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지성과 허영 사이

by Minimum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밤이면 어김없이 늦은 오후 짜릿하게 즐겼던 진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난다. 아차 싶다. 부모님께 고스란히 물려받은 유전자 중에 가장 원망스러운(?) 것 두 가지를 꼽자면 첫째는 맵고 뜨거운 것을 먹으면 산골아낙네처럼 변해버리는 붉은 볼. 두번째는 아프리카 원주민 수준의 카페인 민감증. 아예 중독시켜버리면 좀 나으려나 싶어서 자꾸자꾸 마셔도 쉽사리 내성이 생기지 않는 체질 덕에 오늘밤도 스르르 잠들긴 글렀다. 얽히고 설킨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거려 짜증이 나다가도, 또 한편으론 밤에나마 조금 더 또렷해지는 머리와 가슴을 주셨음에, 또한 그에 걸맞는 카페인 민감성 커피애호가라는 앞뒤 안맞는 조합의 체질을 주셨음에 감사하기도 하다. 밤에 활짝 피는 이 놈의 감성은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수십년을 지성과 허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살아왔다. 학창시절, 글이 좋아서가 아니라 남들에게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에 사력을 다해 글을 파고 들었다. 뿌리 없는 동기였기에 간판이란 명찰을 가슴에 붙이자마자 글과 이별했다. 불행하게도(?) 운이 따라주어서 남들은 한번쯤은 경험하는 인생의 고개마다 그 어떤 장애물 하나 없이 부드럽게 타고 넘어갔더랬다. 겉으로는 모든 게 잘 풀리는 듯 보였을지 몰라도 영혼은 꼬이기 시작했고 깨우침의 시간은 기약없이 미뤄지고 말았다. 남들에게 있어 보이고 싶은 얄팍한 의도가 영혼을 좀 먹도록 내버려두기도 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어색하고 두려워 늘 주변 사람들과 떠들며 고독과 외로움을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고독과 방황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자아의 성장은 멈춰 버렸다. 나의 눈이 아닌 남들의 눈을 더 의식했고 지성과 통찰을 버리고 허영과 욕망을 택했다. 그에 대한 죗값의 치르며 일상을 핑계로 어둠 아래서 넋 놓고 지낸 세월이 십수년...또래보다 반질반질한 손등 말고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아무 의미를 남기지 못한 채 모래알처럼 순식간에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간 지난 날들. 타고난 자존심과 허영을 버릴 수 없었던 평범하고 나약한 속물이 괴물이 되어버리지 않은 건 순전히 책을 놓지 않은 덕분이었다. 욕심과 허영이 갉아 먹은 영혼의 구멍을 글은 다시 속부터 차오르게 해주었다.

그렇게 책을 통해 영혼의 세포가 새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읽고 또 읽던 햇살 눈부시던 어느 날, 꽁꽁 숨어서 도통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나의 ‘글’을 찾았고, 나는...‘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글과 평생을 함께 하기로 작정한 후부터 이 세상 삼라만상에 온몸의 촉수를 곤두세우게 되었다.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입을 벌려 세상의 모든 것을 감각하여 나만의 목소리로 다시 내뱉고 싶다는 되도 않을 욕심이 생겼다. 욕망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방향만이 바뀌었을 뿐인데 졸고 있던 세포들을 하나하나 깨어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생각들이 가슴 속에 쌓여 묵혀지다보니 그것들이 발효되고 부풀어 밖으로 내어놓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임계점이 다가왔던 것일까.

지난한 방황의 여정에서 영혼의 시린 상처를 차오르게 해 주었던 숨은 문장들을 전한다. 화려한 언변도 깊이 있는 지식도 가지지 못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쓸데없이 요동 치는 감성을 무기 삼아 조촐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일상의 페달에서 발을 뗄 수 없기에, 하루하루 숨가쁘게 살아내야하기에 앞으로도 지성과 허영 사이의 방황은 계속 될테지만 일상과 이상의 밸런스를 맞추는 발재간이나마 조금씩 늘기를 바랄 뿐이다. 육신은 하루하루 늙어가겠지만 영혼만큼은 이제 막 방향키를 틀었으니 하루하루 시간을 거슬러 맑고 탱탱해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