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섬, 나른한 오후의 강바람을 타고
브런치에는 훌륭하다 못해 위대한 작가들이 너무나 많다. 본업과 가정에도 충실할 뿐 아니라 강의도 하고 책도 내고 매일매일 브런치에 글을 쓰는 작가님들이 수두룩하다. 쉽게 지치고 넘어지는 나약해빠진 작가로서 그런 분들을 볼 때면 동경을 넘어 경의를 느낀다. 그러다가도 삶을 이끌어가는 에너지와 열정의 모습은 선천적, 후천적 이유로 각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며 이렇게 저렇게 위안과 핑곗거리도 만들어본다. 그렇게 머릿속이 터덜거리던 어느 날 브런치팀으로 부터 이런 알림을 받았다. 집필실을 빌려준다고?
몇 해 전 일이다. 알고 지내던 딸아이의 친구 엄마가 있었는데, 풍기는 분위기도 심성도 보드랍던 그녀는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회사인지 후원업체에서인지 집필실을 내어주어 아이들을 케어 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곳에 가있는다는 말을 들었다. '집필실'이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단어에 왜 그리 내 가슴이 콩닥거렸던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딸아이에게 온 신경과 스케줄이 끼워 맞춰 놓았으면서 또 뒤돌아서서 내 삶은 어디 있냐며 답답해했었던 날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글 쓰는 사람’이란 꿈을 버리지 못했던 나였기에 그녀의 ‘작가’라는 타이틀이 부럽긴 했지만 그때는 그보다 오롯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정해진 특별한 공간, '집필실'이라는 단어에 그만 홀딱 매료되고 말았다.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호텔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들도 있고, 큰 맘먹고 언제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집은 일터이기도 하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중
'키친테이블 노블'이란 말도 있지만 아이의 엄마이자 주부인 작가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의무의 공간'이다. 산적한 일상의 일거리와 고민들에서 벗어나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싼 커피숍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비싼 커피값을 지불해가며 그곳의 공간과 전기와 소음을 이용할 권리를 사야만 한다.
새롭게 탄생한 노들섬 안 노들서가에 3개월 동안 브런치 작가에게 집필실을 빌려주고 작가의 서재를 마련하여 추천 책을 전시한다니... 열정과 에너지의 불씨를 다시 살릴 절실한 기회다 싶어 부랴부랴 신청서를 작성했다.
부실한 신청서 내용에도 불구하고 '일상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한정된 기간인 데다 독립된 공간도 아니지만 아름다운 노들섬의 노들서가 안에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내 자리와 내가 추천한 책들이 전시되는 내 서재가 생겼다는 사실이 좌절과 고민에 탈탈 털린 가슴속에 기분 좋은 바람을 불어넣어주었다.
집필실 사용신청서에는 3개월 동안 어떤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적었더랬다. ‘자신은 잠시 내려놓은 채 직장생활, 육아, 가사에 지친 3040 여성들에게 꿈과 위로를 전하고 싶다’는 다소 식상하지만 원대한 포부였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서 무기력과 우울의 늪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경험을 전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마흔 언저리의 삶에 대해 열심히 자료 조사도 하고 공부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가슴속 기분 좋게 부풀려졌던 산들바람이 훅 하고 꺼져 버리는 듯했다.
일상작가란 타이틀과 집필실을 꿰차고 앉아 그에 부응하는 좋은 글을 쓰지 못하면 어쩌지?
대단한 커리어도 없고 지혜롭고 부지런하게 살고 있지도 않으면서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 건가
자기계발서가 전하는 계몽운동 같은 메시지를 담은 뻔한 글은 쓰고 싶지 않은데...
여러 고민들이 한 데 엉켜 마음이 복잡했다. 처음엔 작가로 불리는 것 만으로 행복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보이는 결과와 성과에 연연하게 되는 나 자신을 보는 일이 힘들어지는 요즘이었다.
그림처럼 파란 하늘이 펼쳐지던 어느 가을날, 그날도 노들섬 집필실에 갔다. 노들역에서 800m 거리를 걸어온 탓인지 들끓는 고민들 탓인지 밀려오는 더위에 집필실에 노트북만 내려놓고 시원한 커피 한잔을 사들고 강가로 향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노들강변 강바람을 맞으며 한강철교와 여의도 파노라마가 만들어내는 풍경과 한가롭게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과 축축 늘어진 버드나무를 바라보았다. 눈 앞의 풍경은 CG처럼 현실감 없이 아름다웠다.
작업을 마치고 어스름한 저녁, 집필실을 나와 한강대교에서 바라보는 노을 지는 서울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다.
내가 울고 웃었던 이 곳 서울 하늘에
소리 없이 어둠이 내려
깊이를 잴 수 없는 고독과 나른함이...
눈물 나게 아름다운 도시와 석양을 바라보며 Toy의 오래된 노래 <저녁식사> 중 첫 소절이 생각났다. 누구보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긴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접근하고 있다는 기내방송이 나오면 늘 가슴이 저릿한 포근함과 그리움을 느낀다. 나고 자랐으며 구석구석 내 온 삶의 추억이 아로새겨진 달콤한 나의 도시가, 용기를 잃고 주저앉은 나에게 이렇게 코끝 찡한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 많이, 너무 멀리 생각하지 마.
너는 그냥 너의 글을 써.
후회하지 않을 너만의 글을 써.
이제 집필실 이용 3주 차. 이번 주는 행사로 인해 집필실을 이용하지 못한다는데, 매일매일 집필실에 나갔던 것도 아니고 나가서 열심히 작업을 했던 것도 아닌데 잠시지만 내 자리가 없어졌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온다. 집필실에서 작업에 매진할 생각보다는 노들섬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서울의 풍경을 일주일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노들섬이 작가님들에게 좋은 영감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집필실 사용 전 오리엔테이션 때, 노들서가 담당자님의 말씀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꽤나 유효하고 있다. 노들섬에서 맞이할 2019년의 가을과 겨울, 내 삶에 어떤 추억으로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