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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Jan 18. 2021

〈버닝〉: 막동이에서 종수로

이창동의 새로운 시작


데뷔작이었던 〈초록물고기〉의 새로운 변주. 그런 면에서 이창동이 꾀한 새로운 시작. 〈초록물고기〉의 일산은 〈버닝〉의 파주와 겹쳐진다. 사정은 더 나빠졌다. 일산은 재개발이라도 했는데, 파주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땅이다. (그곳은 북한 땅과 맞닿아서 대남 방송이 들린다)

〈초록물고기〉가 ‘보스의 여자를 사랑한 신참(애송이)이, 보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라면,
〈버닝〉은 ‘신참의 여자를 빼앗은 보스가, 신참에게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공통점이라면, 여자를 피해자로 그리지만 여자가 이야기의 주체는 되지 못하고 대상으로만 남는다는 점. 여자는 신참이 빼앗긴 가장 소중한 것 정도다. 여자는 그저 태워버릴 수 있는 ‘폐비닐하우스’일 뿐. 종수는 비닐하우스가 탈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러면서도 비닐하우스가 불타는 이미지에 매혹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시대착오적이다.



공허함에 시달리고, 카드 값에 쫓기는 여주인공 해미는 없는 것을 있는 듯하게 만드는 신기루 같은 존재다. (카드값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돈을 존재하는 듯이 끌어 쓰는 것이다) 그래서 신비하게 그려진다. (노을을 배경으로 춤추는 장면이 그 신비화의 절정) 그러다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벤에 의하면 ‘연기처럼’)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욕망 자체가 너무 모호하다. 그녀는 유아인의 바닥 생활부터 스티븐 연의 상류사회까지, 혹은 아프리카 관광부터 한국의 내레이터 모델까지 스스럼없이 스며들 수 있는 편견 없고 순수한 존재다.



〈초록물고기〉에 비해 ‘보스’는 더 비열하고 교묘해졌다. 〈초록물고기〉의 배태곤(문성근)은 대놓고 깡패 두목이었지만, 벤(스티븐 연)은 겉으로는 전혀 나쁜 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스가 아닌 척하는 보스다. 꼬박꼬박 존댓말 하고 미소로 정중하게 대한다. 그래서 더 재수 없어 보인다. 이창동 영화는 언제나 계급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의식하면, 자본가나 자본주의 자체가 그렇게 친근한 모습을 하고 우리 삶에 침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해미는 그 자본주의와 자연스레 하나가 될 수 있는 순수한 사람이다. 결국 그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아니, 그건 알 수 없다. 자본주의는 교묘하게 그 살인을 감춰버리니까.

여자들은 그렇게 돈에 좌우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돈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종수의 엄마, 카드값 갚기 전에는 집에 올 생각하지 말라는 해미의 언니... 남자들은 다르다. 벤은 물론이고, 종수도 노동 없이 돈에서 자유로운 것 같다.



스티븐 연이라는 배우가 한국적 맥락에 있게 되면 미국에서의 위치와 정반대가 되어, 재수 없는 최상위층이 된다는 지점이 재밌다. 관찰 예능에서 테슬라를 뽐내던 유아인이 영화 속에서 트럭을 몰며 또 다른 맥락 위에 서는 점도 비슷하다.


보스에게 죽임을 당하던 막동이(한석규)가, 이번에는 복수를 감행한다. 하지만 여전히 뒷맛이 찝찝하다.

만약 복수극 같은 엔딩이 종수의 착각에 의한 것이라면, 그 엔딩은 종수의 자위 같은 게 돼 버린다. 한 어리숙한 청년이 수수께끼 같은 세상을 유치한 방식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 종수는 막동이가 그랬던 것처럼, 보스가 원하지도 않은 짓을 저지른 신참인 게 아닐까. 상대의 내막도 모르면서 그저 그게 옳다고 굳게 믿고 순진하게 일을 벌인 애송이. 그런 점이 참 슬프다. 우리 힘으로는 진실을 분명히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지금 내가 이해한 이 글도 한낱 음모론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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