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주 외 6명 '현남오빠에게'
이제 나도 스물다섯 살, 곧 스물여섯. 어느 모임에서나 연장자인 사람이 되었다. 학교를 너무 오래 다닌 탓이겠지. 이제 곧 다시 막내가 되겠지만은, 일단 지금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지내는 삶에 익숙해지는 중이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중. 20살, 21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브로콜리 너마저의 ‘서른’을 들으며 요새 나의 지난 5년을 자주 되돌아본다. ‘아닌 걸 아니라고 하는 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버려야 했던 날을 버티고 나서 찾아온 지금이 어쩌면 정말 어른이 되는 순간.’ 나는 아직 너무 어리고, 어리석은데 어쩌면 모르는 새에 이미 어른이 되고 있었는 줄도 모르겠다. 누가 들으면 비웃을 말일지도. 하지만 비웃기에는 내 10대 말과 20대 초반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지. 특히 나의 연애 생활은.
사실 남자친구는 딱 두 번 뿐이었다. 18살에 1년간 사귄 남자친구, 19살의 여름부터 21살 봄까지 함께 한 남자친구. 이외에 스쳐 지나간 인연들은 몇 있지만 이제 4년이나 혼자 지내니 장난으로 나는 모태솔로지라고 말해도 다들 그러려니 넘어가 준다. 이 연애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연애를 했던 그때의 3년을 떠올리면 사실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어떤 현남오빠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 아니, 작았던 그때의 나에게 어떤 편지를 보낼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남자친구가 있었다. 어떤 친구는 항상 있고, 어떤 친구는 이따금 있고. 남자친구를 사귈 수만 있다면 모든 하겠어 밤마다 기도했던 철없던 나. 엉망진창 학교 남자애들 중에서라도 한 명을 골라 사귀리라. 나의 첫 남자친구는 키가 170도 안 되고 너무너무 못생겼던, 수업시간에 잠만 자던 친구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나름 그중에 고르고 고른 것이었다 지금은 생각한다. 너무 오랫동안 간절히 남자 친구를 원해왔던 탓일까. 나는 정말 참하고 조신한 여자친구가 되리라, 도시락을 싸고 남자친구 꽁무니를 졸졸 쫓고, 더치페이를 하는 ‘개념녀’가 되리라 자신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성적이 8등급이었던 남자친구를 도서관에 데리고 다니며 중학영어부터 다시 가르치고, 점심시간엔 새벽부터 싸온 도시락을 먹였다.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라며 기를 살려주고, 함께 밤을 보내자는 말에는 완곡히 거절을 했다. 그래서 돌아온 것은 무엇인가. 정말 멍청한 그 친구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자기는 너무 잘났고, 나는 너무 못나서 자기가 나를 만나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학교에서 나 덕분에 자신이 얼마나 평가절상되었는지도 모르고. 웃겨, 정말. 1년이나 만나 놓고 헤어지자마자 3일 만에 여자친구 새로 사귄 형일아, 너는 내 인생 최악의 남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제발 ‘자니’ 좀 그만 보내. 우리도 이제 20대 중반이다.
이제 학교 밖으로 눈을 돌렸다. 입시학원 친구의 친구와 만나게 되었다. 키는 작지만 못생기지 않고 적당한 외모에 허세는 좀 있지만 말을 의외로 예쁘게 하던 친구였다. ‘민지야,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돼.’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됐지, 뭐.’라는 말들에 홀딱 넘어갔던 나. 그는 말 같지도 않은 말도 예쁘게 잘 포장했지. ‘내가 게이를 싫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라든지 ‘남자들은 다 똑같아. 네가 그런 옷을 입고 다니면…’, ‘한국 야동(그때도 불법이었음)을 볼 수밖에 없는 나는…’ 같은 말들. 진짜 그 말이 맞는 줄 알고, ‘아, 너는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했다. 이제 나는 전남자친구에게처럼 남자친구의 기를 살리기 위해 나를 낮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격지심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었던 그 친구는 나에게 항상 울상을 지으며 자기가 나에 비해 얼마나 못났는지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나에게 버림받을지를 구구절절 늘어놨다. 아니야, 너는 못나지 않았어. 나는 너를 선택했어. 그런 말들로 그를 억지로 붙잡고 끌고 가봤지만 결국 함께 가지 않을 사람 멱살을 끈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능력이 좋아야 할 이유는 또 뭐람? 내가 남자친구보다 학력이 좋고, 직업이 좋고, 수입이 좋은 게 왜 그렇게 미안했을까? 내가 왜 그 친구보다 오래 알아온 나의 남자사람친구들을 그 친구가 불안할까 봐 멀리했을까? 지금 내 옆에 남은 사람들을 봐. 감사하고 미안하게도 내가 멀리했던 그 친구들이야. 왜 놀러 갈 때마다 허락을 맡았을까? 왜 누구와 함께 있는지 허락을 맡았을까? 왜 네가 나에게 꼭 그렇게 하라고 말했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았을까? 왜 그게 연인 간의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했을까? 예의 같은 소리. 나는 그냥 예의 없게 살고 말래. 선호야, 너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솔직히 지금 너를 만났으면 눈길도 안 줬을 것 같아. 너는 그냥 따뜻한 한남이야. 그리고, 나 너 만날 때 우울증이었어. 네가 힘들 때는 여전히 나를 찾으면서, 그때 왜 내 옆에 있어줄 수 없었니? 너는 어쩌면 여자 친구가 아니라 엄마가 필요했는지도 몰라. 나는 잘났는데 뒷바라지까지 해주는 너의 트로피 걸프렌드였어.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는 관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잠깐 만났던, 생각해보면 사랑했었던 프랑스에 사는 6살 연상의 이탈리아 사람. 어쩌면 이 친구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 중 가장 괜찮은 남자일지도 모른다. 아냐, 민지야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 줄 세워서 뭐하니. 근데 이탈리아 남자가 유럽의 한남이라던데 진짜인 것 같아. 이 전처럼 이 사람은 나를 구속하려들 지도, 트로피처럼 여기지도 않았지만, 소유물로 생각하기는 했던 것 같다. ‘민지야, 너는 너무 작고 약하니까 내가 다 해줄게’. ‘길에서 사람들이 너에게 휘파람을 부는 건, 그냥 네가 예뻐서 그런 거야. 네가 화낼 이유는 없어.’ ‘너 혹시 페미니스트야? 아 여자니까 페미니스트이긴 하겠다. 근데 나는 걔네 별로.’ ‘너는 여자니까 가만히 집에 앉아있어. 내가 밥도 다 차려주고, 설거지도 할 테니까 너는 여기서 나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 처음 받는 공주대접에 초반에는 나름 편하고 좋았지만 (일단, 그 친구가 밥을 기갈나게 했다. 아직까지도 그 친구의 파스타보다 맛있는 파스타는 먹어본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나니 내가 인형이야 뭐야, 내가 왜 자기만 기다려야 돼 싶었다. 아, 오민지 생각이 많이 발전했네 사귀는 도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근데 머릿속으로는 항상 이 사람은 아니다는 생각을 하면서 왜 마음은 자꾸 떠날 수가 없는지. 결국 장거리 연애가 힘들다는 그 친구 앞에서 소주 먹고 엉엉 울었다. 왜 나를 버리냐고. 창피해. 창피해. Davide, you may haven’t said it out loud, but I’ve always noticed that you always felt superior above me. That feels like shit. ‘cause I could also be the smart one somewhere. I may be small in Germany or France, but you could be small in Korea likewise. You should realize you’re white male straight previleged and none of them is earned by your effort.
이제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여자로 눈을 돌려보기도 했지만 결국 european privileged minded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근데 말이야, 그동안 내가 진짜 어른이 되기라도 했는지 이제 그런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아. 사실 연애가 대수인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게 하는 사람 만날 필요는 없지. 현남오빠랑 사귈 바에, 현남오빠랑 결혼할 바에 평생 혼자 사는 게 나아. 언젠가 내 옆에 좋은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연애만을 위한 연애는 이제 하지 않을 거야. 나를 스쳐 지나간 오빠, 동생, 친구들아, 어찌 됐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어 고맙고 나는 정말 멋진 사람이 되었으니 다시 너희 같은 사람을 만날 일은 없어. 내 마음의 빈자리는 나 자신이 잘 채워주고 있거든. 나와 하는 연애는 정말 재밌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