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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Dec 16. 2017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1위

데이빗 린치- 멀홀랜드 드라이브


프로(=돈을 받는) 영화 평론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영화를 보고 생각한 바와 자료를 수집해 리뷰를 적는 아마추어 블로거로서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빠른 시일 내에 적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어쨌거나 BBC에서 선정한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100개 중 1위로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선정됐기 때문이다. 2위로 선정된 <화양연화>, 3위인 <There Will Be Blood>를 비롯해 100위에 선정된 많은 영화를 상당히 재밌게 봤기 때문에 1위라는 상징성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에 기분 좋은 떨림이 있었다. 
  

그렇게 2시간 30분가량의 러닝타임이 지났고 영화를 다 본 후 든 생각은 이거였다. 
‘빌어먹을 평론가 놈들’ 


그래. 항상 평론가들은 그래 왔다. 대중은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개념과 단어를 멋대로 만들어내고, 그걸 가지고 그들만의 헤게모니를 만들어 ‘니들은 이해 못해’ ‘그래서 내가 평론가야’라는 식의 거드름과 우월감으로 점철된 평론가 말이다. 


우선 영화 자체의 이야기가 연결성이 없다. 분명히 리타(로라 해링)와 베티(나오미 왓츠)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거 같은데 아무런 복선 없이 리타가 베티의 사랑을 거부한다. 그리고 리타의 이름이 카밀라로 베티의 이름은 다이안으로 바뀌고 여하튼 뭔가 복잡하다. 중요한 건 인물의 관계가 변할 때는 납득할만한 사건을 통해 관객을 이해시켜야 하는데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그런 거 없다. 


중구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건들이 중구난방으로 각기 일어나기 때문에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두 번 보지 않을 영화는 한 번 볼 가치도 없다’고 하는데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화가 주는 교훈이나 영상미, 분위기에 취해 두 번 봐야 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두 번 봐야 한다. 사실 두 번 봐도 영화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오히려 그게 정상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꿈과 현실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 1시간 반가량은 꿈이고 그 이후는 거의 현실이다. 그런데 감독은 불친절하게도 이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알고 영화를 봐도 도통 뭐가 뭔지 제대로 알기 어렵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논문과 자료를 찾아본 결과 내 입맛에 가장 맞는 것은 경희대학교 디지털 콘텐츠학과의 이태훈 교수의 <꿈 시퀀스 이미지에 대한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적 연구- 데이빗 린치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이었다.  


또, 나라네.

만약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읽는 걸 멈추고 다른 리뷰를 보는 걸 추천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지 않고 이 리뷰를 보는 것은 화장지를 들지 않고 화장실로 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적는 내용은 이태훈 교수의 논문을 바탕으로 한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해석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꿈꾸는 사람은 꿈 작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억제되어 있는 욕구, 즉 잠재몽 내용을 이상한 발현몽(꿈으로 표현된 자세한 내용)으로 바꾸어낸다. 그래서 실제 깨어 있을 때 충족되지 않는 충동이 꿈속에서 지각(知覺) 영상이나 장면으로 나타나며 추상적인 용어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되살아나거나 특정한 물건이나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 매우 많은 상징이 이용된다. 

이런 과정에서 발현몽 내용은 여러 가지 잠재몽 내용을 압축할 수 있으며 그 반대로 여러 가지 발현몽 내용이 하나의 잠재몽 내용을 의미할 수도 있다. 꿈이 비논리적이고 그 내용이 무의미한 듯 보이거나 유치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감정이 꿈속에서는 다른 사물이나 사람에게 전위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등 꿈은 그 본질인 ‘희망의 실현’을 위한 무의식적 노력의 산물이다. 
   
더 이상 프로이드 얘기를 하면 어려우니 이쯤 해두고 영화로 넘어가자. 
   
앞서 밝혔듯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현실과 망상을 오가는 작품이다. 영화 전반부 2/3은 주인공인 다이앤이 죽기 직전 꾼 꿈으로 묘사된다. 현실과 망상을 오가는 스타 지망생의 애증과 욕망을 다룬 꿈을 꾼 이유는 주인공이 질투와 좌절 등 비참한 현실의 모습을 통해 자본과 파워가 지배하는 할리우드의 냉정하고 비정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 다이앤의 억눌린 욕망들, 잠재된 무의식들이 현실 혹은 기억의 조각들과 뒤섞여 재구성된 컬트 형식의 구조로 할리우드에서는 꿈도 사랑도 영화도 모두 허상이며 성공에 대한 꿈은 인생의 파멸만을 부른다는 감독의 사회 의제를 표현한다. 

포스터에도 보이는 헐리웃

꿈은 구체적이지 않으며 꿈속에서는 행위가 명확하지도 소리가 명확하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꿈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다만 다양한 구조로 많은 이야기가 압축, 축소, 왜곡, 상징되며 나타나기 때문에 논리적인 구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꿈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보다 어떤 느낌으로 개인에게 다가섰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비논리적이고 개연성의 부족과 이해의 한계에 부딪히는 이유는 꿈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충실히 편승하여 표현, 묘사, 구성했기 때문이다. 모든 꿈이 그러하듯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한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부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이다.

꿈을 꾸는 이유는 소망 실현이다. 그러나 이런 궁극적 목적성을 띤 꿈이 알아볼 수 없도록 위장되어 있는 이유는 소망에 저항하는 의식의 법적, 도덕적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이며 이의 성취를 위해 꿈은 왜곡, 전위된다고 프로이드는 주장한다. 이를 숙지한 후 영화 주인공인 다이앤의 꿈으로 들어가 보자. 다이앤의 꿈 시퀀스에서는 자신과 현실 속 친구 카밀라가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자신을 배신한 연인의 몸에 들어가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들고 싶은 마음의 투사가 꿈에서 일어난다. 
   
리타(카밀라의 꿈속 이름)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은 현재의 자신에게 대한 강한 불만과 현실 속 스타인 카밀라를 선망하는 욕구를 강하게 드러나는 꿈다운 표현과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베티(다이앤의 꿈속 이름)가 리타의 머리를 자르는 행위를 멈추게 하고, 자신과 똑같은 금발의 단발 스타일 가발을 씌어주는 장면은 은막의 여배우로 성공하기까지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신과 이드(충동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한 스스로의 연민이다.

현실 속 카밀라의 연인인 영화감독 아담 캐셔는 자신에게 동성 연인 카밀라를 빼앗은 연적이자 자신을 무명 배우로 하대하는 캐릭터다. 그래서 다이앤은 꿈에서 아담 캐셔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설정으로 그녀의 망상을 표현한다. 

또한 아담의 어머니 코코는 꿈속에서 자신이 이모에게 빌린 빌라의 매니저로 등장한다. 이는 친절한 것 같지만 도도한 차별주의자라는 자신의 느낌이 꿈속에 반영된 결과다. 


자신의 꿈속 이름인 베티의 경우, 현실 속 식당의 웨이트리스의 이름으로 (무의식적으로 스쳐본 명찰) 이는 실패한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한 동일화의 설정이다. 

프로이드가 말한 꿈의 압축과정은 두 가지 이상의 생각이나 정신적 이미지가 합쳐지는 것이다. 합성 인물이란 간단히 말해서 어떤 사람의 한 가지 이상의 특징들을 다른 사람의 특징들과 결합시킨 대상을 의미한다. 
   
꿈속, 이름이 카밀라인 캐릭터는 검은 세력의 후원으로 주연배우 자리를 꿰차는 무능한 여배우로 등장한다. 이 캐릭터는 현실에서 카밀라의 동성애 애인으로 등장, 주인공 다이앤의 질투하는 대상이다. 재밌는 건 실제 카밀라도 무능한데 빽으로 성공했을 거라는 주인공 무의식 속 질투심이 두 캐릭터를 하나의 이름으로 압축시킨 설정이다. 정작 자신은 꿈에서 캐스팅돼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성공한 여배우 설정을 통해 자신의 스타를 향한 욕망을 나타내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꿈의 상징화란 서로 간의 관계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공통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생각들 사이의 연계 점을 드러내 주는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언어다. 
   
꿈속 새벽 뜬금없이 찾아간 실렌시오 클럽의 무명가수가 립싱크로 슬프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다이앤이 경련을 일으키며 패닉에 빠지는 장면은 할리우드의 인기의 실체가 허상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꿈을 잃고 성공하지 못해 좌절한 무명 배우인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여 상징하고 있는 설정이다. 

또한, 꿈속 윙키스 카페 옆 노숙자 역시 살인청부를 결심한 자신의 사악한 악마와의 거래를 상징함과 동시에 심장마비사하는 꿈속 얼간이 캐릭터를 통해 다이앤의 초자아(도덕과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 자아)가 느낀 현실의 냉정함과 무서움을 상징한다. 


의문이 캐릭터인 카우보이 역시 거대한 검은 세력의 상징이고 노부부 역시 기득권에게 느낀 오만함과 혐오, 공포의 상징으로 묘사, 등장한다. 

팬시한 형태로 왜곡 묘사된 파란 열쇠 역시 초자아가 느낀 죄의식에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다이앤의 자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주인공 캐릭터가 무의식에 의해 느낀 느낌을 프로이드의 해석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 형태로 묘사,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꾸는 꿈은 대부분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일그러져 있다. 


이토록 불친절한 이 영화는 그래도 몇 가지 복선과 암시를 표현해 논리적 인과성과 사건 전개에 필연성을 부여한다. 
   
물론 이 복선과 암시도 이 논문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논문에 의하면 영화 극 초반에 다이앤이 죽기 직전의 이불 앞 거친 숨소리 쇼트를 삽입했다고 한다. 이후의 내용이 꿈임을 암시하는 복선을 설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걸 어떻게 알아;;;) 
   
또한 꿈이 가지고 있는 개인의 무의식적 강한 느낌을 복선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주인공 다이앤이 희망과 설렘을 안고 LA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에 안타깝고 비장함이 느껴지는 몽환적인 음악을 BGM으로 사용함으로써 꿈꾸고 있는 주인공의 현재 심리를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비현실적으로 세련된 파란 열쇠 역시 꿈임을 암시한다. 

새벽에 공연을 보러 가며 또 상식 이상으로 반응하다가 갑자기 손가방에서 나타난 파란 큐브와 결정적으로 주인공 베티가 갑자기 사라지는 장면을 통해 실제가 아니라는 힌트를 점차적으로 부여해 관객에게 꿈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의식의 전환점을 알려준다. 


참으로 친절한 복선과 암시다. 
   
영화가 어렵다 보니 리뷰도, 관련 논문도 개 어렵다. 이태훈 교수의 논문이 내가 찾은 5개의 관련 논문과 수많은 영화 리뷰에서 가장 말이 되고, 그중에서 쉬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밝힌다. 이 논문을 읽어보니 그래도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평론가가 좋아할 만한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평론가 놈들이 무례하고 자기 잘난 멋에 이 영화를 가장 위대한 영화로 선정했다는 느낌을 지울 순 없다. 


그래도 두 여배우의 나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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