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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철 Oct 24. 2022

그 절필 선언은 지금도 유효할까

복학을 앞두고 학교를 찾아갔다. 3개월만 지나면 지겹게 볼 사이면서, 굳이 그 먼 곳까지 불러낸 친구 때문이었다. 이유라고 해봤자 피시방이나 갔다가 자취방에서 술 한잔하자는 게 다였다. 나는 왜 불러내냐면서 짜증을 냈는데, 실은 아는 사람 한 명쯤은 마주치겠다 싶어서 내심 설레는 마음이었다. 친구의 자취방으로 곧장 가지 않고 과실로 향한 건 그러한 이유였다.


과실의 낡고 삐걱거리는 철제문을 열었을 땐,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다가 우리 학교로 전과한 동기이자 형이었다. 학교 다닐 땐 나름 말을 섞었으니 안 친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친하다고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는 사이였다. 다행히도 아는 척은 형이 먼저 했다. 이 예상치 못한 만남이 퍽 놀라운 눈치였다. 형은 먼저 다녀온 사람의 여유로, ‘어디서 근무했냐’든지, ‘요즘 군대는 군대도 아니다’든지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아직 '요'가 어색한 말투로, 형도 잘 지내셨냐고 물었다. "뭐, 그럭저럭 지내지." 그 말로 얼렁뚱땅 때우려는 걸 보니, 하는 일이 잘 풀리진 않는다는 걸 느낌으로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목장을 크게 운영하신다는 소문이 학과 내에서 공공연하게 퍼져있던 탓에, 딱히 걱정되는 건 없었다. 오히려 목장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약간 부러울 정도였다. 그 말을 끝으로 잠깐 침묵 속에 있었다. 아무래도 괜한 질문을 한 건 아닐까 싶었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환기할 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과실을 둘러보았다. 2년이 지났는데도 과실은 놀랍게도 그대로였다. 내가 다닐 때도 고물이어서 지금은 부팅이나 될까 싶은 컴퓨터들이 창가에 줄지어 놓여있고, 뒤편에는 졸업작품집들이 꽂혀있을 먼지 덮인 책장이 있다. 아마 형의 졸업작품도 그중에 꽂혀있겠지 싶었다. 그때까지도 형은 휴대폰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직도 시 쓰세요?" 나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못 견디고 꺼낸 말이었지만, 그렇다는 대답을 은근히 기다린 게 사실이었다. 늘 등단할 거라 자신 있게 말하던 형이었기에, 별 싱거운 얘기를 다 한다는 듯이 졸업작품집이라도 꺼내 보여줄 줄 알았다.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열심히 갈고닦은 글을, 형의 색깔이 한껏 묻어 나온 시를 당당하게 내놓을 줄 알았다. "그래, 복학해서도 열심히 쓰면 된다." 어쩌면 형에게 그러한 격려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형은 이제 그런 거 재미없다." 형은 다소 연극톤으로 대답했다. 나는 못 물어볼 질문을 내뱉은 미숙한 리포터처럼 약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 거. 우리가 사랑했던 일을 그런 거로 일축해 버리는 그의 무심함이 서운했기 때문이었다. 형, 왜 그렇게 말해요. 그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형의 말이 연기처럼 들려서.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이 헤어지고 나서는 '걔'나 '그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형이 얼마나 시를 좋아했고 진심이었는지는, 나를 포함해 학과 내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림으로도 충분히 좋은 학교에 입학해놓고, 시를 쓰겠다고 산구석으로 옮겨왔겠지. 그래서 더욱 따지고 들 수 없었다. 이제 그런 거 재미없다는 말이 절필 선언보다 이별을 말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으니까. 형이 전혀 우습지도 안타깝지도 않았고, 그저 약간 슬퍼 보였다.


그 후로 5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연락이 끊어진 탓에 이제는 형이 무얼 하고 지내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형은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했고, 나는 쓰겠다고 하고 쓰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출판 편집자를 하겠다고 1년 넘게 헤매다 튕겨져 나왔고, 글과는 관련도 없는 일에 꽤 오랜 시간을 붙들려있었다. 결국 우리는 사랑했던 일로부터 각자의 거리만큼 물러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글쓰기로 연이 닿은 사람들이 그만 쓰겠다는 말을 할 때, 형의 말과 그 말에 담긴 슬픔을 떠올리고 상념에 빠진다. 그 절필 선언은 지금도 유효할까.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형이 다시금 시를 쓴다는 말이 듣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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