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애 심기 안 건드리고 비위 맞추는 게
세상 제일 힘든 일인 것 같아!
저녁 산책은 일상에 지친 머리와 가슴을 상쾌한 공기로 소생시킨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언니에게 한숨을 내뱉듯 이렇게 투덜댔다. 사춘기 청소년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은 모두 다 진상고객을 대하는 감정노동자들에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블랙컨슈머의 기이한 말과 행동을 얼르고 달래야 하는 감정노동자... 고객을 화나게 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되면 냉전과 마찰이라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에 가슴속에 수도 없이 참을 인자를 새겨가며 최대한의 센스를 발휘하여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하물며 고3 고객은 어떠랴... 딸아이는 대체로 순하고 착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체력이 약해서인지 하루하루 날씨나 컨디션 따라 감정 기복이 있는 편이다. 컨디션이 저기압이거나 스트레스가 가득한 날이면 내 머릿속에는 경계경보가 울린다. 중학생 때까지는 아직 어리고 철이 들기 전이라 버릇없는 행동을 하거나 잘못을 하면 따끔하게 혼내기도 했지만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딸아이의 경우 고1까지는 여전히 중학생 티를 못 벗고 진지한 고민 없이 대충대충 생활하는 것 같더니만 고2 때부터는 부쩍 의젓하고 철이 든 모습을 보였다. 입시라는 인생에서 넘어야 할 큰 장벽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면 아이들은 어느 날 벼락을 맞은 듯 소위 현타를 맞게 되고 인생과 진로애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의 어깨는 감당하기 버거운 고민의 무게로 인해 한없이 쳐지고 무거워진다. 그러기에 부모들의 말과 행동은 나날이 조심스러워지고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고2 무렵, 쏟아지는 수행평가와 정기고사, 각종 대회 등 숨 쉴 틈 없는 학사일정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아이가 하루는 집에 오더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를 붙잡고 자꾸 왜 우는지 캐내려 계속 말을 걸었고 위로의 말을 생각해가며 주절주절 이 말 저 말 늘어놓았다.
엄마, 그냥 좀 말없이 안아주기만 하면 안 돼?
엄마가 내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고...
고3맘의 필수 스펙은 감정과 언어의 절제력이었고 어쩔 땐 아예 입을 닫아버릴 잠금장치마저 필요했다. 아이가 힘들어할 때엔 어설픈 위로의 말을 하기보다 먼저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어야 한다.(따뜻한 스킨십까지 해주면 베스트!)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지만 처음엔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렇게 안되던 말 줄이기가 코로나로 인하여 가능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아이의 건강이 제일 걱정되고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이 들다 보니 속속들이 다 알아야 했던 공부와 연관된 학교나 학원생활에 대해서 보다는 그날그날 아이의 건강상태나 먹고 싶은 것, 스트레스 체크 등 꼭 필요한 것들만 묻고 챙기게 되었다.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엄마가 공부에 대한 걱정과 관심을 덜어내는 만큼 아이는 자신의 공부에 대해서 더 책임감을 갖는 모습을 보였다.
고3맘은 감정노동자가 아니다. 내 아이의 마음을 살피고 어루만지는 일에 결코 ‘노동’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변치 않고 언제 그 자리에 서있는 나무처럼 엄마는 지친 내 아이가 쉴 수 있도록 넓은 품과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야 한다. 하루의 피로를 풀어줄 상큼 달콤한 열매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세상 풍파에 이리 흔들 저리 흔들리며 투덜투덜 살고 있는 스펙 미달 엄마이지만, 나는 오늘도 아이에게만큼은 지친 몸을 기댈 수 있는 언덕 위의 커다란 사과나무가 되어 주고픈 야무진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