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나이 들까

『어떻게 늙을까』, 다이애너 애실

by Minimum
여든아홉 살이 된 나를 보면,
그동안 힘든 일도 많았고
못 해본 일도 많으니
후회하리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후회는 없어.
이제는 현재를 온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됐으니까


여든아홉의 노인이 되어서 느끼는 인생의 모습은 과연 어떤 풍경일까? 여든아홉의 삶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독자가 여든아홉의 작가를 만나는 일 또한 흔한 일은 아니다. 2020년, 생김새마저 멀끔한 새해를 맞이하고 어김없이 또 한 살을 더 먹을 생각을 하니 『어떻게 늙을까』 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필자의 손은 어느새 책장으로 향한다. 저자 다이애너 애실은 영국의 유명한 문학 전문 출판사 안드레도이치 출판사에서 편집자로서 50년 가까이 일하며 필립 로스, 코맥 맥카시, 노먼 메일러, 잭 캐루악, 시몬 드 보부아르 등 세계적인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책을 출판했다.

나이가 들면 현재를 온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다니... 마치 자상한 이웃집 할머니가 군고구마가 달큰하게 익어가는 벽난로 앞에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그녀는 늙는다는 것, 노년의 삶, 인생의 의미 등을 조곤조곤 따뜻하며 기어이는 뭉클하게 들려준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편지도 잘 쓰고 남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출판사 편집자가 되었지만 본인이 직접 글을 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젊은 시절 사랑에 실패하고 임신했던 아이를 잃었던 처절한 슬픔의 경험으로 인해 자신을 여자로서 인생에 실패한 사람으로 단정 지어 버린 채 살아왔다. 20년이나 지난 어느 날 그때의 일과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정확하게 글로 털어놓게 되자 그 상처가 치유되면서 서서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책이 완성되자 실패자라는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고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그렇게 그녀는 글쓰기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 후로도 여러 책을 썼다.


이젠 마음 깊이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젊을 때는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관점에 의해 내가 누구인지가 상당 부분 결정되고 이런 현상은 중년기까지 계속되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이 성性이다....(중략) 하지만 늙으면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된다. 운이 아주 나쁘지 않은 한 말이다. 이제는 그 어떤 일도 그런 식으로 내 자존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는데, 그게 이상하게도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나이가 들어 젊고 싱그러운 외모는 잃어버릴지 모르지만 더 이상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되었고 오롯이 나 자신의 뜻대로 솔직하게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새로운 일과 행복을 찾았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온전한 나의 눈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보게 되자 솔직한 글쓰기가 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영원히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상처도 치유되었던 것이다. 노년의 삶에는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기쁨 그리고 색다른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특히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젊은 시절, 성性에 함몰되어 있음에 우려를 표한다. 아름다운 외모와 왕성한 성욕, 결혼, 임신과 출산 등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성욕이 감퇴하면서 나타난 중요한 현상은 다른 일들이 더 흥미로워졌다는 것이다. 성은 젊은 여성의 개성을 지워버린다. 젊은 남성의 경우는 덜한데, 이는 남성보다 여성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성에 이용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이런 차이가 대부분 교육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믿어보려 해 봤지만 헛된 노력이었다. 교육은 그 차이를 강화할 뿐이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기능의 문제다. 남성은 섹스를 한 후에 등 돌리고 가버리지 못할 신체적 이유 같은 게 없다. 반면 여성은 자신이 행한 모든 섹스 행위가 평생의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바꿀지 모를 잠재성을 안고 있다. 남성은 그저 또 다른 인간이 존재하는 데 시동을 걸뿐이지만 여성은 자신의 몸으로 또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 자기 안에 품고 좋든 싫든 그 존재와 유대를 맺어야 한다. 피임약 덕분에 여성이 이런 상황에서 해방되었다는 소리는 당치도 않다. 여성이 임신을 방지할 수는 있지만, 이는 신체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혼란에 빠뜨리는 강력한 화학약품이 개입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이를 낳도록 만들어진 몸을 가졌다는 건, 아무리 알약을 삼키는 게 쉽다 해도 여성이 자신의 몸이 명하는 정신적 양식에서 해방되려면 여러 세대가 지나야 할 거라는 얘기다. 또 그런 신체적 자유를 영원히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화학작용이 한 인간의 인격을 정확히 얼마만큼 결정하는지 현재로서는 평가할 수 없지만 분명 어느 정도 좌우할 것이다. 이 모든 이유로 여성은 신체 활동이 왕성할 때는 대개 거기에 함몰되어 있다. 대다수가 중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육체와는 별개로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발견하게 된다. 끝내 알아내지 못하는 여자들도 있다. 나는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아 대다수 여성들보다 일찍 나 자신을 일별하기 시작했지만, 성욕이 서서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더 명료하게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마흔이 되어서야 마음의 소리를 뒤늦게 알아채고 글쓰기를 시작한 필자에게 이 책은 동병상련으로 인해 무릎을 탁 칠만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랑과 열정, 상처와 타인의 시선 등으로 가득한 청춘이라는 시절은 꽃처럼 싱그럽고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젊음에 도취된 채로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기 마련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이유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게끔 자아를 도취시켜버린 채 쏜 살처럼 지나가버리는 아름답고도 고약한 젊음 탓인 것이다.

우리는 아직은 젊기에 노년의 삶에 대한 미리 짐작하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다이애너 애실과 같은 여든아홉의 지혜로운 할머니의 충고를 미리 듣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일을 향해 용기를 내볼 수 있는 젊은 우리는 얼마나 큰 행운을 누리는 것인지...


우리가 이 세상에 거의 보이지는 않아도 실제적인 뭔가를, 유익하든 해롭든 간에 남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생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흥미로운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인생이 내가 진짜로 아는 유일한 인생이므로 그 인생을 검토해야 한다면 검토자의 불가피한 한계 내에서 되도록 솔직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런 일은 무의미하다. 솔직하지 못한 책은 이런저런 유명 인사들의 수많은 자서전처럼 읽기에도 몹시 지루하다. 죽어서 사라지는 것은 인생의 가치가 아니라 자아가 남긴 낡은 그릇이요 자의식이다. 그것이 무로 사라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이들의 의식과 더불어, 지켜보는 이에게는 너무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무의식 상태에서 죽지 않는 한 이제 곧 죽을 사람은 여전히 완벽하게 살아있고 또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삶은 유일하며 그 어떤 삶도 소중하지 않은 삶은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늘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바라보라고 그녀는 말한다. 죽기 전까지 우리는 늘 완벽하게 살아있으며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서 죽을 때 남기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좋아. 몰라도 괜찮아.”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해야 할 때가 그리 빨리 오지 않기를 아직도 희망한다는 고백은 해야겠다.

노년의 하루하루는 어쩌면 덤으로 받는 선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하루하루 자연과 일상을 대하는 마음과 기쁨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수줍게 삶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고백하는 여든 아홉의 이 사랑스러운 할머니는 젊다는 자만심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살아가는 우리를 바라보며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