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적인 판타지로의 도피
어린 시절 봤던 동화책을 떠올린다.
줄거리 없이 상황만 나열된 그림책.
글도 물론 있지만 상당히 부실하다.
글에 맞는 그림을 그린 거라기 보다는
그림에 맞는 글을 적당히 붙인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좀 억지스러울 때도 있다
본문 마다 느닷없는 영문 번역이 딸려있는데
이건 분위기 조성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명작동화 같은 낭만적 분위기를 위한 장치가 아닐까.
이 모든 게 작가의 그림을 살리기 위한 장치들이다
어찌보면 글은 그림을 책으로 엮기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 같기도 하다. 그림의 분위기에 푹 빠지기 위해서 약간의 글과 영문본이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이 실로 명작동화집을 떠올리는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공주풍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수입된 공주풍 이야기들이 의례히 그렇듯이, 어딘지 모르게 국적과 시대를 알 수 없는 스타일이다.
숲소녀 캐릭터는 동양인 같기도 하고 서양인 같기도 하다(눈동자가 파란색).
아이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하다.
숲은 외국 같은데 산은 우리나라 같다.
과거의 어느 순간 같다가도 현재 같기도 하다.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판타지의 공간 아닐까.
엄지공주, 헨젤과 그레텔 같은 동화나 소공녀, 빨간머리앤, 작은아씨들 같은 작품을 보고 자란 성인들이 다시 그 시절의 분위기에 푹 빠지고 싶을 때 읽는 책으로 보인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하드커버로 엮어낸 그림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보는 기분이었다.
알량한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