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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Jun 17. 2019

너의 이야기

최고 경지에 오른 패스트푸드


다음은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중 한 대목이다.

사회학자 아사노 도모히코(淺野智彦, 46세, 미야기 현)는 젊은이들 사이에 ‘거리감에 대한 갈망’이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사노 도모히코가 이런 주장의 예로 든 것은 ‘만남을 원하는 사람들(會いたい系)’로 불리는 일종의 ‘붐’이다. ‘만남을 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다.’라는 생각을 노래로 풀어낸 일련의 제이팝(J-POP)을 총칭하는 언어다.
(…)
아사노 도모히코는 이처럼 니시노 카나의 노래가 수많은 젊은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데는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다.’라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휴대 전화만 있으면 연인이든 친구든 언제 어디서나 연락을 취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라는 애틋한 상황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p. 220-221


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2006년 작 〈너의 이름은.〉이 이런 감각을 정확히 짚어준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미아키 스가루의 『너의 이야기』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그리워하는 단계다.
사람들 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특히나 젊은이들 간의 인간관계가 점점 사라지는 시대상은 가속화되어(이른바 ‘무연사회’), 급기야는 존재하지도 않은 인간관계를 꿈꾸고 있는 게 아닐까.

저자인 미아키 스가루 본인도 그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고,
그것을 우려하면서 작품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계속 맞대야 하는 일이
나와는 맞지 않다는 걸 깨닫고,
그로부터 한동안은 대학 생협이 소개해주는
일용직으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 일도 매일 처음 대면하는 인간들과
처음부터 관계를 쌓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영 불편했다. 이른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하면
대인관계를 구축하는 능력과 유지하는 능력으로
나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둘 다 갖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p. 74


『너의 이야기』는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이라는 전형적인 장르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다.

별 볼 일 없는 남자 앞에 어느 날 하늘에서 여자가 뚝 떨어지듯 나타난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가 항상 꿈꾸던 이상형과 같은 존재다.

일본 서브컬처에서 빈번하게 소비되는 이 구조 때문에 이 소설에 대한 첫인상은 뻔하디뻔한 남성향 판타지였다. 시치미 뚝 떼고 남성 독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그리고 적당히 성적인 판타지까지 충족시켜주는.) 고전적으로는 〈오! 나의 여신님〉 같은 작품이 떠오르는 상황 설정.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그게 맞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전혀 뻔하지가 않다. ‘보이 미츠 걸’ 이야기라는 한계에서 시작해, 그 한계를 깨고 장르 자체에 대한 성찰을 보이다가, 다시 ‘보이 미츠 걸’이라는 이야기로 돌아오는데, 이 마지막 결론의 보이 미츠 걸은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놀랍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감탄하고 말았다.

뻔하게 시작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예상을 뒤엎는 전개를 보인다.
중반부까지 대부분의 분량이 남자 앞에 나타난 여자의 정체를 밝히는 미스터리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뻔한 선택을 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집요함이 대단하다.
언제나 이야기의 전개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이러다가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물론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

다음으로는 ‘의억’이라는 SF 장치를 최대한 활용한 점에 감탄하게 됐다.
가짜 기억(의억)을 머리에 심는다. 그리고 특정 기억을 지우기도 한다.
이 어찌 보면 익숙한 아이디어를 최대한 밀고 나가 가능한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이야기 속에 녹여 냈다. 소재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아마 비슷한 아이디어로 SF 로맨스 물을 만든다면, 이 작품과 전혀 겹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기란 엄청나게 힘들 것이다.

작가의 치열하고 깊은 고민은 ‘보이 미츠 걸’ 장르에 대한 성찰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는 전형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별 볼 일 없는 남자 주인공. 그 앞에 갑자기 나타난 완벽한 여자.
그녀는 주인공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보인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기서 끊임없이 의심을 한다.
그리고 절대로 이 판타지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나중에는 보이 미츠 걸의 남자 주인공이 스스로 반성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의문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건성에 가까운 정도의 조사를 하고 난 뒤
수수께끼를 수수께끼인 채로 방치했다. 왜?
그녀에게 속는 것도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꿈에서 깨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결코 상처받을 일 없는 안전한 구역에서 시치미를 떼고 도카의 애정만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p. 322


이것은 장르 자체를 부정하는 반성이다.
자연스럽게 이 보이 미츠 걸 이야기는 삐걱대게 되고, 균열의 틈을 내보인다.
그 틈을 통해 우리는 판타지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판타지가 판타지인 것을 드러내며 판타지임을 포기하는 것 같던 이야기는
결국 더 큰 판타지인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서 주인공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랑에 빠질 수 없는 젊은이들의 초상이다.
이런 행복은 내게 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
사람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준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이야기다.
나에게는 이성에게서 그런 마음을 끌어낼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
만약 나에게 그런 헌신적인 사람이 존재한다면 나를 등쳐먹으려는 사기꾼이 분명하다.
나는 그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마가이 치히로는 내가 연출한 ‘나쓰나기 도카’를 사랑했다. 그 점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감정을 인정하는 걸 완고히 거부했다.
아니면 그 감정은 인정하더라도 잠깐의 변덕 같은 걸로 치부하려 했다.
그에게 희망이란 실망의 맹아일 수밖에 없었으며,
정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희망 같은 건 철저히 배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믿고 안 믿고는 그 이전의 문제로,
그는 행복 그 자체를 의심했다.
병에 걸리기 전의 내가 쓸쓸함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그는 행복한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이다. p. 306-307

아무래도 도카는 내게 속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친밀해지는 걸 두려워하는 듯했다. p. 333

사랑을 무서워하고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작가는 작품 전체를 통해서 강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재밌게도 ‘기꺼이 속아주는 것’이다.
위험부담을 모두 안고, 기꺼이 상대방에게 나 자신을 내던지는 것만이 사랑을 나누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상대방이 사기꾼일 수도 있다. 또 때로는 이별을 겪으며 나락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정도의 리스크조차 지지 않고는 어떤 관계도 성립될 수 없다.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시도할 정도로 행복을 주는 것이다.

나는 도카에게 속았어야 했다.
연애 사기에 걸려서 고가의 그림을 강매당했는데도
이케다라는 동급생의 실재를 계속 믿었다는
오카노라는 남자처럼,
모든 것을 내 구미에 맞춰서 해석했어야 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행복하게 춤추면 됐던 것이다. p. 321

만약 두 주인공이 진작 그걸 알았다면 이 모든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는 남자 주인공 치히로와 여자 주인공 도카 모두가 사랑과 인간관계에 미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들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무 늦게 만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 문제였다. 거기서 오늘날 젊은이들(특히 일본)의 일면을 보게 된다.

바보. 그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택하지 않더라도,
그저 ‘이력서’를 내게 건네며 ‘우리 두 사람은 운명이에요.’라고 말하기만 했다면 그걸로 끝날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그녀의 ‘이력서’를 볼 수 있었다면
나는 무조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거짓 기억 같은 게 중간에 끼지 않았어도
처음부터 우리는 궁극의 두 사람이었을 텐데.
그녀가 최후의 순간까지 허구의 힘밖에 믿지 않았다는 게 나는 슬펐다.
비눗방울과 같은 연약한 행복을 좇는 데 몰두한 나머지 눈앞의 확실한 행복을 놓치고 만 어리석음이 가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받는 게 너무도 두려워
그녀가 보낸 구원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p. 320


작가의 안타까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보이 미츠 걸의 의미가 다시 확장된다.

‘허구의 힘만으로 진정한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보이 미츠 걸 같은 서브컬처의 픽션에서만 이성 관계를 배우고, 그것에 열광하며 제대로 된 실제 관계는 소홀히 하는 젊은이들에게 작가가 직접 건네는 말이다.
가상의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실제로 걸(Girl)을 만나라.
가상은 가상일 뿐 제대로 된 충족감을 선사하지는 못한다.

공상 따위로 충족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안의 나는 지금까지도 계속 울고 있었다. p. 262-263


장르의 밖으로 빠져나와 장르에 빠져있는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장르에 대한 성찰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장르를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까지 드러낸다. 한 단계 더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의억’을 만들어내고 있는 ‘의억기공사’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에 대해 말한다.
의억기공사는 마치 작가가 ‘등단’하듯이 이야기를 지어 뽑히게 된다.
현실 세계의 작가들처럼 누군가는 대충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만들고,
누군가는 심혈을 기울여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대충 일을 하게 되면 일거리가 끊기기도 한다.

의억기공사와 그들의 작업을 묘사하는 모든 부분에서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열여섯에 의억기공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현재에도 열여섯 살인 의억기공사는 열여섯 살인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드물다. p. 235

나 자신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공상을 계속해온 나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작업을 숨 쉬듯 아니, 그보다 훨씬 용이하게행했다.
나는 모든 것이 결락된 인간이었기에
수많은 결핍에 대응할 수 있었다.
일종의 소망 충족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데
결락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질이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나는 어떤 것도 동경할 수 있었다. p. 237-238


저자는 서브컬처에서 인기를 얻으며 ‘보이 미츠 걸’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자신을 높이 평가하진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의 작업에 긍지를 보인다.

그래서 우리도 예술적인 야심 따위는 접고
오로지 마음 편안한 에피소드를 엮어나가는 데 집중한다.
그런 이유로 이야기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 사이에서 의억기공사는 패스트푸드점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차역에서 서서 먹는 가락국수도 회전초밥도 좋아한다. 없어지면 쓸쓸하다. p. 250

패스트푸드 요리사에게도
패스트푸드 요리사 나름의 긍지가 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내 일에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p. 296


이 작품으로 온라인 출신 작가로는 처음으로 일본 주요 문학상 최종 후보까지 올랐다고 알고 있는데, 아마도 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저자가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는 이미 훌륭한 패스트푸드 요리사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패스트푸드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낸 요리사.


그는 거기에 더해 자신이 하는 일에 일종의 사명감을 부여한다.
그는 독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보이 미츠 걸이라는 패스트푸드로 진정성 있는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내가 당신을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하는 이유는,
내 동료를 늘리기 위해서도,
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운명의 상대가 있다는 것
-그것을 하나의 진리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진리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믿게 되기를 기도한다. p. 369-370


재밌는 점은 작가 본인은 정작-마치 작품 속 두 주인공들처럼-현실이 아니라 픽션(보이 미츠 걸 이야기)으로 사랑을 경험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치히로와 도카 두 명의 인물은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동료들은 다들 신기해한다.
왜냐하면 나는 지난 10년간 연애다운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경험하지도 않은 행복을
그리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느냐고 묻는 이도 있다.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아마 그 대답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의무도 없기에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p. 367

“마지막으로 하나 묻고 싶습니다만.” 기자가 말했다.
“아마가이 씨에게 의억기공사란 직업을
한마디로 정리해본다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거짓말을 만드는 일입니다.”
나는 그 사실을 도카에게서 배웠다. p. 368


그렇다. 작가는 이것을 ‘도카(픽션 속 히로인)’에게서 배웠다.
그는 이 장르를 파고 또 파다가 결국 이 장르로 사랑과 인생을 터득한 장인이다.

어떤 장르의 작가든 이 수준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자기가 평생을 바쳐 쓰고 있는 장르의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다가 그것의 밖으로 나와 그것을 바라보다가, 약 올리고, 비난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 애정을 드러내는 정도의 수준. 겉과 속을 완전히 뒤집어 까서 모든 것을 탈탈 털어내는 수준. 이것이 진정한 고수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작가의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픽션(보이 미츠 걸, 혹은 걸 미츠 보이)만 보지 말고 현실에서 ‘걸’(혹은 ‘보이’)을 만나라,
픽션은 제대로 된 충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주장 말이다.
저자 본인은 픽션에서 사랑을 배워놓고, 독자들에게는 픽션을 떠나라고 한다?


이 부분이 이 소설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픽션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현실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아니,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해도 될지 모른다.
그건 동일한 제품에다 브랜드 로고나 보증서가
붙어 있느냐 아니냐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는 등가인 것이다. p. 366-367


여기까지 오면 이 말이 모순되게 들리지가 않는다.
작가가 장르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장르에서 가장 멀리 있는 현실까지 언급하는 동안,
우리는 그것 모두가 진짜라는 걸 알게 된다. 픽션에서 현실을 논하고, 현실에서 픽션을 느낀다.

특히 사랑에서는 그것이 더더욱 진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은 허구이고 속는 줄 알면서도 서로 기꺼이 속아주는 사기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사랑이 그렇다면, 허구의 사랑이 현실의 사랑과 다를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작가는 현실과 판타지를 뒤섞어 버린다.

치히로와 도카는 이야기 속 캐릭터이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다.
작가는 픽션에서 벗어나라고 독자에게 픽션으로 말을 건다.
작가는 보이 미츠 걸 이야기로 사랑을 배우고, 독자에게는 현실에서 경험하라고 말한다.
작품 속 치히로는 의억기공사가 되어 의억 속에 저자가 의도한 것과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작가는 작품 밖에 있지만 작품 안에 있기도 하고,
캐릭터가 작가 본인이기도 한 동시에 작가가 캐릭터이기도 하다.

신작 발표 후 아사히신문사 웹매거진 《좋은 책 좋은 날(好書好日)》과 가진 인터뷰에서 작가는
“독자분들에게 제가 앓고 있는 병을 옮기고 싶어요.
《너의 이야기》를 통해 진짜 기억과 가짜 기억,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려지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_출판사 책 소개 중


책의 띠지에 적혀 있던 ‘마법사’라는 일본 독자의 지적은 그래서 정확하다.
(‘미아키 스가루가 소설가라뇨? 말도 안 됩니다. 그는 마법사예요!’)
단순한 보이 미츠 걸 이야기는 마법사의 손을 거쳐 현실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걸 동원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장기인 ‘보이 미츠 걸’ 이야기의 모든 클리셰와, 그것에 대한 재해석과 반성, 그리고 그것을 쓰게 된 자신의 계기와 거기서 얻은 작가 본인의 성찰, 더 나아가 자신이 하는 작업의 의의까지.

조심스레 그의 보이 미츠 걸 이야기는 이 작품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예측해 볼 수 있겠다.
이 이상을 쓰라고 하는 건 작가에게 지나친 요구다.

의심할 여지없는 걸작이었다.
설령 다른 사람들처럼 남은 인생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세월 동안 이 이상의 의억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평생 단 한 번 허락되는 기적을, 나는 여기에 썼다.
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내게 재능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또한 여기에 다 쏟아부었다.
일을 계속하겠다는 의욕이 이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p. 295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는 다시 보이 미츠 걸의 전형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다.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는 여자를 통해 한 단계 성장한다.
심지어 여자 주인공은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 남자의 성장을 위해 희생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두 주인공을 공평하게 다루려고 했던 작가의 의도가 빛이 바래는 면도 있다.
하지만 그런 한계마저 보이 미츠 걸의 모든 걸 패러디 해버리는 작업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그의 작업에 압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30살밖에 안 된 작가가 자기 장르를 완전히 해체했다가 다시 쌓아올리는 굉장한 일을 해냈다. 과연 그의 다음 작품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하며 들었던 나의 걱정이 기우였듯이,
이런 내 걱정을 비웃으며 아마도 더 놀라운 작품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책 한 권으로 그런 신뢰감을 준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의 팬이 되었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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