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보다 먼저 다가온 작은 향기 하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정신없이 바빴고, 이 일 저 일 머릿속은 이미 꽉 찼고,
몸은 피곤한데 머리는 멍한, 딱 ‘지치는 날’의 전형적인 상태였죠.
조향도 안 풀리고, 일정은 밀리고,
점심은 커피 한 잔으로 때웠고,
괜히 이메일 하나에도 예민해지고,
혼자 작업실에 앉아 ‘나 왜 이렇게 못하나’라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하던 그 시점.
정말 별생각 없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시향지 하나를 들었습니다.
며칠 전 시도했던 향 조합이었는데,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아서 옆에 던져뒀던 향이었어요.
그런데 그날, 그 순간에 맡은 그 향은
희한하게도 꽤 괜찮았습니다.
베르가못과 라벤더, 아주 은은하게 올라오는 시더우드.
그날의 저에게는 뭔가 “괜찮아, 그냥 여기까지 해도 돼”라고
말 없이 다독이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실 향은 늘 옆에 있었고, 늘 맡아왔지만
그날만큼 향이 이렇게까지 위로처럼 느껴졌던 적은 드물었습니다.
커다란 말도 아니고, 누군가의 조언도 아니고,
그냥 조용하게 스며드는 그 향 하나.
그거 하나로 묘하게 기분이 풀렸고,
하던 일은 그대로인데 마음만 조금 정돈이 된 느낌이었달까요.
그날 이후로, 향을 바라보는 제 시선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물론 향은 기능적으로도 중요하죠.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고,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고요.
하지만 누군가의 감정에 조용히 닿을 수 있다는 것,
그게 향기의 진짜 역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에 브랜드 향 개발을 할 때도,
가끔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합니다.
"이 향을 맡았을 때, 그냥 좋아서 끝날까? 아니면 마음 한 켠이 조금 나아질 수 있을까?"
물론 모든 향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그날의 컨디션, 감정, 기억… 모든 게 미묘하게 어우러져야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압니다.
정말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 날,
생각은 많은데 말은 하기 싫은 날,
그럴 때 향 하나가 조용히 대신해주는 순간이 있다는 걸요.
그날의 제게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서 향을 만들 때마다 생각합니다.
누군가 이 향을 우연히 맡고,
"아, 이거 좋다" 하고 피식 웃을 수 있었으면.
혹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으면.
그 정도면 그 향은,
충분히 누군가의 하루에 조용한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사람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요.
"그날, 딱 이 향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 한 문장이면,
조향사로서의 나는 또 하루를 잘 살아낼 힘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