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 2024, 셀린 송
본 리뷰는 영화 『 패스트 라이브즈 』의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감상 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한다. 멀리서 보면 세상 흔하디 흔한 남녀의 만남과 이별일 뿐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어느 날 훌쩍 떠나가는 사람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덩그러니 남겨지는 사람이다.
너와 이별했다는 느낌보다
너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기분이었어
그 공허함은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나를 외롭게 만들었어
누구나 살아가면서 몇 번의 사랑과 그만큼의 이별을 하며 살아간다. 나는 떠나가는 사람이었던가 아니면 남겨지는 사람이었던가. 이별을 맞이한 연인은 두 사람 모두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프고 아프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마음과 사랑의 무게가 비슷하거나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수면에서는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크나 큰 심연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깨닫는다. 그런 이유로 해성과 나영의 상실에 대한 슬픔과 외로움은 묘하게 닮은 듯 다르다. 12살에 헤어져서 12년이 지나 24살이 되어 연락이 닿은 두 사람. 두 사람의 사랑은 깊고 크지만 서울과 뉴욕이라는 물리적 거리와 12시간의 시차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자꾸 어긋나기만 한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얼굴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연인의 실체에 닿을 수 없다는 번뇌와 고통으로 나영은 현실의 삶과 꿈을 선택한다. 나영은 12년 전 훌쩍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던 것처럼 다시 한번 해성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해성은 또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진다.
너는 나한테 떠나가는 사람인 거야
아서는 너에게 머무는 사람이고...
영화는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12살 어린 시절 서로의 첫사랑이었던 나영과 해성은 12년에 한 번씩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12살 때 첫 번째 이별 후 24년이 지나 36살의 어른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비로소 뉴욕에서 조우하게 된다.
너무나도 그리웠지만 차가운 현실 앞에 어긋난 인연이 되어버린 두 사람. 오랜 세월 동안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만 했고, 눈앞에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 실체를 느낄 수 없었던 연인을 눈앞에서 마주하게 두 사람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관객의 가슴을 아련하고 촉촉하게 적신다.
24년 만에 회전목마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끊임없이 돌고 도는 회전목마처럼 두 사람의 마음은 과거와 현재의 삶 그리고 전생과 이생을 배회한다. 영화의 제목인 'Past lives'는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을 의미하기도 하고, 과거의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족의 이민으로 어느 날 캐나다로 떠나게 된 나영. 그곳에서 나영은 더 이상 '나영'이라 불리지 않고 '노라'라고 불린다. 낯선 두려움도 잠시 12살 한국에서 살던 나영은 점차 사라지고 교포 2세 한국계 이민자 노라가 되어간다. 나영이 없어지고 노라가 된 것처럼 현재의 삶 속에서도 패스트 라이브즈는 존재하는 것이다. 36살에 되어 만난 해성에게 노라는 말한다.
이제 더 이상 12살의 나영이는 없어
하지만 그때는 분명히 있었어
나약한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과거의 삶을 놓지 못하고 계속 서성댄다. 현재의 삶은 대개 힘겨운 날들이 대부분이고 행복의 순간은 유난히도 짧고 드물다. 가끔 꺼내보는 과거의 삶은 조금 아프긴 할지라도 너무도 소중하고 달콤해서 평생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어른들은 이렇게 말한다. 청춘은 추억을 만드는 시절이고 나머지 인생은 그 추억을 꺼내보며 살아가는 시절이라고... 영화 'Past lives'는 윤회사상에서 말하는 전생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의 삶 속에서 지쳐버린 인간을 위로해 주는 것이 과거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36살의 어른이 되어 만난 노라와 해성은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만약 지금이 다음 생의 전생이라면, 이렇게 헤어지는 우리는 다음 생에도 영원히 이어지지 못하는 걸까?
전생에서 혹은 다음 생에서 우린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
정답은 영화에도 나오듯 '모르겠다'이다. 현재와 과거의 삶 속에서 헤매며 고단한 삶을 사느라 인연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정답을 알 수 없는 그 질문을 끊임없이 되뇌며 우리는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뉴욕을 떠나는 해성을 배웅하는 노라, 진짜 이별을 눈 앞에 두고 해성은 노라와 헤어지며 이렇게 말한다.
이번 생도 전생이라면
다음 생엔 어떻게 만날까?
그때 보자
이번 생에서는 두 사람이 어긋난 인연으로 만났지만 해성은 이렇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늘 떠나가는 노라의 뒷모습을 보며 덩그러니 남겨졌던 외롭고 쓸쓸한 해성은 진짜 이별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말한다. 우리의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과거의 삶을 자꾸 뒤돌아보고 기웃거리며 비루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현재를 살아내야 하고 미래를 일구어 나가야 하기에... 진짜 이별을 한 두 사람은 크나큰 슬픔에 무너지지만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성실하고 묵묵하게 또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이번 생이든 다음 생이든 돌고 도는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꿋꿋이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