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량한 Jan 08. 2021

〈1917〉: 원테이크로 찍은 게임(?)

전쟁영화의 몰입과 거리두기

주인공을 계속 따라가는 롱테이크(처럼 보이는) 방식은 자연스럽게 사건이 벌어지는 스테이지가 계속 바뀌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바로 이 스테이지가 바뀌는 이음매에서 기묘한 느낌이 드는데, 이미 지나가버린 스테이지는 마치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그렇다.

주인공이 수송차를 얻어타고 부서진 다리 앞에 다다르자, 그 뒤의 수송차 대열은 마치 사라진 것처럼 아무런 기척도 없다. 그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마치 다른 무대로 옮겨진 듯 갑자기 나타난다. 그렇게 많은 수의 무리가 말이다. 폭포에서 떨어진 후에도 시야에서 사라진 폭포는 존재감 자체가 사라진다. 폭포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이다.
병사들이 모여앉아 노래를 듣는 장면도 그렇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병사들은 그런 이벤트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일사불란하게 일어나 자리를 뜬다. 바로 옆에선 포화가 터지는 또 다른 스테이지가 펼쳐진다.

나는 이런 점이 게임 같다고 느껴졌다. 단순한 예로 슈퍼마리오 같은 횡스크롤 게임을 보면 이미 지나친 길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마치 화면에서 밀려난 공간은 사라지는 것처럼. (게임은 하나의 테이크로 찍힌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그렇게 보이듯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가 아닐까. 왜 게임을 하는가에 대한 동기. 그래서 때때로 게임은 스토리를 가진다. 게임이 엄청난 시간 낭비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뛰어들기 위한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처음에는 동기를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를 끌어들인 친구를 원망한다. 하지만 스테이지를 옮겨갈수록 그는 절박한 동기를 갖게 된다.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동기.

다시 감독이 롱테이크라는 기법을 사용한 점을 생각해 본다면, (1차 대전과 관련도 동기도 전혀 없는)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이끌어 와 주인공과 같은 경험을 시키면서 주인공과 같은 동기를 얻기를 바란 게 아닌가 싶다.
거기에 게임성이 첨가된 이유는 아무래도 관객 중에서도 젊은 관객들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게임에 익숙한 젊은 관객을 두 시간 동안 붙들고 있기 위해서는 새로운 스토리텔링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을 멈추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게임은 없을 것이다. 종반부의 하이라이트인 진격 장면에서, 주인공은 병사들이 모두 적진을 향해 뛰어가는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옆으로 달린다. 그 모습은 마치 전쟁 게임 속을 뛰어다니는 엉뚱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일종의 버그?) 이 영화는 오히려 게임을 멈추려는 괴상한 미션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원테이크라는 것은 현실감과 생동감을 부여하는 기법일진대, 게임성이 드러나면 그것이 다시 상쇄된다. 현실감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전쟁을 체험시킬 임무를 가져가면서도,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게 아닐까 싶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 숱한 전쟁영화들은 리얼함을 강조하며 전쟁의 참상을 스펙터클의 일부로 소비하는 우를 범해 오지 않았나. 관객은 마치 1인칭 게임을 즐기듯 전쟁영화를 보며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샘 멘데스 감독은 몰입과 거리 두기를 반복하며 관객이 전쟁을 더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를 바란 건 아닐까.

게임성의 익숙함을 빌려와 새로운 세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경험을 시킨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기법으로 뒤처지지 않으려는 감독의 고민이 느껴진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

작가의 이전글 《오늘의 SF》와 《계간 미스터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