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을 프로듀스! (2)
올림픽의 의료팀에서 행정직원으로 일하면 겪는 일
슬라이딩 베뉴는 봅슬레이, 스켈레톤, 루지 경기를 하는 베뉴(경기장)이다. 이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봅슬레이 경기 중 사망사고가 있었다고 하니 의료팀의 역할이 중요한 경기장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일하게 되었다. 의료진들은 대부분 올림픽 경기가 정식으로 시작해야 속속 도착할 것이고, 그전에 인원 배치와 의무실 세팅 등의 업무들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사고가 일어나면 큰 사고 일테니 걱정이었고, 그 장면이 생중계된다는 점도 압박이었다. 대처 과정이 부실하다면 경을 칠 것만 같았다. 이 경기장에서 이루어지는 경기들은 썰매가 높은 곳에서 출발해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속도가 붙는다. 가속이 가장 많이 붙은 상태로 가장 낮은 포인트를 지나서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는 코스에서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메디컬팀에서 가장 걱정하는 요소는 가속이 붙은 지점에서 썰매가 얼음 판을 이탈하는 것이었다. 얼음 판 밖에 썰매 날이 닿으면 그 마찰력 때문에 썰매는 고꾸라지고 말 것이다. 그대로 날아가서 어디엔가 떨어지는 아찔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사실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슬라이딩 베뉴가 뭐하는 곳인지 자료를 뒤져보고 있었더니 팀장님이 다가왔다. 그는 야외 경기장이라 고생깨나 하겠지만 팀장님 자신도 슬라이딩 베뉴로 갈 거니까 편하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슬라이딩에는 다른 이벤트가 하나 더 있다며 바로 준비해야된다는 말을 전했다. 리허설이었다. 올림픽을 하는 상황과 유사하게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을 테스트 이벤트라고 하는데 슬라이딩 베뉴에는 2주간의 테스트 이벤트가 예정되어있었던 것이다. 일정표를 보아하니 아침 여덟시 반부터 저녁 열한시까지 테이블이 꽉꽉 차있었다. 이주간 한단다. 숙소에서 왔다갔다 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지옥 일정이었다.
그래도 팀장님하고 나눠서 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다른 베뉴로 발령받은 동기들도 경기를 보러왔었다. 하지만 팀장님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 주일 간의 일정 중 일주일을 함께한 뒤 서사무관! 잘할 수 있어라며 사라졌다. 요 기간 동안 준비되어야 하는 건 선수 의무실 세팅, 관중 의무실 세팅, 행정실 세팅 의료팀의 운영을 어떻게 할지 계획을 짜는 것 정도였다. 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 이미 비슷한 이벤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부닥쳐가면서 배울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올림픽 경기 때만큼 모든 세팅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선수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니 운동경기 느낌이 났다.
어떤 썰매는 빠르게 내려갔다가 피니시 라인까지 도착했고, 어떤 썰매는 다 내려가지도 못하고 중간에 멈췄다. 썰매가 삐꺽하면 의료팀 무전기가 시끌시끌해졌다. 어느 정도 썰매가 삐끗하는 것이 주의를 요하는 움직임인지 감이 없던 시기여서 계속 썰매만 봤던 것 같다. 의료팀에 같이 있었던 동기들도 와서 일도 도와주고 밖에 서있기도 했다. 의무실은 피니시 라인 안쪽에 있는 건물인 피니시 하우스에 들어갔다. 완전히 꾸며놓지 않은 상태라서 그런지 선수들이 가끔 와서 여기는 뭘 하는 곳이냐 간식을 줄 수 없겠느냐 하는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테스트 이벤트 첫 주에는 이미 경험 있는 의사 선생님 한 분과 응급구조사 선생님이 계셔서 일하기가 수월했다. 당시에 흥미로웠던 일로는, 선수들은 어딘가 쓸리거나 조금 상태가 안 좋아도 거의 약은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선수 의무실에서 약 받아가는 게 혹시 모를 도핑의 위험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고지대여서 고산증을 예방하는 약을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이스팩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스트레칭을 위한 침대를 달라, 물리치료를 해줄 수는 없느냐 하는 경우들도 있었지만.. 거참.
일정을 거치다 보니 발견된 또 하나의 큰 문제점이 있었다. 슬라이딩 센터의 길이는 총 2.018km였는데 이 킬로가 조금 넘는 길이의 경기장이다. 이곳은 관중들이 돌아다니면서 경기를 본다. 축제의 장이어야 하는데 평창의 겨울이 너무 춥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리고 경사진 길이 있다 보니 사람들이 미끄러질까 걱정이었다. 또 경기장 구조 상 주요 포인트에 엠뷸런스를 배치할 수밖에 없었는데, 엠뷸런스의 동선이 관중의 동선과 겹친다는 점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관중이 꽉 차있는데 사고가 나고 사고 현장이 카메라에 잡히고 엠뷸런스가 경사를 못 올라고 이차사고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썰매가 지나가는 빙상 옆에 경기를 운영하는 사람들 (빙판 닦는 사람들, 의료진, 썰매 멈추면 썰매 끌어주는 사람들 (군인들이 했다.))이 지나다니는 길이 있는데 관중이 넘어오거니 미는 것도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미끄러지는 사고를 제일 걱정했던 것 같다. 악몽도 많이 꿨다. 나는 몰랐는데 룸메가 알려줬다. 내가 자다가 "그리로 가시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아 미끄러진다. 어쩌지" 뭐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바닥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모래나 소금을 뿌렸다. 그러는 와중에 내가 이거 미끄러지면 어떻게 하냐고 같이 일하던 소방대원님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강원도의 소방대원들은 알아서 잘할 수 있다며 이미 이 바퀴가 미끄럼 방지고, 눈 더 오면 체인을 감든가 어떻게 하면 된다며 안심을 시켰다. 하지만 관중 사고 부분은 거의 끝까지 걱정돼서 당시에 같은 베뉴에 관중 통제를 담당하던 사무관 님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아. 또 경기장에 보험사에서 나온 손해사정사 분도 관중 의무실에 계시거나 돌아다니시거나 하면서 사고 났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도 같이 생각했었다.
경기장에는 여러 팀들이 있었는데 총괄, 스포츠, 의료, 관중, 테크, 물자, 식자재, 오버레이, 데코, 인력팀 등등이 거의 베뉴에 상주했다. 사람들이 많았지만 환경은 열악한 편이었다. 또 이게 추우니까 난로에 불이 안 붙고 바람 불면 텐트처럼 쳐놓은 시설물들은 날아가기도 했다. 나는 그래도 사정이 제법 나은 편이었다. 제대로 된 건물에 의무실도 있었고 사무실도 하나 차려져 있으니 따뜻하긴 했다. 그러다 가끔은 어디 사무실 난로가 고장 났다고 찾아온 객식구들도 있었다. 테스트 이벤트를 거치면서 나는 두 개의 방과 한 대의 엠뷸런스를 부리는 이 통제구역에서 공간과 이동수단을 갖춘 나름의 권력자로 거듭났다. (올림픽 구역 내부를 다닐 수 있는 차량은 굉장히 귀하다. 그래서인지 엠뷸런스를 쓰고 싶다는 요청을 때로 받았다. 후술 하겠다.)
또한 경기장에는 다양한 종류의 빌런들이 있었다. 앞서 말했는 많은 팀들이 모여서 하나의 도시를 건설하는 것과 같았다. 시설은 어느 정도 공사가 다 끝났다지만 경기장 위의 시설물인 오버레이들도 작업할 것들이 좀 남아있었고, 운영 시간은 어떻게 할 것 인지,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할지 등등.. 많은 것들을 함께 고민해야 했다. 경기 운영을 도와주는 팀들은 사실상 밥 먹는 시간도 부족할 때가 많다. 중간에 짬날 때 먹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각 팀별로 사람이 많다 보니 어디부터 밥을 먹을지 간식은 얼마나 받을지도 상의해서 정한다. 이럴 때 정말 목소리 높여서 자기 팀만 중요하다고 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한 빌런은 구급차 주차자리에 잠깐 주차할 수 없겠냐고 구급차 지금 안 쓰면 빼달라고 했었다. 살면서 들은 말 중에 최고로 황당했고, 무슨 소리냐며 나도 게거품을 물었다. 이상하게도 그분은 이후로 나에게 아주 잘해주었다. 간을 한 번 보셨나 보다. 이 팀이 정말 내겐 빌런 팀이었다. 나에게 올림픽 경기 당시에 아주 무리한 요구를 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자 문체부 차관을 안다며 차관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내용은 운영인력이 아파서 엠뷸런스를 좀 쓰려고 하는데 여기 의료팀장이라는 애가 공무원인데 사람이 아프다는데 구급차를 못쓰게 한다. 운영인력이 아프면 담당하는 팀에 차가 있을 테니 그걸로 병원에 간다는 원칙은 우리 매뉴얼에도 있고 이전에도 말했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민원 사건은 금방 마무리되었다.
전후로도 왕왕 대기하고 있는 의료팀 소속의 소방대원들 붙잡고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소방대원들하고 일하면서 정말 좋았던 점이 있었다. (짱) 완전 보고체계가 확실해서 어떤 요청이 들어오거나 공유해야 할 상황들이 있으면 바로바로 알려주고,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이야기를 하면 딱딱 체계에 맞춰서 해주신다는 점이었다. 최고! 당시에 내가 스물다섯이었으니 애 같아 보일 수도 있었고, 미숙한 부분도 많았을 텐데 슬라이딩 의료팀의 절반정도가 소방대원이었다는 점이 팀을 끌어가는 데는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강릉 소방하고 영월 소방서에서 많이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원래도 근무교대를 많이 하는 직장이지만 강원 지역 소방공무원들은 각 베뉴로 차출이 많아서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야외 경기를 한 팀은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관중이 없는 테스트 이벤트가 끝났다. 형광색의 단복을 입고 이 주간 경기장으로 출퇴근을 하며 이제 어떻게 이곳을 운영해야 할지 감이 좀 잡혔다. 그와 동시에 올림픽에 참여해 줄 의료진들을 찾아야 하는 고난이 남아있었다. 군데군데 구멍 난 스케줄표를 보며 한숨만 나왔다. 테스트이벤트를 하면서 의료진의 중요성을 더 체감했었다. 사고가 안 나면 의료진이 없어도 된다만, 사고가 났는데 의료진이 없다? 교육도 제대로 안되어있다? 하면 국제망신이고 또 큰일이니까 걱정이었다.
테스트 이벤트를 마무리하고 다시 사무실에 돌아오니 제법 초과근무가 많이 쌓였다. 몇 시간 이상 근무하면 초근으로 수당을 받는 것보다 연가로 바꾸는 게 좋다는 것도 배웠다. 테스트 이벤트를 이주 힘들게 하고 여행을 다녀왔다. 당시에 같이 일하던 상사 중 한 분이 행사가 끝나고 돌아온 나를 보며, 너는 약간 화가 나있어. 휴가를 좀 다녀와. 하셨는데, 당시에는 그 말이 잘 이해가 안 됐다. "지금 해결할 일이 태산인데 휴가를 갈게 아니라 이걸 해결해야죠! 어떻게 할까요!?" 묻는 내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지금 당장 뭘 하려고 해도 잘 안돼 우선 마음을 편히 먹고.. 저 인력 담당하는 직원이 채워 넣을 거야. 힘내고. 다음 주 휴가 갔다 와."라며 답한 상사가 야속했지만, 지나고 보니 이해가 간다. 행사 준비가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면 이렇게 저렇게 맞춰진다는 것을..!! 사실 당시에 나는 좀 오버하고 있긴 했다. 돌아보니 그때는 이상적인 어떤 상태가 아닌 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화가 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