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마스터
얼마 남지 않은 2017년. 남은 기간 목표 중 하나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를 전부 보고 리뷰를 쓰는 것이다. <부기 나이트>, <There Will Be Blood>에 이어 세 번째 PTA(폴 토마스 앤더슨의 애칭)의 영화 리뷰인 점. 앞으로 송년회다 뭐다 해서 바쁠 예정인 점을 생각하면 올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원래 목표라는 게 달성하지 못하는 게 제 맛 아닌가.
2차 세계대전에 해군으로 참전한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은 종전 후 군의관에게 정신치료를 제안받는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백화점의 사진사로서 일을 시작한다. 일을 하던 도중 백화점 의류 모델 여성과 성관계를 맺으려고 하나 실패하고 이어지는 데이트에도 실패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으러 온 손님에게 공격성을 드러낸 후 백화점을 떠난다.
프레디 퀠은 살리나스 농부로 직업을 바꿨지만 자신이 만든 술을 어떤 노인이 마시고 쓰러지자 다른 동료들이 그가 술에 독을 탔다고 비난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프레디는 농장에서 도망친다.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파티를 벌이는 유람선을 발견하고 그 배에 숨어 들어간다. 그 배는 랭커스터 토드(필립 시모어 호프만)가 이끄는 ‘코즈’라는 종교 단체의 배였다.
랭커스터 토드는 프레디 퀠이 주조한 술과 사람에 매력을 느껴 함께 다니자고 제안하고 퀠도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토드와 퀠은 함께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코즈를 전파한다. 퀠은 코즈에 대한 믿음보다는 토드의 수하로서 최선을 다한다. 경찰에게 끌려가면서 한 차례 갈등을 겪지만 둘의 동행은 계속된다.
그러나 토드가 영국으로 넘어가자 퀠은 미국에 남기로 해 결국 둘의 여정은 끝난다. 시간이 흐른 후 퀠은 토드를 만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퀠은 토드를 만난 후 다시 자신과 함께 다닐 생각이 있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떠난다. 그 후 한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와 사랑을 나누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마스터>의 줄거리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PTA는
Oh, boy... We were low on story. We were high on character, low on story.
아 이런... 스토리는 낮게 갔고, 캐릭터는 높게 갔다.
라고 답변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스터>의 평론가 평은 좀 갈리는 편이다.
‘박평’식 평론가는 이 영화를 별 4개 반을 줬다. (재개봉 작은 <대부 2>를 포함하면 3년 만, 제외하면 8년 만의 별 4개 반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2013년 영화 중 <홀리 모터스>와 <그래비티>와 함께 별 5개 만점을 주었다. 반면 영화 평론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평론계의 전설 로저 이버트는 “기술적으로 훌륭하나 모호하고 난해하다. 그 모호함 속에 감춰진 명확한 메시지를 끝끝내 알지 못한다.”며 4점 만점에 2.5점을 주었다.
<마스터>에 나름 혹평한 로저 이버트도 이 영화가 기술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할 정도로 영상미와 연출은 뛰어나다. 이 영화는 지극히 인물 중심의 드라마다. 인물을 클로즈업하는 경우가 많고 이때 의도적으로 주변 배경을 blur처리 해 관객이 캐릭터에 집중하도록 강제한다. 두 주연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력을 믿기에 가능하다. <Her>, <글래디에이터> 이후 간만에 본 호아킨 피닉스 (프레디 퀠)의 연기는 대부분 애드리브였다고 한다.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는 촬영장에서 프레디로 살았고 자신은 그가 발산하는 에너지를 그냥 놔두는 식으로 찍었다고 한다. 유치장에서 변기를 발로 부수는 장면이나 해변에서 프레디가 자학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라고.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필립 시모어 호프만 (랭커스터 토드)의 연기도 피닉스의 광적인 메소드 연기보다 튀진 않지만 그에 밀리지 않는 무게감 있는 연기력을 보여준다.
<마스터>를 이해하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한다. 50~60년 대 미국은 역사에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향유한다. 전쟁을 통해 축적한 막대한 부,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광활한 영토로 인해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호황이 지속됐지만 그에 반해 정신적 궁핍이 이어졌다. 영화 속 토드가 이끄는 ‘코즈’라는 종교 단체의 모티프인 ‘사이언톨로지교’가 만들어진 년도가 1954년이었고 미국에서 히피와 약물이 판을 치던 시기도 비슷한 시기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참전 용사들이 겪었던 외상 후 스트레스, 성공이 가져오는 공허함이 대표적인 이유일 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영화 곳곳에 널려있다.
프레디 퀠이란 캐릭터의 엄마는 정신병원에 입원해있으며 고모와 근친상간을 한 경험이 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에서 수많은 적을 죽인 그의 정신이 온전할 리 없다. 이런 캐릭터의 성장 배경 말고도 그의 자세나 태도에서도 정신적 공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그의 자세다. 프레디의 자세는 매우 독특하다. 등이 잔뜩 굽어 상체가 앞으로 쏟아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의 양손은 몸을 지탱하기 위해 허리를 받치고 있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프레디의 이런 자세는 낙심함, 부정적, 스트레스, 불안, 죄의식을 의미한다. 즉 그는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정신적 공황을 겪는 인물이다. 흘러내릴 것 같이 축 처진 어깨 역시 마찬가지다.
두 번째로는 그의 얼굴이다. 프레디가 심리적 상태가 붕괴 직전에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은 그의 경직된 얼굴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언청이(구순구개열)처럼 보인다. 말을 할 때 입술의 반쪽이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청이가 아니더라도 사고로 인해 입술이 흘러내렸든, 전쟁에서 상흔을 입었든 문제가 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당시 미국의 경제적 풍요와 정신적 궁핍 사이에서 일그러진 사람들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멀쩡한 절반의 얼굴은 경제적 풍요 혹은 정상을 의미하고 일그러진 절반은 정신적 궁핍 혹은 비정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징은 영화에서 프레디가 정상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때 그의 측면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설명한다. 영화를 본 사람이면 알다시피 우리가 프레디와 마주 봤다고 가정할 때 왼쪽 입술, 즉 왼쪽 얼굴이 비정상이다. 왼쪽 얼굴이 비치느냐, 오른쪽 얼굴이 비치느냐에 따라 프레디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회복해가는지 알 수 있다.
‘코즈’를 이끄는 랭커스터 토드의 모습에서도 그런 공허함이 잘 나타난다.
첫 번째로는 그의 부부생활이다. 그의 아내 페기 도드(에이미 애덤스)는 세 번째 아내다. <마스터>에서는 페기와 랭커스터의 애정을 찾아볼 수 없다. 퀠을 쫓아내라고 말할 때 거래처럼 손으로 랭커스터에게 수음(手淫)을 해주는 모습이 둘이 에로틱하게 살을 맞대는 유일한 장면이다. 부부끼리 인사처럼 하는 가벼운 입맞춤도, 그윽한 눈빛 교환도 없다.
둘 사이의 묘한 기류는 마치 ‘쇼윈도 부부’ 같은 느낌을 준다. 페기는 ‘코즈’의 수장의 명성을 원하는 것 같고 랭커스터 역시 사이좋은 부부상을 위해 세 번째 부인을 들인 느낌이다. 공허함은 가족관계의 붕괴에서 시작된다. 내 자식을 임신한 아내에게 으레 해주는 공치사나 애정 표현이 없는 랭커스터와 그걸 바라지 않는 페기의 모습은 당시 미국의 정신적 결핍 내지는 궁핍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는 그가 취하는 자세다. 그는 여러 장면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리고 있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이런 자세는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이자 부끄럼과 죄의식을 의미한다.
코즈의 교주이자 작가, 철학자인 랭커스터는 전문성과 권위가 필요한 곳에서 종종 무너진다. 그런 장면마다 한숨을 쉬며 손을 눈 근처에 대고 시야를 가리는 것은 은폐하고자 하는 마음과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제스처다.
미국의 공허함을 나타내는 인물 둘이서 만나 우정, 권위, 연민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퀠에게 랭커스터는 마스터(교주, 주인, 장인)이다. 한 사람에게 지배당하고 복종하면 정신적인 주체적인 삶을 살긴 어렵겠지만 정신적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스터에게도 좋은 일이다. 우선 맹목적인 신도의 존재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감을 높인다. 아내와 애정을 나누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던 교주가 교리에 의문을 표한다. 심지어 경찰에게 끌려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한다. 권위가 생명인 교주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일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퀠의 존재는 그 허무함의 공백을 메워준다.
둘이 만나서 아이처럼 즐거워하고 사진을 찍어주고 머리를 정리해주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이러한 상호 노력은 접촉, 응시, 배려, 애정 등을 의미한다. 이런 노력은 둘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주고 둘의 관계를 지속하게 만든다. 사회에 부적응한 채 떠돌기만 한 프레디가 마스터와의 관계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상대방에게 인정받는 중요한 순간이며 마스터에게도 퀠은 행동 대장이자 호위무사이며 동반자이다.
아내도 데려가지 않은 너른 벌판에 퀠을 데려간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둘의 인생이 다시 분리된다. 마스터는 오토바이를 타고 자신이 원하는 곳까지 갔다가 오는 일종의 ‘찍고 와’ 게임을 제안한다. 마스터는 왼쪽 방향으로 출발해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오는 데 프레디는 마스터가 갔던 정반대 방향으로 오토바이를 몬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아직 프레디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심리적 공허함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다시 한번 세상에 적응하고자 주인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떠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 그가 마스터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반대의 방향은 더 이상 가치관을 마스터와 공유하지 않겠다는 소리 없는 선언이고 세계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겠다는 연약한 개인의 주체적 움직임이다.
<마스터>는 퀠이 오토바이를 타고 마스터를 떠나는 장면부터 이미 완성된다. 그 이후 어디서 끊어도 영화는 완성된다. 마스터를 떠나 도리스를 만나러 간 장면에서 영화가 마무리돼도, 극장에 누워 마스터의 전화를 받는 장면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퀠이 일어나 스크린을 응시하면서 전환되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장면에서 영화가 끝나도 괜찮다.
그러나 감독은 마스터와 퀠을 만나게 해준다. 아마 마스터가 함께 있자고 한 제안에 퀠이 그 제안에 거절하는 모습을 담음으로써 프레디라는 캐릭터가, 정신적 궁핍을 겪었던 당시 미국인들이 그런 정신적 스트레스에 굴하지 않고 극복 의지를 내비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프레디가 극장에서 <캐스퍼>를 보고 있는데 “선장은 배를 떠나지 않아”라며 영화 음성이 들린다. 프레디가 자기 인생의 선장은 마스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암시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바다에 있는 모래 여인상에 유사 성행위를 하고 자위를 했다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선 모래 여인상 옆에 편안한 표정으로 눕는 모습으로 그런 극복 의지 혹은 치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래서 <마스터>를 난해하고 현학적이라고 평가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것을 느끼지 못했더라고 영화의 꽉 찬 장면 구성이나 구도만 즐겨도 손해는 아닌 듯싶다.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을 넓게 찍었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이 영화의 85% 정도를 65mm 필름으로 찍었다. 1996년 케네스 브래너의 <햄릿> 이후라 이 이유만으로도 영화계에서 제법 화제가 됐단다. 이 영화에 쓰인 65mm 필름 카메라는 미국 전역을 통틀어 단 3대밖에 없다고. PTA 영화를 리뷰하면서 항상 감독의 장면 구상과 구도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길게 쓰진 않겠다. 그런데 나 같은 문외한이 ‘화면이 좀 넓네. 일부로 그렇게 찍은 건가?’라는 궁금증이 들 정도이니 확실히 다른 영화와 다른 공간감을 <마스터>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은 존 휴스턴 감독의 고전 다큐멘터리 <빛을 들여라(Let There Be Light)>에서 상당한 모티프를 얻었다고 밝혔다. 이 다큐는 2차 대전 후 전쟁 참가자들의 정신적 후유증을 다룬 작품이다.
2012년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작이자 주연배우 2인이 공동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작품. (참고로 당시 금사자상은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BBC 선정 가장 위대한 영화 24위에도 오른 위대한 감독의 좋은 영화임엔 틀림없다.
PS- PTA 감독의 전작인 <There Will Be Blood>의 음악을 맡은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가 <마스터>에서도 함께 작업을 했다. 그리고 <마스터>도 시작 후 5분만 '거의'대사 없이 프레디 퀠의 복잡하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집중한다. 칼로 자신의 손을 자르려고 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백화점에서 사진을 찍을 때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도 어디선가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 때문이다. '아이'가 갖는 상징성이 퀠의 폭력성 스위치를 켰다는 것도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