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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Apr 22. 2019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그’ 소설을 쓸 자격

정말이지 오랜만에 읽는 한국 현대문학이었다.
거기다 ‘젊은’ 작가들이라는 말에 기대가 컸다.
다 읽고 난 지금 느끼는 감정은 혼란스러움이다.
문단은 도대체 현실 세계와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 걸까 싶었다.



1.

특히 대상을 받은 「세실, 주희」라는 작품은 이 작품을 쓴 작가가 여자라는 점도 놀랍고,

이 작품에게 대상을 줬다는 문단의 심사위원들도 놀랍고, 심사평은 더더욱 놀라웠다.

시작은 어떤 페미니즘적인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싶더니,
나중에 가서는 페미니즘 따위 중요한 게 아니라고 훈계질 하고 있는 느낌이다.

여성 서사 자체에 힘을 실어주려는 독자들이나 관객들이 많다.
워낙에 그 숫자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의 수준 여하조차 판단하지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준다.
여성 창작자들이나 여성 서사 자체를 북돋아
더 많은 여성 서사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세실, 주희」는 오히려 나와서는 안 되는 해로운 여성 서사를 보여준다.

소설은 세 명의 각기 다른 환경의 여성들이 나와 그들의 국가적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문화적·국가적 차원의 수직적인 층위에 대한 문제를 말한다.

이렇게만 말하면 상당히 괜찮은 수준의 여성 서사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여성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문화권이 아닌, 상위 문화권이라 여겨지는 타국의 문화권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 타국의 문화권에서의 2등 시민 자리에 만족한다.

그 2등 시민의 자리는 외국인이라는 핸디캡과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중의 핸디캡을 가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등 국민도 되지 않는 자리일 수도 있겠다.

주인공 주희는 세실이라는 일본인 여성의 ‘한심한’ 빠순이 짓을 바라보며,
뉴올리언스의 문화를 쫓아다녔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를 발견한다.

세실은 동방신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고,
주희가 일하는 뷰티숍에서 일본인 손님을 응대한다.
그녀는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에 무지하고 관심도 없는 그냥 ‘빠순이’로 그려진다.

세실을 낮추어 보며 문화적 권력을 쥐고 있던 주희는
결국 자신도 하등 다를 바 없는 한심한 여자아이임을 인정한다.

남자는 주요 등장인물로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이 이야기에서
여성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속물스러움과 모순들은 여성들 스스로의 잘못된 생각 때문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남자 등장인물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여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자각하기만 하면 그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니까.

세상에 이상한 여성은 많다.

속물스럽고, 모순된 여성들도 많다. 동방신기 빠순이인 일본 여자들도 많고,
뉴올리언스 같은 이국에서 이미 그 문화의 일부라고 착각하는 여자들도 많다.

하지만 그 문제들이 온전히 그녀들만의 문제일까?

유독 여성들 사이에서 왜곡된 가치관을 가진 경우(특히나 국가 간의 역사적·문화적 위계 구조에서)가 많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가 깊숙이 개입된 것은 아닐까?

괴물이 된 ‘보편적인’ 여성을 그린다면, 괴물이 된 맥락을 그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사회적인 ‘여혐’을 재생산하는 것밖에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변에 저런 여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래서, 그대로 그 모습을 옮겨놓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그것만으로 소설의 의무는 끝난 것일까?
해로운 여성 서사라는 말은 이런 이유에서다.

젊은 여성 작가가 쓴 여성 서사가 이럴 수 있다는 게 대단히 놀랍다.

여성 작가라기보다는 중년 남성 작가가 젊은 여성들 보라고 써놓은 이야기 같다.
대단히 노골적으로 여자들을 탓하고 있는 느낌.
‘니들이 하는 짓거리가 이렇게 한심하단다.’
더군다나 2018년에 말이다.

한국의 문단이란, 중년 남성 작가들의 마음을 대변해줘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인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뒤떨어진 수준을 보고 있자니 자꾸 그런 의심이 든다.


2.

나는 장르물에 익숙해서 그런지 몰라도 공포 장르에 가까운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과 판타지물의 느낌이 물씬 나는 「그들의 이해관계」를 재밌게 읽었다.

특히 「회랑을 배회하는…」이 보여주는 ‘예술을 비판하는 방식’이,
마지막 작품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와 비교되어 재미있었다.

기존 예술 판을 비웃고, 조롱하는 방식을, 장르적 장치들로 표현하는 것과 다시 순문학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의 차이를 보이는데,
확실히 전자의 경우가 담백하고 모순됨이 없어 보였다.

「자이툰 파스타」는 실컷 기성 예술인을 비웃고 비꼬는데, 그 기성 예술인의 모습이 너무 과장되어 있어서 속 좁은 악의만이 드러난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칭얼거림을 ‘젊음과 다양성의 미덕’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p. 338)
작품에 나오는 말대로 예술이란 ‘기록해 놓을 만한’ 자위일 뿐인가 보다.


3.

「자이툰 파스타」의 경우는 그 밖에도 비슷한 위태로운 지점들을 상당히 약삭빠른 방식으로 돌파해낸다.

이를테면, 초반에는 영락없는 홍상수 영화처럼 진행되다가, 독자들이 그렇게 판단할 즈음에 그런 독자를 오히려 지적한다.

세상천지에 술 먹고 싸우는 얘기는 다 홍상수 아류인 건가요? p. 287

고리타분한 퀴어 영화를 욕하다가 결국엔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된다.

그때의 우리가 느꼈던 감정은 모래바람처럼 한순간에 우리를 휩쓸고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신파는 영화로 족했다. p. 309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쓰다가(뭔가 메시지를 던져야 할 마지막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고 말해버린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p. 318

자신의 단점을 미리 알고 방비책을 마련한다는 점이 약간은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4.

「자이툰 파스타」가 재밌는 지점은 하나 더 있다.

한국 문단의 퀴어 소설 선두에 서 있는 작가답게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내세워 어떤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반복해서 ‘진짜 퀴어’임을 내세우며,
헤테로 남성이 퀴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가짜’로 규정한다.

나는 오감독의 영화를 보고 그가 동성애자가 아님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성애 섹스 전력조차 의심하게 되었다. p. 284

그러는 오감독님이야말로 동성애가 뭔지 알기는 알고 하는 소리예요? 동성애자 한 번 본 적이라도 있어요? p. 288

보통 오감독 캐릭터에게 향하는 지적들인데, 오감독 캐릭터는 지나치게 과장돼 있고 과하게 희화화되어 있다. 그가 만취해서 빈 회접시에 머리를 박을 때, 흑채 가루가 떨어졌어야만 했을까. 여기서도 작가의 개인적인 분노가 느껴진다. 또다시 자위 얘기가 떠오른다.

단순하게 작가가 퀴어라는 사실만으로 (당연하게도) 좋은 퀴어작품이 나오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퀴어가 쓴 것만 진짜 퀴어 문학이고, 이성애자가 쓰면 퀴어 문학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세실, 주희」의 박민정 작가가 여성이기 때문에 훌륭한 여성 서사를 만들어냈다고 우기는 것과도 같다.

독자가 읽고 싶은 것은 저자의 성 정체성이 아니다. 작품 속에 설득될만한 인물이 있고, 그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5.

마지막으로, 「자이툰 파스타」가 지향하는 남성성의 정체는 뭘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게이 남성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군대 이야기, 그중에서도 자이툰 파병 이야기가 내세워져야 하는 이유는 뭘까.

자이툰 파병이라 함은 국내에서 군 복무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국내 군 복무는 그냥 군 복무라면, 자이툰 파병은 실제 전장, 즉 실전이다.
사격장이 아니면 실탄을 만져볼 수도 없는 한국 군대가 아니라 실제로 실탄이 지급되고, 생화학 무기가 터지는 전쟁터인 것이다.

그곳은 모래먼지가 날리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잠을 자야 하는 거칠고 남성적인 배경에,
‘왕샤’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남성미가 넘치는 육체까지.

나는 저자가 자신이 퀴어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한국 남자임도 (의도하진 않았지만)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게이다. 하지만 나는 군대를 다녀왔으며, 지원-선발 되어 국내 군대와는 차원이 다른 실제 전장에서 구른 몸이다.

이것은 마치 남성들의 사회에 최소한의 인정을 요구하는 몸짓으로 읽힌다.
퀴어들에게 남성들의 인정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면에서 저자는 퀴어로서의 인정과 동시에, 한국 남성 사회에서의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왕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퀴어 남성에게 (한국적) 남성성은 죽지 않았다. 은밀히 살아서 숨 쉬고 있다. 혹은 그렇다고 믿고 싶어 한다.

다들 아버지가 납치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아닌 거 같아. 숨어서 어디선가 살아 숨쉬고 있는 거 같아. p. 269


6.

소설마다 평론이 하나씩 붙어 있는데,
평론이랍시고 줄거리 다시 요약하고 있는 인간들은 도대체 뭔가 싶다.
소설을 읽고 난 직후에 다시 그 요약된 줄거리를 읽어야 할 정도로 독자가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분량 때우려는 꼼수인 건가.
어느 쪽이든 문제가 많다. 한국의 문학 평론 수준이 심히 의심되는 지점이었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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