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동경소년(2010)>, 정용준<가나(2011)>
존재란 무엇일까. 존재는, 실체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아니 증명이 가능은 한가. 존재는 무 엇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까. 이 확인에 의미는 있을까. 이장욱의 <동경소년>과 정용준의 <가나>에 서는 이처럼 존재하고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는 이들을 비춘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존재의 의 미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특히 환상을 통해 존재의 희미함을 강렬히 드러낸다. 역설적이게도.
<동경소년>에서는 한 비운의 추리 소설 작가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여행 온 추리 소설 동호회 의 사람('우리')들이 호텔에서 미스테리한 청년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들은 그 청년을 통해 그의 애 인인 '유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유끼’는 특별하리만치 존재감이 없다는 게 특징인데, 이내 그 녀의 몸이 그녀의 존재감처럼 사라져간다. '유끼'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유끼’의 존재 를 확인하기 위해, ‘유끼’가 태어난 일본에 왔다고 청년은 말한다. '우리'들은 자꾸만 사라지는 '유끼' 란 존재가 환상인지 실존인지에 대해 좇게 된다.
<가나>는 사멸하는 시체의 해중고혼이다. <가나>의 '나'는 일 년에 한두번 쯤은 고향에 닿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2년 동안이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 한 채 배에 갇혀있다시피 타있어야만 했다. 무 의미함과 지루함, 우울함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밤마다 들려오는 바다의 노래를 이겨내는 힘을” 길렀지만 그 가 잡은 줄의 매듭이 풀려 허무하게 죽게 된다. <가나>에서는 이런 ‘나’의 주마등과 같은 과거에 대 한 회상과, 현재의 '나'의 시신이 해쳐지는 과정이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으로 서술된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 그러면 생각하는 넌 남을 거 아냐!" <동경소년>의 화자인 청년, '나'의 울부짖음에도 사라져가는 중인 '유끼'와, 부패한 시신에서 분리된 채 강하게 사유하는 영혼인 가나의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두 작품에서 '사유하는 나'만은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코 기토의 원리는 사유하지만 사라져가는 '유끼'와, 육체가 죽었음에도 사유하고 있는 <가나> 속 '나'와 함께 무너진다. 이처럼 존재함에도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존재들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를 증명해 야 하나. 그 존재는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사멸과 관계
"사멸하는 것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나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만큼 악취가 심 한 것은 없습니다." 사멸을 체험해보았다고 말하는 <동경소년>의 '나', 자신이 사멸하는 과정을 지 켜보고/경험하고 있는 가나의 ‘나'. 이 두 명의 사멸 중인 남성 화자에 대해 먼저 말문을 떼고자 한 다. 영원을 경멸하는 마음이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민해봐야 할 지점은 앞 문장. '사멸하는 것만이 아름답다'는 말은 왜 뱉게 된 것일까. <동경소년>에서 사멸해가는 존재는 '유끼'이다. 이 말 이 비단 '나'가 '유끼'의 아름다움을 칭예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답다는 건 무 엇을 뜻하나.
일반적으로는, 악취는 사멸하는 시체에서 나기 마련이다. <가나> 속 '나'의 사멸에 대한 환상은 처 절히, 자세하게도 묘사가 된다. 인간이 쉽게 먹는 것이었던 갈치가 자신의 살점과 내장을 뜯어 먹는 것을 느끼며, 몸이 짓눌리고 푸른 가스가 피어오르다 결국 제 것이 아니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나 생생하게 담겨있다. 이토록 생생한 사멸의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주관적이고도 입체적인 가치이다. 몇 명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한 단어로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그 사람 수만큼의 다양한 단어들이 튀어나올 것이다. 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아름다움의 가치로 작용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을 <동경소년> 속 '나'에게 적용해 봤을 때, ‘나’에게 중요한 가치란 ‘존재’가 아닐까. 그와 ‘유끼’는 존재하고자 일본에 찾아왔다.‘유끼’ 의 적은 존재감에 분노하는 ‘나’를 통해, 우리는 ‘나’가 같은 위험에 처해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소 설에서 그들의 가장 큰 목표는 서로가 존재함으로 서로의 존재를 지켜내는 것뿐이다. 따라서 재정 의해보자면, 사멸하는 것만이 존재할(아름다울) 수 있다. <가나> 속 ‘나’의 죽음의 과정을 다시 살펴 보자면, '먹힘'이나 그 시체의 냄새와 같은 것들은, '나'의 신체, 그 실재와 그 물질성을 되려 감각하 게한다.즉이사멸은그가존재했음에대해감각하게 하는것이다.이사멸들은자신의존재를절 박하게 외치고 있으며, 이 사멸의 환상은 감각을 자극하여 그들의 존재를 부각한다. 이 두 소설에서 는 사멸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절박하게 알리고 있다. 또한 사멸의 자리에는 무언가가 남기 마련이 고, 그 남은 것의 존재 또한 부각될 수 있다. 남은 존재들은 무엇일까.
말과 관계의 존재
<동경소년>과 <가나> 속 두 화자 ‘나’들은 ‘말'을 하고 있다. ‘말’은 남아서 그 자리를 지킨다. 쇼파 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무대처럼 말하고 있는 <동경소년>의 ‘나'는 유끼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뒤 ‘유 끼’가 존재했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유끼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가나> 속 ‘나’는 죽어서 ‘말’하고 있다. 이 혼의 독백은 너무나 생생하게도 존재하고 있다. 또 하나 의 공통점은, 이 두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시종일관 자신의 말로, 다른 이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사멸의 과정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돌이킬 법도 한데 이들의 ‘말’ 에서는 1인칭 주어 보다, ‘유끼는’, ‘하비바는’, 이라고 시작하는 문장들이 즐비해있다. 자신이 아닌 대상에 대해 이렇게나 자세히 낱낱이 ‘말’ 할 수 있음을 통해 그 안에 자리한 사랑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토록 사랑하는 이에 대한 회한을 가득 늘어놓는 이들의 '말'은 오직 '유끼'와 '하비바'를 위 해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정말 이 말의 존재들이 ‘유끼’와 ‘하비바’만 설명하고 있지는 않 다.
<동경소년>에서, 동네의 구립도서관에서 "아무도 나 같은 인간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자신의 사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멸 직전의 '유끼'를 보자마자 "같은 종족"임을 한 번에 알아차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멸하고 있는 존재는 비단 '유끼'만이 아니다. 환상으로 사멸이 가시화된 대상이 ‘유끼'였을 뿐. 이는 존재의 사멸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화자 와 직접적으로 관계한 사람을 통한 환상과 대상화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나’ 의 ‘말’엔 ‘유끼'와의 ‘관계’가 존재하고, ‘유끼'와의 관계엔 필연적으로 '나'가 존재한다.
<가나>의 '나'를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나'는 “아랍계 외국인 노동자” 쯤으로만 정의된다. '나 '는 사멸하는 시체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하비바'를 통해서 그가 감정을 느끼며 살아있는 ' 존재'였음이 절절하게 전달된다. ‘하비바’와의 관계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고서는 그가 카밀라란 여 성을 사랑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가 카밀라란 여성을 사랑했으나 그녀가 삼촌이 랑 결혼했다는 사실은 ‘나’ 역시 ‘하비바’만큼이나 무력한 존재였음을 설명해줄 수 있다.
우리는 <동경소년>의 ‘나’가 쇼파에 앉아서 하는 ‘유끼’에 관한 ‘말’을 통해 그 둘의 관계를 비롯한 ‘나’의 많은 정보들을 절로 읽어내게 된다. 또한 <가나>의 '나'와 '하비바'의 관계를 통해 썩어가는 시 체일 뿐인 '나'의 생전을 그려볼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사멸이 역설적으로 존재를 부각한 것처럼 타 인을 통해 본인의 존재 역시 선명하게 부각된다. 타인에게로 향하는 말을 통해 화자와 주어 사이의, 그 문장 안의 ‘관계’를 자연스레 읽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문장들은 어둠 속에서는 빛깔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만 발생한다.”1는 이장욱의 말처럼, 그 빛깔은 관계를 통해 찾게 되어 서 로의 존재를 부각한다.
1 이장욱. "슬프고 희미하고 신비로우며 인생 그 자체와도 같은." 문학동네 26.3 (2019): 1-5. 2/4
하지만 이 ‘말’로 다른 관계 또한 발생한다. 이 글의 앞에서 [사랑하는 이에 대한 회한을 가득 늘어 놓는]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들의 ‘말’이, 그 관계가 회한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왜인지 동경소년 의 '나'는 자책섞인 목소리로 자신은 왜 유끼를 죽였을까 혼란스러워하며, <가나>의 '나'는 ‘하비바’ 에게 느낀 부끄러움과 아쉬움을 변명하듯 늘어놓을까. 아니, 왜 그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소리치고, 폭력을 휘둘렀을까.
여기서 필자의 개인적 견해를 늘어놓겠다. 필자는, 완강하게, 이유 있는 폭력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두 텍스트 안에서 두 작가가 이 두 화자를 그린 따뜻한 시선을 읽어내었기 때문에 화자들 이 ‘유끼’와 ‘하비바’에게 가한 폭력에 대한 의미 해석을 시도했으며, 그 ‘시도’를 단순 공유하고자 한 다. 이러한 폭력에 담긴 의미 및 폭력의 상징 등을 긍정하는 입장은 아님을 미리 밝힌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왜 이들이 사랑하는 이에게 폭력을 행사했을까. 이 이유 또한 ‘말'에서 출발 한다. 1차적 이유는, 심리적이고 본능적인 측면이다. 앞서 서로가 서로의 설명이 되어준다는 것은, 즉 서로가 서로에게 투영되는 존재이다. 즉, 소설 속 화자인 ‘나’와 ‘유끼’, ‘하비바’는 각자 동일시 되 는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력감이 자욱한 인물들에게 자기혐오의 표현으로 폭력을 휘두르 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구시대적이다.
이보다도 명확하고 씁쓸하게 드러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화자와 대상 에 관한 관계를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관계의 기저에 ‘권력 관계’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이는 ‘말’의 능력 보유 유무로 나누어지는 ‘권력 관계’이다.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결국 우위에 위치하게 되는. 그러니까 사실, 이 두 소설의 화자들은 처음에는 ‘유끼’와 ‘하비바’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떤 계기 이전까지.
<동경소년>의 ‘나’가 ‘유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지점은, “일본에 가볼까,” 하는 ‘유끼’의 말에 왜 당황했을까?란 의문에서 출발했다. 왜 당황했으며, 왜 ‘유끼’에게 가지 말자고 회유했으며, 왜 “미친 듯이 소리”까지 질러야만하는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여기 서 앞서의 분석들을 되짚어본다면, ‘나’는 ‘유끼’를 통해 자신을 본다는 전제를 이야기했다. 이는 ‘유 끼’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 선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화자는 그러지 않았다. ‘유끼’를 “너 무 희미하고 작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나는” 벌레에 비유하고, 그 때문에 “화가 날 때가 있”다는 것은 결국 그 벌레가 자신이라는 것으로 무의식은 중에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끼’ 존재의 인 정은 결국 그것, 자신은 벌레라는 것을 긍정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동경소년>의 ‘나’는 ‘유끼’의 존재를 발견해준 최초의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 았다. 소설의 여러 묘사들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끼’는 화자로부터 철저하게 대상화되었다. “순결하고 희미한 눈”과 같이 어여쁘게, “나에게서 떨어지면, ‘유끼’ 스스로도 자기 자신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유일한 존재로. 그렇기 때문에 ‘유끼’가 능동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잃 지 않고자 하는 의지가 섞인 “일본에 가볼까,”란 말에, 화자는 크게 당황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일 본에 가기로 선택했을 때야 비로소, ‘나’는 ‘유끼’의 존재를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 ‘나’는 “내가 그 벌 레에게 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라는 말로 부정하기는 하지만.
<가나>의 경우는 더욱 분명하다. 어린 ‘하비바’를 보듬어주기는 커녕 ‘하비바’를 무시하고, “적의” 를 가진 ‘나’ 역시, ‘하비바’에서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카밀라’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그녀의 삼촌과 결혼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과, 어린 나이에 무력하게 시집 온 ‘하비 바’에게서. 그렇게 ‘하비바’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던 ‘나’는 ‘하비바’가 “트렌지스터 라디오”를 지키기 위한 행동을 했을 때야, 그녀의 존재를 일순간에 강렬히 느끼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는 “지독한 부 끄러움을 느”끼며 ‘하비바’를 존재로, 아내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나서야 ‘하비바’의 다른 소통 수단들, ‘시타르’ 역시 받아들인다. 존재의 가능성은 이처럼 무한하다.
출처의 관계, 마음의 관계
‘유끼’는 한국인인 어머니, 일본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느 국가에도 정착하지 못 하고 국가를 옮겨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곳은 러시아, 그리고 어머니는 죽기 전 자 신을 일본인이라고 소개했다. 일본인인 아버지는 서울에서 자살했고, 종국에 '유끼'가 사라진 곳은 곳은 중국인 술집이다. 이 어디서 와서 어디서 사라졌는지도 모를, 출처 불명의 여성 '유끼'는 사람 들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사람이다. 자동문의 붉은 센서만이 '유끼'를 인식하고 있다. <가나> 속 ‘나’, 그의 죽음에 그는 '아랍계 외국인 노동자' 쯤으로만 정의된다. 기다리는 아내와 아들이 있음 에도 행려병자로 분리되며. 그가 살아있을 때의 취급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게는 출발점이자 절 실히 돌아가야할 ‘육지’임에도, ‘육지’는 그를 철저히 이방인 취급을 하고 견디기 어려운 눈빛으로 그 를 소외시킨다. “사랑받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의 아내 '하비바'도, 그들(A,B,C)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이국적인 옷'을 입고 있는 여자아이일 뿐이다. 이토록 출처 분명, 존재 불명의 사람들. 출 처, 그들의 시작점은 그들을 설명해지도, 존재를 긍정해주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진정 존재를 긍정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말’을하는행위와듣는행위로생겨나는관계는꼭앞서언급했던사멸,말의유무, 타인의존재 인정 등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경소년>의 추리소설 동호회 사람들은 그렇게나 긴 ‘유 끼’의 서사를 듣고도 코웃음을 친다. 이는 ‘와따나베 포우’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와 일맥상통하게 된 다. 그의 걸작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그의 인생이 평탄하고 평범했다는 이유로 실망하는 그들은, 도대체 ‘와따나베 포우’에게 무엇을 기대한 걸까? 그들은 어째서 <동경소년>의 이 평범한 청년에게 ‘와따나베 포우’에게 기대한 것과 비슷한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한 걸까. 누가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기대의 짐을 지게할 권리를 주었을까. 어쨌든 이들은 이 청년에게 오만한 기대를 걸었고, 오만한 실 망을 느꼈다. 이들은 <동경소년> ‘나’의 말을 들었지만 진정 듣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우 산을 쓰고 가는 ‘유끼’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반면 <가나>에서 시체를 수습하던 사람들(A, B,C)는 그의 국적도 파악할 수 없고, 그의 이름도, 존재도 알 수 없으며 그의 고혼을 당연히 들을 순 없었지만 듣고자 했다. 손에 땀을 쥐고, 입술을 깨 물기도 하며 '인간'에 대한 존재의 자각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사진을 간직해주고, 재를 바다 에 뿌려주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듯한 추모의 행위를 했다. 이 애도 행위 덕택에 '나'는 사 랑하는 아내인 하비바의 곁으로 자유로이 날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와 대조되게 <동경소년> 에서의 동호회 사람들은 모든 것을 들었지만 그들의 존재를 거부했기 때문에 끝까지 ‘유끼’의 존재 를 보지 못 한 것만 같다. 기본 윤리를 바탕으로 한 연대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과 그렇 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의 존재는 보이기도, 보이지 않기도 할 것이다.
나를 설명하는 관계들에 대해서 떠올려본다. 나는 나에 대해 스스로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설명이 될 수 있다. 내가 사멸했을 때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관계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통해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나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는 가정이 사 실이어야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타인을 대할 때도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담아, 서로 의 존재를 확인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기억되었을 때만 내가, 네가, 우리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