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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지만 다른

소설 1

by 이민근

남자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 소파에 앉았다. 맥주 캔을 따며 베란다 창 밖에 비치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한강의 모습은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하는 것이 있다면 한강 주변으로 늘어나는 빌딩과 아파트, 유리창에 쌓여가는 먼지들뿐이었다.


베란다의 한쪽 구석에는 말라버린 화분들이 차례로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쓰다 남은 크레파스와 색칠놀이 공책이 아무렇게 널부러져 있었다. 남자는 눈을 화분과 공책쪽에 고정한채 맥주를 마셨다. 버려야해. 남자가 생각했다.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 화요일이었던가 오늘은 화요일이었나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거실로 고개를 돌렸다. 벽시계 밑에 걸려있는 달력은 1월에 멈춰 있었다. 지금이 1월이 아니다 그럼 지금이 몇 월이지? 생각하다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3월 21일 화요일이었다. 남자는 맥주 캔을 찌그러트리며 “화분을 버리자”라고 말했다.


남자는 엘리베이터로 8층에 1층까지 다섯 번 정도 왕복한 끝에 화분을 모두 옮겼다. 옮긴 화분은 모두 여덟 개로 직사각형 텃밭 화분 세 개, 원통형으로 된 화분 세 개, 도자기로 된 흰색과 파란색의 난 화분 하나씩이었다. 남자는 아파트 화단 앞에 일렬로 죽 늘어선 화분들의 모습에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플리마켓 부스를 떠올렸다. 햇빛이 조금 따가웠다.


남자는 화분을 옮기기 전 미리 경비실로 연락해 흙을 화단에 버리는 것을 허락받았다. 경비실에서는 흙은 자신들이 따로 처리할 테니 잘 보이는 곳에 일단 쌓아만 두라고 말했다. 남자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잠시 숨을 고르다가 움직였다. 남자는 버리기 쉬운 직사각형 화분의 흙부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물을 주지 않아 흙들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지만 그래서 오히려 한 번에 흙을 빼내기가 쉬웠다. 남자는 먼저 화분의 가장자리를 모종삽으로 다졌다. 그런 다음 죽은 식물의 줄기를 잡아당겨 굳은 흙이 흔들리는 걸 확인하고 화분을 기울여 흙을 빼냈다. 그럼 벽돌처럼 딱딱한 흙이 한 번에 빠져나왔다. 남자는 세 번째 화분의 흙을 쏟아낼 때 자신이 가져온 목장갑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도 함께 알아챘다.


“저기 아저씨, 그 화분들 버리시는 거예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린 남자의 눈에 보인 것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젊은 부부였다. 두 사람은 서로 색이 다른 린넨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남편 쪽은 그레이 색, 아내 쪽은 베이지 색이었다.


“화분 버리시는 거 맞아요?” 베이지가 말했다.


“맞아요.” 남자는 대답하며 화분의 흙을 털어냈다.


“그럼, 그 화분 저한테 파세요.” 베이지가 말했다.


“자기, 화분 필요해?” 그레이가 베이지를 보며 말했다.


“응, 마침 지금 쓰는 화분에 금이 갔거든.” 베이지가 말했다.


베이지는 어느새 그레이의 손을 놓고 화단으로 가서 화분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남자는 다른 화분의 흙을 다지기 시작했다.


“저기, 이 도자기 화분, 받침대는 없어요?” 베이지가 말했다.


“받침대는 집에 있어요.” 남자가 흙을 퍼내며 말했다.


“다행이다. 그럼 얼마에 파실 거예요?” 베이지가 말했다.


“그냥 가져요, 어차피 버릴 건데.” 남자가 말했다.


“정말요? 감사해요! 잘됐다 자기야 그렇지?” 베이지가 그레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응, 돈 아꼈네.” 그레이가 대답하며 베이지 옆으로 갔다.


“저도 흙 버리는 거 도와드릴게요.” 베이지가 화분 옆에 있던 목장갑을 집으며 말했다.


“자기야, 내가 할게.” 그레이가 베이지의 손에서 목장갑을 뺏었다.


남자는 이미 직사각형 화분과 원통형 화분의 흙을 모두 버린 다음 도자기 화분의 흙을 다지고 있었다.


“흙을 다져야 해요.” 남자가 모종삽으로 흙을 다지며 말했다.


“이렇게 흙 가장자리를 조금만 다져서 몇 번 퍼낸 다음에 화분을 치면 흙이 잘 나오거든요.” 남자가 그레이에게 화분을 넘기며 말했다.


“아저씨 잘 아시네요, 혹시 꽃집 하신 적 있으세요?” 옆에서 지켜보던 베이지가 말했다.


“유튜브에 다 나와 있어요.”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화분은 왜 버리세요?” 그레이가 남자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


“버려야 될 거 같아서요. 너무 오래 방치했거든요.” 남자가 화분의 가장자리를 다지며 말했다.


베이지는 화단 옆에 앉아서 두 사람을 그저 지켜만 봤다. 그러다 남자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미간을 타고 내려와 코끝에 맺히는 걸 봤다. 베이지는 어깨에 멘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레이에게 건넸다.


“아저씨 땀 좀 닦아드려.” 베이지가 말했다.


손수건을 받은 그레이는 남자의 콧등에 맺힌 땀과 이마를 닦아주었다.


“고맙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마지막 화분의 흙을 털어낸 남자와 그레이는 일어나서 동시에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도자기 화분 두 개면 되나요?” 남자가 말했다.


“네, 맞아요.” 남자의 말에 베이지가 얼른 대답했다.


“그럼, 나머지 화분 버리는 것도 도와드릴게요.” 그레이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직사각형 화분은 제가 들고 갈 테니까 나머지를 들어줘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와 그레이는 화분을 들고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베이지는 화단에 남아서 화분이 도둑맞지 않게 지키겠다고 했다.


“아내가 화분이 마음에 드나 봐요, 감사합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버릴 거였어요.”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꽤 비싸 보이는데요.” 그레이가 말했다.


“저한테는 이제 가치가 없는 물건이에요.” 남자가 말했다.


“무슨 뜻이에요?” 그레이가 말했다.


“원래는 소중한 물건이었는데. 이젠, 도자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거죠.” 남자가 말했다.


그레이는 남자에게 다음 질문을 하려다 말을 멈췄다. 그레이는 자신이 말을 멈춘 이유가 분리수거장에 도착해서인지 남자가 한 말 때문인지 헷갈렸다. 그레이는 남자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이쪽에 두면 될 거 같네요.” 남자가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은 플라스틱 용기들이 담긴 자루 옆에 화분을 내려놓고 화단으로 돌아갔다.


“수고했어.” 베이지가 손수건으로 그레이의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고마워.” 그레이가 말했다.


“받침대를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남자가 말했다.


그레이가 장갑을 벗어 남자에게 돌려줬다. 장갑을 받은 남자는 모종삽을 챙겨서 101동으로 들어갔다. 베이지와 그레이는 화분을 하나씩 안고 남자를 따라갔다. 화분을 들고 있어 어깨가 조금 쳐진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마치 아기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머물러있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고 문이 열렸다.


“혹시 몇 층에 사세요? 저희는 5층에 살아요 501호.” 베이지가 말했다.


“8층에 살아요, 801호.” 남자가 말했다.


“같은 동 주민이었네요.” 그레이가 말했다.


남자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베이지와 그레이가 따라 탔다. 화분의 무게가 더해져서인지 엘리베이터가 조금 덜컹거렸다. 남자는 버튼을 눌렀고 조금 뒤 문이 닫혔다.



“여기는 더 높아서 그런지 한강이 더 잘 보여요.” 베이지가 말했다.


“우리 집은 한강이 반 밖에 안 보여요.” 그레이가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는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받침대는 베란다에 있어요.” 남자가 말했다.


베이지가 어느새 받침대를 가지고 탁자로 왔다.


“찾았어요.” 베이지가 말했다.


“그런데 다른 가족 분들은 어디 가셨나요?” 그레이가 말했다.


남자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굳은 표정으로 주스 잔을 바라봤다. 베이지와 그레이는 서로를 쳐다보며 혹시 말실수를 했나 라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 멀리 떠났어요.” 남자가 말했다.


“여행을 간 거예요?” 베이지가 말했다.


베이지는 그렇게 말하고 그레이의 옆에 앉았다.


“네, 조금 긴 여행을 떠났어요. 아주 멀리.” 남자가 말했다.


그레이는 냉장고에 붙어 있는 다정한 가족사진을 바라봤다. 이 집으로 들어와 탁자 앞에 앉았을 때부터 비스듬히 붙여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레이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와 처음 보는 여자사이에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앉아있는 가족사진. 베이지도 그 사진을 보았고 두 사람은 그 사진 속 모습에서 서로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앞에 앉아있는 남자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지금 이 남자에게 저 사진 한 장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끼며.


“저희는 작년에 두 번째 아이를 하늘로 보내줬어요.” 베이지가 말했다.


베이지는 자신도 모르게 떠나보낸 아이에 대해 말했다. 자신도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런 베이지의 손을 꼭 잡았다. 베이지는 그레이도 지금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베이지를 쳐다봤다. 세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싱크대의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잠깐의 정적을 파고들었다. 뚝 뚝 뚝 뚝.


“그 화분들은 아이가 골라준 거예요. 셋이서 산책을 나갔다가 벼룩시장 같은 곳을 지나갔어요. 아내는 그게 플리마켓이라고 말했어요. 아이가 손가락으로 정확히 부스 한 곳을 가리켰어요.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그 화분들이 있었죠. 그래서 그 화분을 샀어요.” 남자가 말했다.


세 사람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물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침묵을 하는 순간이면 물방울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베였다는 감각조차 느끼지 못 한 손가락의 얕은 상처를 발견했을 때의 쓰라린 감각을 인지하는 순간, 세 사람이 듣고 있는 물방울소리는 바로 그 순간과 비슷했다. 그리고 어쩌면 서로가 가지고 있는 마음속의 상처를 알아차린 순간이기도 했다.


“첫 번째 아이의 태명은 행복이였어요. 남편이 지었어요.” 베이지가 말하며 그레이를 바라봤다.


“아이를 가진 아내가 너무 행복해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지었어요. 행복하게 태어나라는 뜻도 담아서.” 그레이가 말했다.


“그래서 아이가 행복하게 태어날 줄 알았어요.” 베이지가 말하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티슈를 뽑아 베이지에게 건넸다. 베이지는 오른손으로 티슈를 받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두 번째 아이는 쑥쑥이로 지었었어요. 남편이 엄청 커다란 고구마를 쑥 뽑는 꿈을 꿨다고 했거든요.” 베이지가 말했다.


“맞아요, 진짜 엄청 커다란 고구마가 한 번에 쑥 나왔어요.” 그레이가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다 베이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태몽과 태명 이야기를 하며 울고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귀엽고 애틋하게 보였다. 마치 물건을 정리하다 오래전 찍은 사진을 찾아낸 것처럼 반가운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웃으셨어.” 베이지가 말했다.


“두 사람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자신이 꿨던 꿈을 생각했다. 남자는 감나무에 열려있는 커다란 감을 땄다. 자동차 바퀴만 한 크기의 감이었다. 반으로 가른 감 안 에는 농구공 만 한 옥구슬이 들어있었다. 두 손으로 옥구슬을 들었더니 표면에 금이 가며 빛이 새어 나왔다. 쩍 하고 갈라진 옥구슬 안에서 눈 뜰 수 없이 밝은, 푸른색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저는 태명을 푸름이라고 지어줬어요. 꿈에 푸른빛이 나왔거든요.” 남자가 말했다.


“예쁜 이름이네요. 빛이 이 도자기 같은 색이었나요?” 베이지가 파란색 도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근데 이거보다 더 연한 푸른빛이었죠.”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이 도자기 정말 저희가 받아도 될까요?” 그레이가 말했다.


“네, 가져가요. 어차피 버리려고 했으니까.” 남자가 말했다.


“괜찮아, 우리가 가져가서 소중하게 보관하자.” 베이지가 말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소중하게 보살펴주세요.” 남자가 말했다.


세 사람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뚝 뚝 뚝 뚝.


“잠깐, 음악 좀 들을 까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베이지와 그레이 그리고 자신의 컵에 부었다.


“어떤 음악이요?” 베이지가 말했다.


“레코드 들어본 적 있어요?” 남자가 말했다.


“레코드면 엘피판이죠?” 그레이가 말했다.


“맞아요, 엘피.”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안방에서 턴테이블을 들고 와 식탁에 올린 뒤 전원을 연결했다.


“먼지가 많이 앉았네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작은 페인트 붓을 들고 와 턴테이블의 먼지를 털어냈다.


“스피커에 연결은 안 하나요?” 그레이가 말했다.


“이거는 블루투스로 연결하는 거라 괜찮아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냉장고 옆에 있는 네모난 박스처럼 생긴 물건에 전원을 올렸다.


“그게 스피커였어요?” 베이지가 물었다.


“네, 그렇게 안 보이죠?” 남자가 몰랐다.


“전혀 몰랐어요.” 그레이가 말했다.


스피커에서 연결 음이 들려왔다.


“연결됐네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고 이번엔 종이박스를 가지고 나왔다. 박스를 턴테이블 옆에 둔 남자는 두 사람에게 레코드를 골라보라고 말했다. 그레이는 박스에 담긴 레코드를 하나씩 넘겼고 베이지는 넘어가는 레코드를 보고 있었다.


“이거.” 베이지가 말했다.


그레이는 종비박스에서 레코드를 꺼냈다.


“프랭크 시나트라?” 그레이가 말했다.


“응. 프랭크 시나트라.” 베이지가 말했다.


그레이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레코드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종이 슬리브 안의 레코드를 조심스레 꺼내 턴테이블 위에 올린 뒤 부드러운 브러시로 레코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레코드를 돌렸다. 돌아가는 레코드 위로 바늘이 올라갔다. 스피커에서 레코드판에 바늘이 긁히는 소리가 잠깐 나오더니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곡 제목이 뭐예요?” 베이지가 말했다.


베이지의 말에 남자는 종이 슬리브를 돌려 뒷면을 봤다.


“댓츠 라이프.” 남자가 말했다.


“댓츠 라이프?” 베이지가 말했다.


“댓츠 라이프?” 그레이가 말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프랭크 시나트라의 목소리는 ‘인생은 그런 거지’라고 노래했다. ‘인생이란 4월에는 올라갔다 5월에는 다시 추락하는 것. 그리고 다시 올라가는 6월엔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 하지만 영어에 서투른 세 사람은 가사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 세 사람이 알아들은 가사는 겨우 ‘인생은 그런 거지‘라는 말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내용 하나 만으로도 세 사람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다. 각자가 겪은 비슷한 고통들이 그 음악으로 인해 연결되어 서로의 아픔이 공유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각자가 느끼는 뜨겁고 차가운 온도가 모두 다르듯이 세 사람도 제각각 다른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는 의욕을 잃고, 누군가는 상실감에 고통받고, 누군가는 상실감에 고통받는 사람의 모습에 아파하는, 비슷하지만 다른, 다르지만 비슷한, 닮았지만 닮지 않은 서로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세 사람은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금 이 공간에 있는 서로는 분명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음악이 멈추고 턴테이블이 틱, 소리를 내며 멈췄다. 다시 정적이 흘렀고 뚝 뚝 뚝 뚝, 물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감사해요. 저희는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베이지가 일어나며 말했다.


“네, 배웅해 드릴게요.” 남자도 일어나며 말했다.


베이지와 그레이는 현관으로 향해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남자도 두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갔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머물고 있었다. 그레이가 버튼을 눌렀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 그레이와 베이지는 각각 흰색과 파란색의 화분을 들고 있었다.


“종종, 놀러 와도 될까요?” 베이지가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4층을 지나고 있었다.


“네, 놀러 오세요.” 남자가 말했다.


“화분은 정말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남자가 말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세 사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평생 버릴 수도 채울 수도 없는 텅 빈 상자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엘리베이터는 7층을 지나고 있었다.


“그럼.” 베이지가 말했다.


“그럼.” 그레이가 말했다.


“그럼.” 남자가 말했다.


비슷하지만 다른 여섯 개의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엘리베이터는 8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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