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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잡러 민수르 Feb 14. 2021

나의 학창 시절

스무 살에 떠난 세계여행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삶의 본질로 여겨지는 행복이라는 요소.

삶을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하면 행복 아니면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행복은 나와 거리가 먼 영역이라고 판단했다.

판단 짓는 근거로는 학업 스트레스가 주요인이었다.

진드기 같은 학업 스트레스가 처음부터

따라다녔던 것은 아니었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쌓이고 쌓여 누적되는 개념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이때가 나의 10대에서 가장

꽃 같은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함박눈이 쌓여 운동장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 날, 엄마 손 붙잡고 등교하던 나의 마음은

운동장과 같이 순백했었다.

별 모양이 그려진 파란 책가방과 유희왕 실내화 주머니를 가지고 등교하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유치원생이 아닌 학생이 되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였다.  서른 명이 넘는 친구들이 한 반에 모여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  학교에서 느껴보는 공동체의 소속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였을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학급 반장이라는 중책을 도맡았다. 모든 교내 대회에 참가했고, 모든 행사에 적극적이었다.  공부에도 흥미가 있었다. 학교에서 과제로 수학 익힘책 10쪽을 풀어오라고 하면 20쪽을 풀어갔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미쳤었나?'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 시절이었다.   


근심 걱정 없던 삶에 불행이라는 요소가 개입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다.

공부가 스트레스로 작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나중에 고생 없이 살 수 있어.'

' 좋은 대학을 가야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어’

'면접 볼 때 가산점을 따기 위해선 지금부터 스펙을 쌓아야 해'


이전에는 가볍게 들려오던 어른들의 핀잔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맞춤화 되어갔다.

'멋있다'라는 단편적인 것만 보고 가졌던 '과학자, 대통령, 육상선수'라는 꿈은 현실성을 반영해

'여행작가, 외교관, 관광통역사'라는  꿈으로 바뀌었다.

이에 맞춰  놀이 정도로 생각했던 학생회 활동을 비롯한  교내. 외 활동은 스펙으로, 게임 퀘스트로 생각했던 공부는 등수라는 잔혹한 요소가 담긴 스트레스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 이상 나의 의지에 의한 자발적 공부는 불가능했고 사회에 맞춰가게 되는 압박적 공부를 감행하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중학교 3년간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나는 공부를 하던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교 후 집보다 오래 머물렀던 공간은 영어 공부방, 학원이었다. 영어 공부방에서는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자습서의 모든 글자를 하루에 10페이지씩 외워야 했다.

공부방 선생님 앞에서 필기, 암기 시험을 매일 봤어야 했고 제대로 외우지 못했을 경우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말만 들으면 '바보 같이 왜 당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반항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군인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 유사한 체제였다.


그렇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학교, 학원에서 보냈다.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항상 11시가 넘었다. 집은

오로지 취침을 위한 공간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덕분에 학업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성적표를 받으면 항상 상위권에 위치해 있었다. 시험지를 받고 OMR카드를 완성하기까지는 15분이면 충분했다. 매일 교과서의 모든 글씨를 외우다 보니 문제를 끝까지 읽기도 전에 항상 답이 보였다. 그렇다고 기뻐해 본 적은 없었다.  노력에 대한 타당한 대가라는 보상심리가 강했었으니 말이다.


다른 성적에 비해 영어 성적이 높은 편이었다. 3년 동안 단 한 번의 시험을 제외하고 100점을 유지했었는데  성적에 따라 자연스럽게 '외고 진학'이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영어에 큰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성적에 의거하여 가지게 된 꿈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3년의 고생 끝에 고대하던 외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노력이 결실을 맺는, 합격 사실을 확인하던 순간이 3년간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말 짧았던 일시적 행복이었다.

특목고를 가면 인 서울 대학 진학이 보장된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좋은 대학이 보장될 줄 알았던 외고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가혹하고 치열했다.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성공사례에 현혹되어 허황된 망상을 가졌던 날들에 대한 후회도 하게 되었다.


특목고의 실상은 이러했다.


시험을 치르고 나면 학급 게시판에 전교생의 성적이

오름차순으로 공개되는 곳.

휴대폰 소지가 불가능한 곳.

일요일 오전 시간을 제외하고는 외출이 불가능한

 기숙사 학교.

토익 점수로 모범상 대상자가 정해지는 곳,

동일한 잘못을 범해도 성적으로 선처받을 수 있는 곳.

학우들 사이에서 창살 없는 감옥으로 불리는 곳.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이상과의 괴리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왜 주변에는 현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매스컴은 왜  성공사례만 조명할까.

왜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성적만을 강요할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적을 강요하는 더러운 세상. 꼭 1등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을까?'


주입식 교육에 의한 꿈을 가지게 되고, 관심분야를 찾을 여유조차 없는 현실에 대한 의문감은 더더욱 증폭하게 되었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 공부 포기를 선언하게 되었다. 더 이상 학교의 커리큘럼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여행을 접하게 되었다.


친구와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 먹을 여유조차 없었던 학창 시절.학업에 정진했지만 행복은 찾을 수 없었던 학창 시절이 야속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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