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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Apr 23. 2019

천국의 발명

현재 가능한 천국

잡지 《스켑틱》의 발행인으로 유명한 마이클 셔머의 신작이다.

원제는 ‘Heavens on Earth’인데, ‘지상의 천국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인간이 꿈꾸는 천국을 비롯한 영생, 사후세계에 대한 허위성을 낱낱이 파헤친다.
과연 과학적 회의주의자로 유명한 저자다운 소재 선택이다.

역시나 가장 먼저 격파 당하는 것은 종교적인 사후세계 개념들이고,
그다음으로는 환생이나 임사체험 같은 신비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례들.
종교에 대한 부분은 사실 ‘갈 길이 바쁘니 자세한 건 생략한다’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일신교들(유대교, 개신교, 이슬람교)이 저자가 지적한 허점들에 대해 그렇게 허술한 논리를 가지고 있을 리 없다.
그 종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완벽한 논리체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파고들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평행선만 그리게 될 테니,
회의주의자 입장에서 문제점만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이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단 하나의 증거도 없다는 것.
그것으로 게임 끝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막연하게 사후세계를 상상하는데 익숙하고,
그것에 대해 대충이라도 안다고 여기는 태도들에 대한 정면 비판이다.
안다고? 어떻게?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이어지는 내용은 반대로 과학적으로 영생을 이룩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인데, 의외로 저자는 대부분의 시도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여기서부터 저자의 진가가 드러난다.

과학은 죽음을 아는가? 사후세계를 아는가?
절대로 모른다.
과학적 영생은 가능한가?
적어도 이번 세기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앞서 종교 부분에서도 느낀 거지만,
회의주의는 일종의 겸손함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 태도 때문에 우리는 저자를 더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겪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사건까지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 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냥 즐기면 된다. 그 안에 담긴 감정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 미스터리를 받아들이자.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을 굳이 신이나 초자연적인 힘을 들먹이며 채우려 들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고 자연스러운 설명이 등장할 때까지 그 상태를 내버려 두어도 문제 될 것 없다. 그때가 올 때까지 미스터리를 즐기고 미지의 것에 귀를 기울이자. p. 201-202

앞에서 본 것처럼 중후반까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내용이라고 여겨지는데,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부분들이 흥미롭다.

사후세계를 꿈꾸게 만드는 심리적 오류들을 짚어내더니만, 역사적·정치적으로 지상의 유토피아를 만들려던 과거 시도들과 그 결과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게 됐음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의외로 이 부분이 가장 공들인 느낌이고, 앞선 이야기 모두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서문에 불과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고비노에서 바그너, 바그너에서 니체, 니체에서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히틀러까지.
결국 그 유토피아의 역사 끝에 트럼프와 대안 우파라는 집단이 있다.


저자는 과거의 그 어리석음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인류가,
다시 한 번 오류를 반복할 위기에 처했음을 근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이 모든 회의주의 여정을 통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탐욕이다.
죽을 운명의 존재로서의 불안감, 그것을 극복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들,
그 모든 것들은 천국을 약속하면서 사실은 지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마지막에 이르러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사실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이다.
‘유전자의 생존’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영생이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유전자는 지구를 벗어나고,
태양계를 벗어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그 수준에 다다른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유전자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까지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SF에서 많이 보던 결론이다.


그럼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차피 후손을 위해 죽을 운명이라면
우리는 최대한 우리 자신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생존 조건을 넘어선 그 무언가다.

여기서 그 무언가를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것들이 의외로 상당히 종교적인 것들이다.

사랑과 가정, 삶의 의미, 초월과 영성, 그리고 사랑.

이것은 마치 이전의 종교가 선사했던 것,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선사하지 못하는 것,
한때는 과학이 종교를 대신해 선사해줄 거라 기대했던 것을 요약한 것 같다.
오늘날의 종교가 얼마나 그 본래의 기능을 잃고 있는지,
오늘날의 과학이 얼마나 기대치에 못 미치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저자는 절대로 인간의 영생이나 몇 백, 몇 천 년의 수명연장을 꿈꾸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건 그저 소박한, 하지만 실질적인 수준이다.

“당신은 200세, 500세, 1000세까지 살고 싶지 않나요?”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그럼 좋지요. 하지만 내 여생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그런 고상한 목표 대신 그냥 암에 안 걸리고 90세까지 살고, 알츠하이머병 없이 100세까지 살고, 노망나지 않고 110세까지 살고, 의식도 없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는 일 없이 120세까지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200세, 500세, 1000세가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하기 전에 이런 문제나 먼저 해결하자. p. 381-382

회의주의자 다운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일단 이 책은 포만감이 대단하다.
그 포만감은 분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소재에 대한 완벽한(혹은 그렇다고 느껴지는) 소화 능력에서 온다.
사후세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부분을 다루고 결론을 내린다.
그 정도의 스펙트럼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그 모든 집대성이 담긴 한 권의 책을,
편하게 앉아 읽고 있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었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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