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블록버스터 영화는 누구에게 감정이입 하는가
굉장히 재밌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본 것이 무엇이었나를 계속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본 것은 그저 유쾌하게 즐길만한, 무해한 요소로 가득 찬 이야기였던가.
조성희 감독 영화의 독특한 매력을 좋아하고, 특히 그의 영화에 나오는 어린이들의 자연스러우면서도 귀여운 모습을 좋아한다(〈늑대소년〉과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물론 아무리 자연스럽다고 해도, 그것은 현실의 아이와는 거리가 먼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캐릭터일 뿐이다. 실제 아이는 스토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사랑스러운 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나 동물의 귀여움을 동영상으로 즐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조성희 감독의 어린이 캐릭터는 한국 영화 안에서도 최소한 거부감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다는 신뢰가 있었다(나홍진의 〈곡성〉 같은 것에 비한다면야…).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 어린이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승리호〉의 태호(송중기)는 자기 스스로 아빠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이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아빠가 된 사람이 아니다. (대안적인 가족상을 제시하는 영화답다)
짝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아기가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졌고, 그는 아빠가 되었다.
물론 그 아기를 거부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선한 마음으로 아기를 받아들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기가 그의 숨겨진 본성을 일깨운 것에 가깝다. 그는 타고난 딸바보였다. 업동이의 입을 통해, 아기를 처음 본 그의 눈에 아기가 ‘천사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게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아빠가 되는 이 과정과 동기들은 인정과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언뜻 보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약간 억지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태호를 아빠로 만들기 위해 구차한 설정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 같았다. 엄마 없이 아빠가 되기 위해, 아빠와 딸만 남기 위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준 느낌이 강하다.
그 자신이 아빠가 되기를 받아들인 것은 분명 좋은 마음에 의한 것이다. 규정을 어기고 아기를 살렸다는 설정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뒤이어지는 지나치게 본격적인 육아는 몰래 아이를 키운다는 설정을 무색하게 만든다. 육아용품을 모두 구비하고 아이에게 젖병을 물린다든지.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외출할 때는 가사로봇에게 육아를 신신당부한다. 오픈된 잔디밭에서 실로폰을 치며 노래를 불러준다. 거의 삼성 가전 광고를 방불케 하는 때깔이다. 이런 장면에 이르면, 오히려 태호는 육아라는 낭만적인 행위에 푹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기를 염원해 오던 사람처럼 보이고, 아기가 편의적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제 아이를 잃은 태호 앞에 또다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꽃님이(박예린)를 생각해 보자.
꽃님이는 처음에 대량살상 무기(폭탄)로 소개된다.
아이처럼 보이는 기계, 로봇 정도로 치부되다가, 오해가 빠르게 해소되고 아이로 돌아온다.
영화는 꽃님이의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아빠를 잃은 아이답지 않게 언제나 태평하고, 심지어 자신을 싫어하는 태호에게까지 스스럼없이 대한다. 한 번도 아빠가 보고 싶다고 칭얼대거나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다. 심지어 이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아이는 친아빠가 언제 존재했었냐는 듯이 새로운 가정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있다. 꽃님이의 아빠(김무열)는 비중이 거의 없다. 적절한 때에 나타났다가 빠르게 죽어서 사라진다. 그러고 보면 태호의 죽은 딸 순이(오지율)의 생모도 존재감이 전혀 없다. 이 정도면 이 모든 게 대안적인 가족을 위한 설정이라기보다는 태호라는 남자의 육아 판타지를 위한 설정이 아닌가 싶어진다.
관객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고, 영화는 그 감정이입을 예상하고 스토리의 감정선을 만든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전제로 한 관객이라는 건 누구일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면 아마도 아이를 가져보지 않은 젊은 남성이 아닐까 싶다. 아직 육아 경험이 없는, 그러면서도 아이(그중에서도 딸)를 향해 판타지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젊은 남성들. 그들은 아마도 아이의 귀여움을 SNS나 TV 예능 영상으로만 접했을 것이고, 실제 아이가 사랑스러운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직 피부로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몇 년 전 봤던 〈부산행〉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아빠, 석우(공유)는 좀비 떼를 피해 도망치는 과정을 통해 소원해진 딸의 사랑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게 〈부산행〉이라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딸에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 장렬히 희생하는 아빠.
〈부산행〉이 아이 가진 아빠들을 위한 영화였다면, 〈승리호〉는 아이를 가져본 적 없는 남자들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봤을 때, 〈부산행〉에서 좀비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승리호〉에서 우주 SF라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부 남성 관객의 감정이입과 카타르시스다.
관객들은 이 영화가 지나친 신파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그 신파라는 것마저 굉장히 평면적이고, 어찌 보면 이기적이기까지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N포 세대의 남자들에게 출산과 육아는 판타지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부산행 때도 그랬지만 그 일부 남성들만을 위해 수백억 단위 예산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유감일 뿐이다. 아직까지 영화계는 남성들을 주 관객으로 상정하고 그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를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을 위한 영화는 주로 독립영화나 저예산의 상업영화로만 나온다.) 아마도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핵심 인력에 남자들이 많은 결과가 아닐까 싶다. 여성 인력이 더 많이 중요한 결정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다.
생각해 보면 〈승리호〉 속 여성이 왜 육아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 스치듯 한번 비치는 순이의 생모, 꽃님이의 엄마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에필로그의 장선장(김태리)은 여러 아빠 중 한 명으로 보일 뿐이다. (장준환 감독의 〈화이〉 속 아빠들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그 부분이 가장 큰 판타지인지도 모르겠다. 여성 배우자 없이 젊은 남성이 완벽하게 육아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육아에 여성은 필요가 없다는 생각. 현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면에서 진정한 판타지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성희 감독 영화 속 어린이들이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해도, 현실의 아이에 비하면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캐릭터일 뿐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