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몽타주 연구

by 신호수

린 램지의 <케빈에 대하여>는 내가 몽타주 수업 초반에 ‘함께 감상하고 싶었던 영화’로 제출했던 영화이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 고등학생 무렵, 영화 블로그에 들어가 ‘볼만한 영화 리스트’에서 이 영화를 찾아 방구석 감상을 했다. 처음 감상했을 때는 색채 이미지가 반복됨에 매료되었다. 솔직히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내용의 반쯤을 겨우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러한 이해의 결여는 재관람의 원동력이 되어 필자는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봤다. 보고 나면 기운을 빼앗기는 강렬한 스토리여서 늘 긴장을 늦추지 않은 상태로 관람을 임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 관람을 거듭할 수록 더 좋아졌던 이유는 감정적인 부분에서 찾았었다. 인물들의 감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감독의 의도하는 바를 잘 따라가고 있음에 희열을 느꼈다. 그렇다. 필자는 그동안 감정적인 몰입에 완전히 의존하여 영화 감상을 해왔다. 이번에 그것에서 벗어나, 감독이 관객의 감정적인 몰입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들과 ‘기술’들을 좇으며 감상을 시도해보았다.

영화는 ‘에바’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필자는 이전에 몰입의 대상을 번갈아가며 감상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즐겼다. 즉 처음 관람 할 땐 에바에게, 두 번째 관람할 땐 케빈에게 의도적으로 집중을 쏟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본인의 의지를 섞지 않고 감독의 흐름을 타고자 했다. 이렇게 하니, 관객들이 에바에 대한 이입을 아주 충분히 할 수 있는 장면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이는 쫓겨나는 듯이 퇴근하는 에바 앞에 할로윈 데이 코스튬을 한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던 장면이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붉은 빛이 주변에 흩뿌려지고, 에바의 얼굴을 덮기도 한다. 평화롭고 귀여운 멜로디의 음악과 할로윈 데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그저 행복한 한 때를 표현하기 위한 장면으로 쓰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에바의 표정과 눈이 교차되면서 불안함과 섬뜩함이 극대화된다. 이때 나오는 음악은 예고편에 쓰이기도 하여 꽤나 핵심적인 트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신은 결국 날 사랑하게 될 거야.’라는 가사가 반복되는데 이에서 오는 기괴함으로 공포 유발에 박차를 가해준다. 픽스 되어있지 않은 카메라는 거칠게 행렬을 비춘다. POV샷으로 차 안에서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 에바가 마구 떨리는 것을 카메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는 차 밖의 코스튬한 인물들을 카메라가 집요하게 따라가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겁을 주려는 젊은이들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음악과 겹치는 등 계속해서 공포를 쌓아간다. 겨우 도착한 에바의 집은 여전히 붉은 페인트를 다 벗겨내지 못 한 상태이다. 여기에서 사실상 더욱 불길하고 꺼림직한 것은 코스튬을 한 젊은이들 보다도 에바의 집이다. 그럼에도 보는 이들은 에바에 동화되어 붉은 칠이 칠해진 집을 보고 안도를 느낄 수 있다. 이내 사탕을 받으러 온 아이들의 독촉에 공포는 다시 심화되는데, 아이들이 마구 흔드는 후레쉬 조명과 손 그림자에 휩싸인 에바의 모습을 보며 혼돈을 느낀다. 그리고 이때 “싫어, 싫어.”라는 과거의 어린 케빈의 목소리가 들어오며 ‘현재’의 사탕 달라는 아우성과 겹쳐진다. 어린 케빈이 말하고 있지만, 현재 에바의 심정과 동일하다. 이 귀갓길 할로윈데이의 밤 거리 장면은 꽤나 긴 시간동안 끌고 간다. 이전의 관람들에선 이 장면이 불필요하게 길다고 느껴졌는데 지금에 와서 다시 보니 조명, 카메라, 몽타주, 사운드 등을 총동원하여 에바에 대한 이입과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차곡차곡 쌓은 장면이었다.

영화는 꾸준히 과거에서 현재, 다시 과거, 다시 현재를 계속 교차하며 중첩시키는 식으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의 장면을 마구 뒤섞어 몽타주를 만들어낸다. 사운드도 역시 이와 같다. 현재의 불행한 장면에 과거에 행복했던 소리를 중첩시키며 과거로 넘어가거나, 그 반대로 영화를 계속 진행시켜 나간다. 앞에서 묘사한 장면에서도 어린 케빈의 목소리가 들어오면서 당시의 과거 장면과 현재의 사운드와 장면이 중첩되며 전개된다. 그 과거의 장면에서는 노란 액체가 담긴 그릇이 던져지는 이미지와 에바가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라고 말하는 장면까지 번갈아가며 나온다. 이는 에바가 당시에 화났었던 이유를 뒷받침해준다. 주목해볼 점은 앞서 말했듯이 “싫어, 싫어.”라고 말하는 과거의 케빈과 현재의 에바의 심정이 맞물리면서도 과거 에바에게 폭언을 들었을 때의 케빈에 마음 역시 현재의 에바만큼 공포스러웠음을 알게 해준다. 결국 과거와 현재의 교차를 통해 케빈에 대한 오해 일부분 설명을 해주는 기능이기도 하다.

몽타주의 기능과 강렬함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케빈이 리치를 입 안에서 굴리는 것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동생 실비아가 한 쪽 눈을 잃은 시점에서, 눈을 연상시키는 리치를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탁월하고, 케빈이 원래 리치를 싫어했다는 설정까지 매끄럽다. 리치 껍질을 까는 소리에서부터 리치가 입 안에서 터지는 소리까지 보여주며 섬뜩함을 극대화한다. 이 몽타주로 인해 관객은 실비아의 눈을 다치게 한 것이 케빈이라는 에바의 의심에 동화되어 강한 불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케빈이 실비아를 다치게 했다는 근거가 없다. 장면에서의 언급이 없을 뿐더러 실제 원작 소설을 보면 더욱 모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철저히 에바의 시점을 따라가게끔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은⏤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쉽게 케빈에 대한 의심을 떨치기 힘듦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제작자가 관객을 조작, 유도하는 요령에 대해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전개를 관객의 몰입과 상상에 전가하는 식으로 영화를 구성해가는 기술을 통해 영화를 더욱 수려하게 만들어내기도 했다. 에바와 그의 새 직장에서 에바에게 집적거리는 남직원과의 관계에 대한 장면에서 이러한 섬세함을 찾을 수 있다. 남직원은 시종일관 에바를 응시해왔다. 얼마 후 업무 중에 에바가 막히는 부분을 그 남직원이 알려준다. 여기서 책상에 앉아있는 에바와 서 있는 남직원을 바스트 샷으로 담으면서 둘의 손을 의도적으로 잘라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그 남직원이 불필요하게 에바의 손을 만지고 있음을 상상하게 된다. 이는 희롱을 직접 마주하는 것 보다도 더한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바로 다음 장면으로 과거에 에바와 프랭클린의 성관계 묘사가 나와 그 상상의 타당성까지 부여해준다.

쌓여있는 붉은 물건들, 딸기잼, 와인 이러한 붉은 이미지들, 그리고 가면과 거실에 걸려있는 명화 등의 미쟝센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 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티셔츠에 대한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 케빈의 정신적인 미성숙과 관심 갈구에 대한 티셔츠 말고, 영화 후반부에 에바가 입고 있는 오버 사이즈 티셔츠다. ‘레드 제플린’이 크게 써져있는 이 밴드 티셔츠는 에바의 캐릭터에게 조금 생뚱맞게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이내, 곧, 에바는 그 오버 사이즈 티셔츠를 끌어올려 얼굴을 묻고 운다. 이 장면의 바로 직전, 프랭클린과 실비아가 죽은 것을 발견한 에바가 옷에 피가 범벅인 상태로 망연히 침대에 쓰러지듯 눕는 모습이 나온다. 즉 이를 통해 어울리지 않았던 티셔츠가 프랭클린의 것이라는 게 확실해진다. 물론 필자는 해석의 선후가 바뀌었지만, 가슴 절절한 이미지의 나열 보다도 이처럼 간결하게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오히려 효과적이고 더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직전에 언급한 가족들이 죽은 것을 발견한 에바의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도 이 장면처럼 간결하다.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거나 하지 않아도 그저 피범벅된 옷과 망연한 표정을 통해 관객은 에바의 충격과 슬픔을 읽어낼 수 있다.

<케빈에 대하여>에서 다루는 비극의 시작은 두 모티브의 충돌이다. 우선 케빈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자위 행위를 할 때 에바의 눈을 피하지 않았거니와 그는 아버지를 죽였다. 그리고 에바에게는 맥베스 부인 모티브가 묘사된다. 에바는 벽에 칠해진 붉은 페인트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손을 씻는다. 페인트는 지워질 듯 말 듯 에바의 손에 달라붙어 있다. 즉 어머니를 손에 넣으려는 아들과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인 인물의 충돌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케빈’을 연기한 배우 이즈라 밀러는 케빈에 대한 해석으로 “매일 엄마를 마주하지만, 엄마에게 버려진 아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표현이다. 위 영화는 이러한 비극을 과거와 현재를 혼란스럽게 오가는 몽타주로 서술한다. 이는 강렬하고 효과적이다. 린 램지 감독의 영화에서는 이와 같은 서술 방식을 보다 잦게 볼 수 있다. 다른 영화인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도 주인공 과거의 트라우마를 설명하기위해 주인공의 자학성의 장면을 영화 사이사이에 무심히 삽입시켜 설명해낸다. 그 일정한 패턴은 있으나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려는 관객들이 볼 때는 불친절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캐릭터를 빈틈 없이 효과적으로 설명해주어 오히려 친절한 쪽에 가깝다. 구태여 상황을 전부 나열하지 않아도 사운드를 통해서나, 연속되는 장면을 쌓아 묘사하는, 더 없이 매끄럽고 세련된 방식이라고 느꼈다. <케빈에 대하여>를 열렬히 좋아하던 과거의 필자는 영화를 코빼기도 모르면서도 린 램지의 기술력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감독의 영화 전개 방식에 감탄을 하면서도 왜 감탄하는지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 해 갑갑했었다. 이번 감상문을 통해 그 탁월함에 대해 기술할 수 있어 기쁜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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