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_일상
퇴직을 했다.
기념으로 미용실을 예약했다.
뻔하기는 하지만 뭔가 큰 결심을 하거나 변화가 있을 때는
미용실이 생각난다.
예전에 긴 짝사랑을 정리하고 생각 없이 단발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의외로 평이 좋아서 아주 흡족한 기분이 든 후로 그렇다.
‘앗, 히피펌이 세일 특가!!’
이제 단정해 보일 일이 없으니 한 번 볶아 보기로 한다.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모발이 얇고 숱이 적고 반곱슬인 탓에
이전에 수많은 펌들을 거절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리저리 내 머리를 살피고 머리카락을 들었다 놨다 하며
탄식하였다.
“아, 안되는데, 고객님, 절대!! 이렇게 안되세요!!”
“에휴, 어떡하지, 언니 이렇게 안 되는 건 아시고 정 그럼 진행할게요.”
난 그저 머리를 하러 왔을 뿐인데,
무슨 CT를 보고 심각한 병을 진단하며 통보하는 의사와 같이
엄포를 놓는다.
아마 후에 따질 것이 걱정되니 그러겠지...
이해가 되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사람 머리카락을 보고 탄식까지 할 일 인가….
그래서 쫙 붙는 매직의 과도기가 싫지만
늘 그들의 권유(?)대로 매직 후 파마를 진행하였다.
값이 비싸지기도 하지만 정말 쫙 붙는 건 싫은데…
희한한 머리카락을 가진 죄로
말을 듣는다.
이런 적도 있었다.
오랜만에 미용실을 찾아
“역시 머리는 좀 다듬고 해야겠죠?”라고 물으니,
“그렇죠, 이건 머리가 긴 게 아니라
그냥 억지로 달라붙어 있는 거예요,
아주 살려달라고 하는데,
이전에 도대체 어디서 하신 거예요?”라는 말을 들었다.
“댁네 2호점에서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정말이다)
갑자기 안 하겠다고 말하고 나올 용기도 없었고
앞으로 약 150분 동안 내 머리를 만질 미용사와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
그냥 씹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 멘트가 아주 기발한 표현이라고 생각해
속으로 웃으며 감탄했는데,
곱씹고 남에게 말해줄수록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표현이라
몇 년이 지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한 미용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전하다
작년 초부터 정착하였다.
나보다 곱슬이 심한, 역시 상처를 받을 대로 받아 단련된
동생이 먼저 정착한 미용실이다.
물론 그 미용실 S쌤 역시
동생과 같은 경우는 살면서 매직이 필수라고 하였지만,
쓸데없이 기를 팍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에 이렇게 저렇게 변화를 주어
아이유 단발펌을 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북돋아 줬다고 했다.
그렇게 동생은 머리는 아이유가 되어 돌아왔다.
그의 똑 단발을 보자니 나도 단발이 하고 싶어,
그가 장발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동생의 스타일이 맘에 들기도 했지만,
“언니, 그 집은 진짜 기분이 안 나빠.”라는 말을 들어 두근거렸다.
‘아, 이제 정착할까?’
그렇게 정착!!
무려 매직을 하지 않고 똑 단발이 되었다.
숱 없는 자의 쫙 붙는 매직의 슬픔을 공감해 주는 분이었다.
더불어, 그분의 가장 좋았던 점은
말을 너무 많이 시키지 않는다는 거다.
늘 새로운 미용실에 가다 보니 갈 때마다 호구조사를 당하거나
서비스업 정신이 담긴 물음에 응하고자 함께 뚝딱거리다 보면
앉아만 있었는데도 진이 빠져나오곤 했다.
물론 재미있는 대화도 있었으나
난 이게 너무 힘든 사람이다.
하지만 S쌤은 딱 적당한 양의, 필요한, 기분 좋은 말만 걸었다.
어찌 안 좋아할 수 있으랴.
이번에도 당연히 S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예약을 하던 중,
히피펌은 Y쌤 전용 상품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Y쌤, 그녀는 나로서 범접하지 못할 E기운을 지닌 사람으로,
매장을 휘어잡는 밝고 큰 목소리와
광범위한 분야의 에피소드를 이어가는 뛰어난 말발과 리액션을 지녀,
중년의 여성과 전 연령대의 남성 고객에게 인기가 있었다.
머리는 그렇다 치고
내가 그런 사람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백수 첫날부터 마음먹은 것을 안 할 수 없기에
나는 Y쌤, 동생은 S쌤으로 예약하고
묻지 않는 이상 자매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들어가자마자 Y쌤이 우리를 반겼다.
-Y쌤(환하게 웃으며):
어머, 성이 같으셔서 같이 올 줄 알았어요~
히피펌 하시는 거죠?
예전에도 이렇게 곱실거리는 파마 해보신 적 있으세요?
-나:
아뇨, 처음이에요.
-Y쌤:
어머, 그럼 내가 아주 힙하게 만들어드려야겠네.
기대하세요!! 같이 오신 분은 단정하게 하시고?
-나(벌써 소심해지며):
네. 저쪽은 매직이 필수라..
그런데 제 머리도 히피펌이 가능해요?
-Y쌤:
당연하죠, 고객님 머리가 워낙 볼륨 있으셔서
펌 하면 잘 연결돼서 자연스러우실 거예요~
-나(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의문을 가지며):
아… 처음 듣네요, 제가 숱이 없고 모발이 얇아서…
-Y쌤(급 분개하며):
숱이 없다 구요? 어떤 사람이 그래요?! 어떤 사람이?!
-나(대답을 요하는 질문이라 생각하지 않아, 그냥 웃음): ^^
-Y쌤(정말 혼내줄 듯이):
어떤 사람이?!
-나(당황하여 뚝딱거리며):
아, 그냥 이렇게 만지기만 해도 없는 게 느껴집니다.
-Y쌤(여전히 흥분하여):
무슨 소리예요, 사람이 숱보다는 볼륨이지?!!!
물어보세요, 나이 들면 숱인가? 볼륨인가? 볼륨이에요!!
나는 잔머리와 부스스함을 볼륨이라 표현해 주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낀 동시에
저 정도 센스가 있어야 서비스업을 할 수 있구나 싶었다.
이후 내가 간지러움 때문에 시술용 일회용 마스크 쓰기를 조심스레 거부하자,
그는 자신이 펼치고 있는 제로웨이스트 이야기를 하였고 난 박수를 쳤다.
저쪽에서는 다이어트와 단호박 수프 이야기,
또 다른 쪽에서는 부업으로 배달을 하고 있다는 손님의 애환 등등
최신 트렌드와 건강, 시사 이슈까지 여기저기를 종횡무진하였다.
그녀의 바쁜 손과 입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나는 그녀가 자리를 떠난 사이 눈으로는 책,
귀로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어느새 그 시공간에 푹 빠져버렸다.
그럼에도 길었던 150분이 지나고
나는 거울을 보지 못했지만
Y쌤을 닮은 보조 선생님이 기대해도 좋다고 해서
좀 무서워졌다.
'아주 복실거리나 보다.'
일반펌 보다 쉽다는 관리법을 들으며,
서서히 해그리드 같은 내 머리에 적응하는 중
Y쌤이 다가왔다.
“어때요, 좀 힙해진 것 같아요?”
나 이외의 이전 손님들이 싹 빠지고
새로운 손님만 멀뚱멀뚱 있는 조용한 매장에 울려 퍼지는
그녀의 크고 밝은 목소리,
난 좀 힙해지고 싶어 안달 난 여자가 된 것 같아 창피했지만
일관성 있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아, 이거 하면 힙해지나요?”
그녀는 힙해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어깨를 피고 당당히 걸어야 하며,
잘 알아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밴드도 꼭 하고 다니라고 했다.
이전에도 같은 위로를 받았다.
몇 년 전, 오래 준비하던 임용시험을 포기하고
처음 지나가듯 이 미용실을 찾았을 때,
Y쌤은 사연 있어 보이는 나에게
오랜만에 미용실을 찾았다고 하니,
예쁜 머리를 해주겠다고 마구 기분을 북돋아주었다.
그 순간 나보다 목소리가 훨씬 크고 사교성이 좋으며
말이 많지만 본인은 말이 많은 줄 모르는 사촌 언니가 떠올랐다.
고마웠지만 기가 빨리는 게 느껴져
‘다시는 못 오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또 와서 이렇게 힘을 얻는다.
그렇게 Y쌤과는 4개월 후 뿌리펌을 기약하고 신나게 미용실을 나왔다.
이후 2023년 3월 23일까지 Y쌤과 나는 히피펌으로 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