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스탠튼-WALL-E
‘WALL-E’ (Waste Allocation Load Lifter Earth-Class. 지구 폐기물 수거- 처리 로봇)는 쓰레기로 황폐화된 지구를 청소하는 로봇이다. 참으로 무책임한 인간들을 대신해 스스로 충천해가며 폐기물을 압축해 버린다. 다른 월E 로봇은 없고 오로지 혼자서 자신에게 시뮬레이션된 작업을 진행한다.
기계인 월E는 사람처럼 감정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바퀴벌레를 반려동물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의미 있는 물건을 자신의 거처에 모은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중 뭔가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지구 탐사 로봇 ‘EVE’ (Extraterrestrial Vegetation Evaluator, 외계 식생 평가사)다. 긴 시간 혼자였을 월E는 이브를 보자 첫눈에 반하지만 이브는 자신의 임무에만 집중한다. 이브는 지구를 떠난 인간이 지구가 얼마나 정화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낸 로봇이기 때문이다. 월E는 마음에 쏙 든 이브에게 우연히 찾은 식물을 보여준다. 식물은 지구에서 생명이 살 수 있다는 증거. 이브는 식물을 수집해 우주에 떠 있는 우주선인 ‘액시엄’(Axiom)으로 귀환한다. 이때 월E도 따라간다.
우주선에 있는 인간들은 아무런 노동 없이 기술발전이 주는 혜택으로 편안히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걷지도 않는다. 이브는 액시엄의 선장인 B. 맥크리에게 식물을 가져다준다. 식물을 본 선장은 지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700년 동안의 항해를 멈추고 지구로 귀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함장 ‘AUTO'는 이미 입력된 지령에 따라 지구로의 귀환을 거부한다. 선원의 반란을 막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두 발을 딛고 선 선장은 AUTO를 제압하고 지구로 돌아간다.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이브는 AUTO의 방해로 인해 고장 난 월E를 되살린다.
지구에 도착한 인간들은 그들이 가진 고도의 기술력으로 인해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시작 후 3/1이 대사가 없음에도 월E와 이브의 감정 표현을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을 보면 픽사의 연출력에 감탄할 수도 있지만 평소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표정, 행동, 작은 움직임 등에서 우리는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있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심리학 서적의 대부분이 이런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알려주는 것들이었다. 팔짱을 끼면 과묵한 사람이라던가 말을 하고 턱을 만지면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들 말이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나는 (혹은 여러분)은 월E를 남자라고 생각하고 이브를 여자라고 생각하는가이다. 전통적인 남자상은 오히려 이브이고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월E를 여자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말이다. 보통 수컷이 암컷에게 구애를 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그랬을까?
색깔 때문일까? 거무튀튀한 색깔의 월E는 남자를 연상시키고 순백의 도자기처럼 잘 빚은 이브를 보면서 여자가 생각난 것일까?
일 때문일까? 전통적으로 육체노동을 담당했던 남자처럼 지구에 남아있는 폐기물을 정리하는 월E는 남자를 의미하고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이브는 여자처럼 느껴졌을까?
최근 트렌드 때문일까? 초식남 같은 남자와 육식녀 성향이 강해지는 사회에서 느끼는 학습효과 때문일까?
초식남- 초식동물처럼 온순하고 착한 남자를 의미하는 신조어
육식녀- 육식동물처럼 적극성 강한 여성을 의미하는 신조어
이름 때문일까?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여성인 이브와 같은 이름을 가진 로봇이라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어쨌거나 같은 기계지만 낡디 낡은 월E는 아날로그를 의미하고 아이폰 같은 매끈함을 자랑하는 이브는 디지털을 의미한다. 둘 다 자신의 소프트웨어에 따라 움직이지만 결국 디지털을 이긴 힘은 아날로그다. 인간들도 마찬가지. (물론 선장을 제외한 다른 승객들이 디지털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포기하고 싶었을지 의문이지만) 생존에 최적화된 액시엄을 떠나 인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지구로 돌아간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기계가 고도화될 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문제를 <WELL-E>에서 제시한다. 먼저 노동의 종말이다.
액시엄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은 노동에서 해방됐다. 노동이라고 불릴만한 일이라고 해봐야 고작 선장이 아침에 승객들을 위해 방송하는 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주선 내에는 BnL 사의 광고가 넘쳐난다. 경제의 문외한이지만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바로는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근간은 소비다. 소비가 없으면 시장경제는 무너진다.
2016년 6월 5일 스위스에선 전 국민에게 매달 300만 원 기본소득 제도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유권자의 76.7%가 반대해 부결됐지만 이 뉴스는 당시 뜨거운 감자였다. 이는 단순히 복지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경제학자들이 이 소식에 집중한 이유는 노동 없이 소비만으로 시장경제가 유지될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후로 유럽의 복지국가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소득 제도 열풍이 잠시 불었다.
<WALL-E>의 BnL 사는 (Buy N Large) 금융, 마트, 유통, 석유 등 초일류 거대 기업이다. 돈에 BnL 마크가 찍혀 있는 걸 보면 사실상 국가나 다름없다. 이 회사는 액시엄 안에서도 과소비를 조장한다. 노동이 없다는 것은 소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 소비를 권하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 외상이라도 달아놓은 것일까? 여러 가지 가정이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노동 종말의 시대에 자본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얼마 안 있어 우리는 가장 완벽하다고 평가한 자본주의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경제 체제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새로운 체제가 만들어진 세상에서도 현재 계급이 전승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기계가 고도화되면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 문제는 인간과 기계의 구분이다. 많은 SF 작품에 중심 주제로 활약하는 이 문제는 <WALL-E>에서도 거론된다. 어쩌면 월E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알고리즘을 통해 ‘특별한 물건을 수집하라’ ‘움직이는 생명체에 애정을 가져라’라는 명령이 입력됐을지도 모른다. 이런 가정을 해봐도 월E의 감성과 마음가짐은 인간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인간과 기계는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공 팔, 인공 다리, 인공 심장을 달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체의 일부가 기계로 대체한 것이다. 과학이 더 진보해서 모든 장기와 신체를 기계로 바꾼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간의 인지상정을 완벽하게 알고리즘으로 만들어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인간과 흡사한 모습을 가진 기계를 인간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것일까? 알고리즘만 조작한다면 기계도 인간처럼 종교를 믿고 사랑을 나누고 음악을 만들고 예술을 그릴 수 있다.
기계는 2세를 낳을 능력이 없다고? 10개월의 임신과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진 않겠지만 기계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2세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걸 인간이라고 한다면 미래의 테크놀로지는 그걸 가능하게 만들지 수도 있다.
1942년 SF 작가 아시모프는 자신의 단편에서 로봇의 기본 작동 3원칙을 발표했다.
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인간이 해를 입는 것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2원칙: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원칙: 1원칙과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흔히 안전성, 편의성, 내구성으로 요약되는 3원칙이 나온 지 70년이 더 지난 2017년 1월 12일 유럽연합(EU)에서 인공지능(AI)을 가진 로봇의 법적 지위를 ‘전자 인간’으로 인정하고, 이를 로봇 시민법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선언이 나왔다.
인간과 로봇을 구분해야 하는 사회적 합의는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지루한 주제가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이런 합의는 기계와 인간의 공존을 위함이다. <WALL-E>의 엔딩처럼.
요즘 한 회사에서 나온 모든 이야기를 합치는 게 유행이다. 마블과 DC는 물론 최근 블리자드까지 이 대열에 끼고 싶은 눈치를 주는 지금 <WALL-E>를 만든 픽사 역시 자신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Jon Negroni가 쓴 <The Pixar Theory>에 자세히 나와 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하나의 세계에서 각기 다른 시간대에 진행된 이야기라는 이론이다. 그 분량이 너무 많기 때문에 <WALL-E>와 관련된 내용만 몇 가지 소개한다. 단순한 ‘이스터에그’가 아니라 같은 세계를 공유한다고 픽사에서 직접 밝혔다.
<WALL-E>의 엔딩을 보면 신발에 있던 식물이 커다란 나무로 자란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 나무도 다른 픽사 애니메이션에서 발견된다.
피자 플래닛은 <토이 스토리 1>에서 처음 나왔는데 이후 거의 모든 픽사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
영화 전체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오마주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함장이 처음으로 자신의 발을 딛고 일어서 'AUTO'와 맞설 때 나오는 음악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이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간의 진화를 상징할 때 나온 유명한 음악.
특유의 웅장한 사운드로 위에 언급한 두 영화는 물론 각종 광고, 심지어 WWE의 릭 플레어의 테마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액시엄의 장내 아나운서는 우주와 가장 장 어울리는 여배우 '시고니 위버'가 맡았다. 영화를 만들기도 전에 시고니 위버를 염두해놓고 있었다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빼면 BBC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에서 가장 상위 랭크된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