대로 길을 잃게만 만드는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큐레이션은 '우연'이다. 그리고 우연을 만들어 내는 건 어느 정도의 용기다. 대형 출판사가 떠먹여주는 걸 과감하게 거부하고 기꺼이 실패의 가능성을 끌어안는다면, 문학의 세계는 더 크고 깊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인 이상, 우리는 모두 그걸 누릴 자격이 있다.


|| 좋은 큐레이션은 나쁜 선택지를 없애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선택지를 도입한다. || p. 194


—리처드 탈러, 캐스 선스타인 『넛지: 파이널 에디션』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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