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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Jul 08. 2019

넌 뭘 지키고 있니? 윤성현- 파수꾼

사람마다 단어의 뜻은 다르게 저장된다. 누군가에게 결혼은 “남녀가 사랑을 통해 부부가 됨”이지만 다른 사람에겐 “두 사람이 사랑을 통해 하나 됨”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뜻이 바뀌는 단어도 있고 개인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사랑이란 단어를 예로 든다면 어떤 사람은 “꼭 맛봐야 하는 최고의 감정”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겐 “하면 후회만 남는 부질 없는 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쫄지마. ㅅㅂ

시사 요정 김어준은 자신감과 자존감을 다르게 설명했다.

그의 사전에서 ‘자신감’이란 자기가 가진 특정한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내가 공부를 잘하거나, 예쁘거나 부자거나.

남들보다 비교우위에 있는 자산 혹은 능력 때문에

상대방보다 우월한 감정, 즉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자신감은 취약한 감정이란다.

서울대생은 하버드생 앞에서 쪼그라들고,

100억 대 부자는 1,000억 대 부자 앞에서 비굴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존감은 비교우위를 통하지 않고

내가 나를 승인하는 감정이라고 시사 요정은 말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나 하자,

한계를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고도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자존감이라고.

김어준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기태는 자신감이 낮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윤성현 감독의 독립영화 <파수꾼>은

중년 남성의 멍한 표정을 비추며 시작한다. 

곧이어 카메라 초점은 고등학교 교실의 모습으로 이동한다. 

쉬는 시간에 소란스럽게 말뚝박기를 하지만

한때 친했던 것 같았던 친구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분위기를 지배한다


곧이어 나오는 장면은 한국 십 대 청소년 물에 단골 메뉴인 ‘폭력’이다.

영화 초반, 같이 놀자는 친구의 권유에 귀찮은 듯 반응했던

희준(=백희, 박정민 役)이 기태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한다.

이어 나오는 중년 남성의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백희라는 친구가 학교 폭력 때문에 자살을 했구나.’

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 중년 남성의 입에서 “장례식 때는 정신이 없어서. ...

네가 기태랑 친하다고 하더라고.”라며 말하기 전까지.

(사실 이것만으로도 기태가 자살했다고 판단하기 조금 부족하다.)
   


10대 중고등학생들을 주제로 한 독립 영화는

‘편의점, 왕따’가 대부분이다.

이런 트렌드에 대해,

독립 영화제 심사를 맡은 한 평론가는

20대의 독립영화감독들이 왜 그렇게

10대 중고등학생들의 왕따 폭력과 편의점에서의

노동착취 소재를 다루는지 의아해했다.

이에 해당 평론가는 이러한 영화를 만든 20대 감독들 모두

학교 폭력과 편의점 알바 착취를 직접 경험하였는지 묻기도 하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관객들은 <파수꾼>을

‘폭력의 대상이 되는 남자가 자살을 했고

아버지가 복수 혹은 아들의 죽음을 추적’하는 영화

라고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의외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학생은

폭력의 주체였던 기태였다.

이런 퍼즐이 맞춰지고 나면 관객은

‘자신이 행했던 폭력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왜 기태가 자살을 했지?’라는 의문을 가지고 영화를 감상할 수밖에 없다.




<파수꾼>은 기태, 동윤, 희준 세 남자의 학창시절 이야기이다.

남자들의 학창시절 이야기라.

여자도 마찬가지겠지만 학창시절의 남자란 참 유치한 동물이다.

성인과 다름없는 육체를 지녔지만

미성숙하고 불안정한 감정을 가진 남자 고등학생.

김어준 식으로 말하자면 자존감보다는

자신감을 갈망하는 이 영혼들의 주체는

반드시 타인의 위치에서 비추어주는 시선과 그 반영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폭력을 휘두르고 다른 친구들과 관계가 악화돼

폭력의 수위에 임박할 때마다 “날 봐.”라고 말하며

끈질기게 상대방의 시선을 요구하는 장면,

“너만 알아주면 돼.”라며 구애에 가까운 고백을 하는 기태의 모습은

성장기 남성 주체의 자기 확인 과정을 형상화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학원폭력을 다룬 영화들과 비교할 때, <파수꾼>은

“학교 제도와 교육문제보다

인간 심리에 관하여 탐구하는데 방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라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남자 역할에 대해 많은 선입견

혹은 사회적 기대를 가지고 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대범하고 용감해야 남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특히 불안정한 청소년기 남자는

생각보다 치졸하고 질투심도 강하며

특유의 허세 때문에 해야 하는 말,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남자들 간의 오해는 풀기 어렵다.

기태, 희준, 동윤이 그랬던 것처럼. 


파수꾼의 사전적 정의는

‘경계하여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 어떤 일을 한눈팔지 아니하고

성실하게 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영화에서 파수꾼은 누구일까?

기태의 아버지? 물론 기태의 아버지는 가장 열심히 단서를 조합해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사건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한다.

청소년들의 묘한 감정 층위의 드라마를

바깥에 있는 아버지가 알 방도는 없다.

심지어 그가 동윤으로부터

진실을 알았는지조차 영화는 생략한다.

영화 내내 아이들을 책임져야 할 유일한 어른인

기태 아버지는 시종일관 무능하다.

즉, 성장기 소년들의 불안정함을 이미 경험한 유일한 성인 남성인

기태 아버지는 파수꾼이 아니다.

소년들의 일탈과 반항을 끝까지 지켜보며

아이들을 보살피며 안전을 책임지는 파수꾼은 없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왜 영화 제목이 파수꾼일까?
   
사냥감이 있어야 사냥꾼의 존재가 의미가 있듯이

지켜볼 대상이 있어야 파수꾼은 의미를 갖는다.

기태, 희준, 동윤은 서로가 서로의 파수꾼이었다.

이 관계가 무너지자 기태는 자살하고 희준은 전학을 갔으며 동윤은 자퇴했다.

셋이 함께 하던 기차역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그들은 성장하지 못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이 기차역에서 끝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차란 미지의 공간으로 뻗어나가는, 성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기차는 ‘기차역’을 통과하는 것처럼

사람도 청소년기를 통과해 어른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수꾼> 엔딩 장면이 똑같은 기차역인 이유는

각자의 이유로 세 명의 청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은유한다.





너는 나에게 전부였지만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말을 들었던

기태의 극단적인 선택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다면 청소년기 감수성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 역시 자신감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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