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민철 Aug 08. 2020

불량 사원과 미어캣


졸다가 과장에게 걸렸다. 하필이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거의 드러누운 자세였기에,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과장은 그 즉시 나를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직원들 사이에서 진실의 방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단순한 경고로는 안 되겠다는 의미였다. "너 같은 애는 처음이다." 과장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화를 내다가도, 어이가 없어서 자꾸 할 말을 잃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잠깐 졸다 걸린 수준은 아니었어서, 황당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 상황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형사 처분에는 기소유예라는 말이 있다. 죄는 지었지만 검사가 기소하진 않는다는 뜻이다. 나도 일종의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진실의 방에서 풀려났다. 시말서나 반성문 한 장 안 쓰고 징계조차 없었으니. 문제는 그게 얼마나 인간적인 대우였는지 모르고, 과장에 대한 반감만 늘었다는 거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직원들과 메신저를 하다가 또 들켰다. 부서 이동을 얘기하러 온 과장에게 딱 걸린 거였다. 만화에서나 보던 살기(殺氣)를 뒤통수로 느꼈다. 진실의 방으로 다시 불려 갔을 땐 얼굴까지 벌게지면서 소리를 지르던 과장이었지만, 나는 어디서 솟아난 깡인지 막무가내로 대들고 있었다. 잠깐 메신저 한 게 그렇게 잘못이냐는 거였다. 과장은 한두 번 본 게 아니라고 응수했지만, 나는 과장이 평소에 내게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다. 이번엔 과장의 차례였다. "너, 내가 지켜볼 거야." 결과는 처벌도, 용서도, 참작도 아닌 보류였다.


얼마 뒤에 사무실을 이동했다. 부서이동 하면서 사무실을 옮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과장까지 내 옆으로 옮긴 건 아무리 봐도 감시였다. 교탁 옆에서 수업 듣는 초등학생 꼴이었다. 내 잘못이니 억울할 까닭은 없지만, 하루 종일 감시를 받는다는 불쾌감은 며칠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과장은 하루에 적어도 열 번 이상은 다른 사무실을 오갔다. 사이트팀에서 일해야 할 사람이 굳이 콘텐츠팀으로 옮겨왔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콘텐츠팀 전원을 관리할 목적이 분명했다. 과장이 수시로 사이트팀을 오가는 것만큼, 그 이상으로 과장에게 용무가 있는 직원들이 내 뒤로 지나갔다. 나는 예민한 성격 탓에 그러한 분주함이나 이상스러운 낌새를 잘 견디지 못하고 움찔움찔했다. 업무 때문에 메신저를 해야 할 때도 괜히 눈치를 봐야 했다. 의자의 들썩임,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누군가 내 뒤에 멈춰 서는 수상한 낌새나 소리를 죽여가며 다가오는 인기척. 그것들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의 스트레스였다.


그러나 두어 달쯤 지나고 나니 정작 과장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고, 웬만한 일탈은 눈감아주는 것 같았다. 웹서핑이나 메신저를 하다가 몇 번 걸린 것도 같은데 그냥 넘어갔으니. 정작 그는 신경도 안 쓰는데 제 발 저린 꼴이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종종 신경질적이었고 사장이나 이사에게 소위 '깨지고 온 날'이면 더 날카로웠다. 그럴 때마다 과장은 몇몇 사원들의 업무태도를 지적하거나 말투에서 짜증이 묻어 나오거나 창문 너머를 하염없이 내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폭풍전야의 긴장감 같은 게 흘렀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그의 모습에 오히려 알 수 없는 반항심이 일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쓰면서도 결국 일탈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탈을 위해서, 나는 되려 그를 감시하곤 했다.




나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오래 감시받은 나머지, 한 칸 남짓한 무대 위의 연기자가 된 기분이었다. 역할은 업무에 집중하느라 그의 움직임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지극히도 성실한 사원. 오히려 반응조차 않는 게 부자연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무감각을 연기한다. 하지만 그 배역의 내면에는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할 정도의 예민함이 있다. 마침내 유리창 너머에서 뒤통수로 꽂히는 시선마저도 감지해 낼 수 있었으니. 만약 신경을 날카롭게 유지한다면 그가 지나가는 타이밍 또한 오차 없이 계산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막의 파수꾼이라고 불리는 미어캣이 시각과 후각으로 적을 감지한다고 했나? 나는 육감으로 그의 존재를 느꼈다. 다만, 이처럼 민감한 센서는 종종 오작동을 일으키곤 했다. 분명 몇 번이나 명확한 인기척을 감시하고 뒤를 돌아봤음에도 정작 그는 없었다.


이상했다. 이 갑작스러운 정적과 나를 향하는 시선, 그의 뚜렷한 존재감. 센서의 오작동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마침내 그가 주위에 없더라도 그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그가 나를 감시하려는 의도마저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그의 의도마저도 감지해 낸 것처럼, 그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감시하는 건 아닐까. 관리하겠다는 목적으로 옆에 앉혀놓고도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까닭은 그러한 능력으로부터 비롯된 건 아닐까.


왜 그는 시종일관 나를 감시하면서도 내 작은 일탈들을 적발하지 않던 것인가. 키보드 소리가 잦아진다거나, 기침소리를 가장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거나, 모니터 위로 꾸벅거리는 머리가 보였음에도. 어쩌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착각일지도 모른다. 메신저를 하거나 졸거나 웹서핑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지 않은가. 이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 대부분의 포식자들은 사냥감을 포착하기 전까지 자신을 대놓고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가 나의 일탈을 발견하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그를 감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작은 몸짓이나 숨소리, 눈의 깜박임까지도 모두 잡아내고 미리 대응할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내 일탈은 늘 그의 감시망을 벗어난 곳에서 행해지지 않았나.


그러나 사회는 사소한 방심조차 허용되지 않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체제다. 당연히 미어캣도 한순간의 방심으로 천적에게 목숨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과장도 나의 감시가 무뎌진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고, 내 작은 일탈도 거기서 마무리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다시 그의 감시망 안으로 끌려 들어가, 거대한 운영 체제의 일부로 편입되는 기분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