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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rk Nov 05. 2017

서양의 법정스님

헨리 데이비드 소로-월든

자연이란 단어를 참 좋아한다. 스스로 자(自) 그리고 그러한 연(然) 자를 써 ‘스스로 그러하다.’ 란 뜻을 지닌 자연. 뜻 자체로도 신묘하고 도에 통달한 느낌을 준다. ‘스스로 그러하다.’ 란 의미를 자연과 하나 되려고 노력한 동양에 뿌리를 갖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자연이 지닌 힘을 정확하고 푸근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월든>을 곱씹으면서 읽을수록 입적하신 법정 스님이 계속 떠올랐다. 법정 스님께서 살아계실 적 <월든>을 가장 감명 깊게 읽으셨다고 했는데 현묘한 덕은 궁극적으로 통한다는 옛 선인들의 말씀이 떠올랐다. <월든>에서 데이비드 소로의 방대한 가르침을 법정 스님의 말씀과 함께 나누고 싶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나무는 푸르다. 

괴테의 <파우스트> 中  



 자연 안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소로의 모습은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면서 우리를 꾸짖는 선생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들을 모으느라 개인의 육체와 정신에 폭력을 가하는 모습들을 보면 소로는 우리에게 뭐라고 말할까? 

소로는 말한다. 

 “나에게는 내 나름의 취향이 있고 무엇보다 자유가 소중했기 때문에 특별히 비싼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이 구절을 읽고 내 가슴에 울린 공명은 분명 전에 느껴본 울림이다. 그렇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자연 안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길 원했던 두 분의 모습은 이처럼 많이 닮아있다. <월든>을 읽으면서 상당히 놀랐던 부분이다. 자연에 대한 당신들의 생각뿐 아니라 그 안에서 깨닫는 철학과 인생관 역시 대동소이하다. 동일 저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말이다. 두 분의 모습이 연꽃처럼 겹쳐 보이는 이유는 자연이 주는 가르침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언제나 같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자연을 그 자체로 훌륭한 스승이고 자애로운 어머니라고 칭하는 이유이다.     



고독했을 때 비로소 사람은 참다운 자신을 느낀다.


톨스토이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보다 밖에서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 대부분 훨씬 고독하다. 인간들 사이에 교제는 대체로 너무나 싸구려 티가 난다. 잠시 친구와 열중하던 잡담을 멈추고 자기 자신의 사상에 열중해보자. ‘덕은 외톨이가 아니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고 공자는 말했다.” 

 <월든> 中


우리는 하루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사하고,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한결같이 중얼거린다. “외롭다.” 사람들은 타인의 생각과 관심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 집단에서 격리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겉으로 드러난 사교성과는 달리 내면적으로는 고립감과 불안으로 '고독한 군중'이다. 모두가 SNS에 집착하고 내 메시지를 읽었는지, 읽었는데 왜 답장을 안 하는 것인지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 모두 ‘내가 집단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에서 비롯된 현대인의 병이다. 뿐만 아니라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이 세상에서 조용함을 즐기는 내향적인 사람들을 부정적인 성격으로 치부해버린다. 이로 인해 인간관계 때문에 우울함과 좌절감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남을 의식하는 삶은 결국 나 자신을 지우기 때문이다. 이에 소로는 인간의 청춘과 활력을 되찾게 하는 힘을 지닌 어머니 자연에서 혼자 산책하길 권한다. 더럽혀지지 않은 자연 속에서는 마음을 다독여 주는 한없이 포근하고 다정한 친구를 발견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이란 수필에서 고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홀로라는 낱말 자체는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은 것을 뜻한다. 당신이 홀로일 때 비로소 세상에 살면서도 늘 아웃사이더로 있으리라. 홀로 있을 때 완벽한 생동과 협동이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고독을 고립과 같은 단어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고독과 고립은 전혀 다르다. 또다시 법정 스님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고독은 옆구리께로 스쳐 지나가는 시장기 같은 것, 그리고 고립은 수인(囚人)처럼 갇혀 있는 상태다. 고독은 때론 사람을 맑고 투명하게 하지만, 고립은 그 출구가 없는 단절이다.”, 즉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항상 전체적인 자기가 아니라 부분적인 자기이길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사상을 완성시키기보단 타인이 원하는 인간상을 자신에게 입히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맞지 않는 옷은 불편하고 거북해서 많은 병리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를 비롯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그래서 아마 자신을 치장하고 원치 않은 만남을 지속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꿀벌과 나비는 꽃의 화려함에 이끌리지 않는다. 꽃이 꿀을 품고 있으면 소리쳐 부르지 않더라도 벌과 나비는 저절로 찾아간다.     


자기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발견하고, 그러한 삶을 관철했으면 한다. 

<월든> 中  


 이 외에도 <윌든>에는 우리의 삶을 관철시키는 다양한 조언을 담담하게 말해준다. 노동의 가치, 건강한 관계,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 까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 가를 소박한 문체로 온화하고 힘 있게 전달한다. 서두에 밝혔지만 <월든>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소로가 우리에게 권하는 삶의 방식이 법정 스님의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자연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그분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분들을 닮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해준다. 


살아있다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길 원한다. 우리는 ‘행복한 삶’이라는 기치 아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고 생성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행복의 원천인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의 품은 정수를 약탈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인성을 돌보지 못했고 어머니 자연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편리하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이 ‘행복’이란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하지만 우린 자연과 함께 사는 것, 고독하고 사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다. 자연과 함께 살자는 것이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게 살자는 것이 모든 인간관계를 끊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자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고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키자는 의미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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