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1867)
인간은 보고 싶은대로 본다. <테레즈 라캥>은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보고 싶은대로 보는 일은 우리가 가장 쉽게 성취할 수 있는 '가까운' 욕망일 지도 모른다. 이는 다른 것들에 비해 쉽고 간단하면서도, 생존과 더 '가까운' 욕망이기도 하다. 그것이 악하다거나, 잘못이라는 그 어떤 가치평가를 내리고 싶지는 않다.
<테레즈 라캥>에선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타인을 바라보는 이가 없다. 미쇼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라캥 부인을 위로한다는 핑계로 그곳에 왔지만, 이제 그런 위선을 집어치우고 도미노를 즐기러 올 수 있었다”는 것처럼, 로랑과 테레즈를 결혼시킨 뒤 안정을 되찾은 라캥 부인을 보고 편하게 모임에 올 수 있게 되어 기뻐한다. 이 친목 모임에서의 화목은 헛치레와 같은 것이다. 친밀은 관심을 일정 부분 기반으로 한다.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에게 보다 쉽게 관계를 이뤄갈 수 있고, 서로 관심을 가졌을 때 친분을 쌓아갈 수 있다. 이 모임에서, 아니 이 소설에서 친밀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해 관계를 충족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붙어있을 뿐이다.
라캥 부인은 "조카딸을 수호천사로서 자기 아들에게 선물"하려는 마음으로 테레즈를 계속 맡았다. 라캥 부인은 그 욕망대로 테레즈와 카미유를 결혼시켰고, 그 둘이 진정 서로를 원하는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만족스럽게 그 둘을 볼 수 있으면 족했다. 카미유는 "젊은이로서의 강렬한 욕망이 없었"는데, "쇠약한 몸"을 지녔고, "무기력한 젊은이"였기 때문에 "그 어떤 욕망이 제 안에서 들끓는" 로랑에게 호의적이었다. 로랑이 가진 욕망의 가치가 어떻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는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그 결여가 어느 정도 채워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로랑의 욕망은 게으르고, 또 어쩌면 불량한 성품에서 기이한 것이라 그 어떤 가치를 띄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카미유는 그 욕망의 표면적인 생명력만을 바라보았음이 안타까운 지점이다.
카미유는 목적이 어땠든 간에 로랑에게 잘 대해주었고 위와 같은 관계는 현재 우리의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관계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형태이다. 카미유와 로랑은 상부상조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카미유의 호의가 로랑에게 올곧이 작용하였다면. 로랑은 카미유의 쇠약함만을 바라보았기에 그 호의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위한 수단으로 카미유를 이용하겠다는 마음에 힘을 실어 줄 뿐이었다. 로랑은 호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카미유를 살해하는 것에 다다른다.
돌아와서 라캥 부인과 테레즈 사이의 작용-반작용은 예측 불가도 아니고 안타깝지도 않다. 라캥 부인은 테레즈를 양육했다는 이유로 테레즈를“물건”처럼 바라보았다. 유년기부터“강철처럼 튼튼했”으며, “파도를 정복할”생각을 하는 “불꽃”같았던 테레즈를 “허약한 아이처럼 돌보”았다. “자기가 죽으면 테레즈가 간호사로서 자기 아들을 돌보기를 원했”기 때문에. 유년기 시절 뿐 아니라 퐁-뇌프 소로로 이사할 때 “두 명 다 테레즈에게는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라캥 부인과 카미유는 테레즈를 꾸준히 한 개체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테레즈가 카미유에 걸맞게끔, 자신이 보기 좋게끔 자리하면 될 뿐이었다. 테레즈에게 진정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라캥 부인은 이러한 작용의 반작용으로써 테레즈의 억압된 욕망이 터지게 된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부재가 존재에 끌리는 것처럼, 억압은 더 강한 욕구로 이어진다. 이는 모순적이면서도 굉장히 본능적인 인과관계이다. 에밀 졸라는 테레즈의 욕망이 터질 수 밖에 없었음을 그녀의 성장 배경과 현재의 생활에 통해 비교적 상세히 묘사한다. 테레즈와 로랑은 함께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 전사에 차이를 분명히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범죄에 대한 판단 역시 각자의 몫이다. 독자들은 각자의 욕망에 따라서 각자의 삶에 더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이 둘을, 이 살인을 평가할 것이다. 테레즈와 로랑 중 누가 더 죄질이 무겁냐 같이 무게를 따지는 일은 아니다. 테레즈와 로랑 각자의 전사는 분명 다르지만 카미유가 그 둘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둘은 ‘죽음’이라는 같은 집행을 받는다.
여기서 이 ‘죽음’에 대한 시각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다. 테레즈와 로랑은‘죽음’이라는 같은 형에 처했지만, 필자는 이 형이 진정한 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테레즈와 로랑은 “이제는 정말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죽음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이 묘사를 미루어 보아, 에밀 졸라 또한 그들에게 죽음이란, 형벌 보다는 피신에 더 가깝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라캥 부인은 “다음 날 정오가 될 때까지 열두 시간가량,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는 듯”테레즈와 로랑의 시체를 바라본다. 라캥 부인은 모든 진실을 알고 실의에 빠져 굶어 죽으려고 했지만 이내 테레즈와 라캥이 불행해지는 모습을 봐야겠다는 의지로 생존했다. 그런 라캥 부인에게 그 ‘죽음’이란 만족스러운 형벌이었나 보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것이 라캥 부인을 살렸기 때문에.
우리가 타인을 바라볼 때, 그 타인의 속내를 단번에 알 수 있는 능력같은 건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타인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 나와 똑같이, 어쩌면 더, 복잡하고 각자의 욕망을 갖고 생을 견디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 저마다의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가까운 욕망에 좌우되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타인의 욕망을 배제하고 나의 욕망만을 앞세워 타인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은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짐승이 되겠다는 것과 같다. 아, 짐승이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고 짐승 또한 다양하니까 정정한다. 나의 욕망만을 앞세우는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추하다. 추한 인간은 그나마 작품 속에서만 용인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