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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Jul 13. 2023

어떤 사치

에세이_일

지난번에는 글쓰기 모임을 신청하는 대신 6만 2천 원짜리 립스틱을 샀다.

립스틱이 너무 갖고 싶어서는 아니고, 

여느 때와 같이 느지막이 신청하려다 이미 만석이라는 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왠지 공돈이 생긴 기분이라, 


‘그럼 이 소중한 6만 원을 어디다 쓸까?’ 하다, 


정말 공돈으로 알고 바로 이를 고민하는 스스로에게 기겁해 버렸다.     


‘사실 실업급여 수급자에게는 글방도 사치였지...’     


이렇게 단념하려 해도 품에 돌아온 6만 원은 

더욱 토실토실해져 머릿속을 즐겁게 헤매다 번쩍이고는 했다.      


‘좋아하는 모임에 두 번 놀러 갈까?
생필품을 사는 데 요긴하게 쓸까?

K랑 맛있다는 스페인 음식점에 가볼까?

이 기회에 비싼 과일이랑 버섯을 쟁여 놓고 먹을까?

좋아하는 핸드크림을 사둘까?’     


이를 고민하는 동안 6만 원은 진즉에 날아가 버렸을 테지만

즐거운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욱더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겨울 나는, 

아주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그래서 아주 광이 나는 사치를 부리고 싶어졌다.     



그런 사치가 가능한 곳은 백화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맘 같아서는 강 건너 온갖 것들이 다 있다는 백화점에 가야 하나 

설레발을 치고 싶었지만,

6만 원의 사치 스케일을 생각해서 동네 백화점으로 향했다.

누구의 생일 선물 구입과 같은 목적 없이 

백화점 1층을 둘러보는 기분은 새로웠다.

백화점에 가서 내 것을 샀던 일은 까마득하게 멀다. 

무거운 금색 문을 열자, 그에 맞는 묵직한 반짝임이 가득했다.

     

‘가만있자, 최근 백화점 1층을 와본 적이 언제였더라?’


4개월 전,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옛 친구의 생일을 제대로 축하해 주고 싶어 

큰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요즘은 생일이 되면 본인이 갖고 싶거나 필요한 것을 톡 까놓고 말하는 편이라

(사실 이게 편하다) 이런 선물 찾기 역시 어느새 낭만(?)이 되었다. 

다시 아는 건 많은데 돈은 없어, 선물 찾기에 진심으로 임하는 대학생이 된 듯했다.

먼저 학생 때도 그 자리에 있었던 익숙한 브랜드를 뒤지다가, 

주춤거리며 처음 봐서 유난히 반짝거리고 멀게 느껴지는 매장 앞을 어슬렁거렸다.

구찌 뷰티 매장이었다.     


‘30대가 되어도 이런 매장에 자연스럽게 들어가지는 못하는구나...’

이런 날 좀 제발 발견하고 말 좀 걸어 줬으면 했다.     


‘아니 근데 이제 구찌에서 화장품이 나오는구나!! 근데 그게 노원에도 있구나!!’     


그냥 봐도 예산 초과일 것 같기는 했지만 

마침 말을 걸어오는 점원분을 따라 발은 홀린 듯 안으로 향했다.

엄청난 서비스 마인드를 장착하신 점원분은 

나를 들이자마자 새로 나온 향수라며 시향을 준비해 주셨고 

머리 아프지 않은 향기에 경계가 풀린 나는 

학생 때와는 다르게 이것저것 질문도 해보며 반짝거리는 세계에 발을 담가 보았다.

사지도 않을 향수의 계절감을 물으며 시향 하고는, 

역시 괜히 사지 않을 핸드크림과 바디로션의 유무를 확인해 보았다.

(핸드크림은 아직 국내 미출시란다) 

그러다 예로부터 그나마 화장품 매장에서 저렴한 편이라 

보편적인 선물로 선호하는 립스틱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리고는 ‘인도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를 떠올리며 


“웜톤한테 제일 잘 나가는 제품이 뭐해요?”라고 나름 도도하게 물을 수 있었다. 


화장의 세계를 처음 알게 된 21살, 

엄마나 사촌 언니, 나보다 성숙한 친구들을 따라 백화점 화장품매장에 가면

나는 그들의 말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주변인이 되어 아예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얼떨결에 동행의 소비를 부추기는 역할을 맡게 되어 

점원분들에게 덩달아 샘플을 받고는 했었는데...

이제는 백화점 서비스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니! 

이것이 연륜의 힘인가 보다고 홀로 감탄했다.

(조금 전까지 한 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린 것 잊음)     



아무튼 그때의 번쩍거리던 자본주의적 감동이 사그라들지 않았는지,

나는 이번에도 자연스레 구찌 매장에 들어갔다. 

그 립스틱과 같은 립스틱은 아니지만 

나도 꽃무늬 케이스가 아주 탐나는 구찌 립스틱,

사실 그 화려한 껍데기가 너무 갖고 싶어 져 

충동적으로 나에게 그것을 선물하기로 했다.

몇 년 전부터는 되도록 사용하고 있는 물건은

‘비건, 업사이클링, 리사이클링, 친환경’ 등 류의 키워드에 맞게 사야 한다는 강박만 심해졌다.

이에 물건 하나를 살 때마다 드는 품이 커져 버려 

모든 과정이 버겁고 재미가 아닌 죄의식을 느끼곤 했는데 

충동이 이 모든 걸 지워 버렸다.

구찌는 저 위의 것들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되지 않는 물건이다.   

사실 사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나는 이 립스틱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발을 들이기 전 검색창은 이미, 

‘구찌, 물먹은 레드, 자연스러운 빨강, 립스틱’ 같은 것으로 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미 화장품 어플에 들어가 알레르기 성분도 확인까지 마친 상태다)

최근 어디서 ‘착한(?) 사람들’

(이라고는 말하지만 보통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 남 눈치 많이 보는 사람)은 

스트레스를 소비로 푼다고 하던데, 내가 딱 그 짝이었다.

이번엔 웜톤이 아닌 

자연스러워 많이들 산다는 물먹은 레드 색상을 손에 쥐었다.

그때 나는 오랫동안 이런 소비와 사치를 갈망해 온 듯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에 대한 찰나의 만족은 잠시, 

구찌 립스틱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무거운 물질이 되어버렸다.

사고 나서 보니 책상을 굴러다니며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용하고 있지 않은 다른 립밤이며 틴트들이 

눈에 선명히 띄기 시작했고, 

눈에 띈 김에 오랜만에 그것들을 사용할라치면 

구찌가 맘에 걸렸다.     


‘구찌 쟤도 저 꼴이 되면 안 될 텐데...

쟤는 소비기한 내 끝까지 다 쓰고, 

중간에 부러트리지도 않고 보내줘야 할 텐데...

자꾸 보니까 나랑 안 어울리는 빨강이네...

누가 봐도 자연스럽지 않은, 

그냥 립스틱 칠한 여자네...’


사고 나서 이리도 찝찝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치가 맞는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저것을 

그냥 립스틱이 아니라 자꾸 구찌라고 부르게 되었다.

내가 가진 구찌는 저 립스틱이 유일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걸 깨달은 지금 

다시금 아주 잘 알고 있는 다짐을 되뇐다.     


‘앞으로는 무언가를 배우고 경험하고 건강한 것을 먹는 데만 돈을 쓰자.

옷, 화장품, 가방, 지갑에 돈을 쓰는 건 지금 내 경제력에는 사치가 분명하다!’     


이렇게 호언장담 해보지만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혹해, 

금빛 충동으로, 할인 쿠폰으로,

쉽게 바스러질 것임을 안다.

그래도 자꾸자꾸 다짐해 본다.

이렇게 글로도 써 본다.     


‘6만 원 그리고 더하기 2천 원은 고가의 립스틱 하나가 아니라, 

책 4-5권이다.

글방 4주다.

독서회 4주다.

댄스 개인 레슨 1번이다.

수영 한 달이다.

5개의 핸드크림이다.

K와 먹을 칼국수 6그릇이다.

온 가족이 2주는 행복하게 먹을 맛 좋은 토마토, 버섯이다.

그리고도 돈은 남을 수 있다!'      


이렇게 치환해 본다.     



여전히 어려운 구찌를 눈앞에 두고 다음 달은 글방을 신청했다.

지금도 금빛 바디에 꽃무늬 케이스가 아주 영롱한 이 립스틱은 

돌려도 돌려도 꼿꼿이 서 있는 상태로 나를 짓누른다.

나와 물리적으로 더 오래 함께 할 것은 4주의 글방이 아니라

1년이 넘어도 못 쓸 립스틱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어마어마하지 않아도 어떤 사치는 

자꾸 나를 그 당시로 데려다 놓는다.

립스틱이 아주 짧아지는 날이 오면 벗어날 수 있을까?

그때까지는 구찌, 견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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