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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도 빈부격차가 있다

쿠바 트리니다드에서 털린 썰

by 유월
뜨리니다드. 돌바닥, 웜톤의 벽, 붉은 지붕, 높은 지대가 만드는 동화같은 풍경


욕망에도 빈부격차가 있다.


더 가질수록, 뭘 더 가질수 있는지 알수록 욕망은 구체적이고 강렬해진다. 시골에 사는 쿠바인들은 맛있는 음식이라든지 다른 나라에 가보고 싶다는 막연하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을 가지는 반면, 관광 도시에 사는 쿠바인들은 ‘스마트폰 케이스’를 바란다.

뜨리니다드에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며 호텔 출신 쉐프가 만든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완전히 여행객들에게만 허용된 곳이다.


고급진 곳이니만큼 식당 전용 와이파이 존을 제공한다. 인터넷 기근에 시달렸던 차라 직원에게 연결을 부탁하며 핸드폰을 건냈다. 흥분한 표정의 직원이 내게 부탁하기 시작한다.

저녁과 드링크를 살 테니 스마트폰 케이스를 제게 주면 안될까요?

올해만 세 번 박살 난지라 출국 전날 급히 사왔던 스마트폰 케이스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남은 여행기간 동안 내 스마트폰이 또 발가벗겨지는 것 아닌가. 하도 사정하는 통에 내일 출국하는 친구가 본인의 스마트폰 케이스를 내게 내어주었고 (그 직원은 굳이 내 것을 갖고 싶어했다..), 그 친구의 식사분까지 직원이 같이 대접하는 것으로 행복하게 마무리됐다^^


…가 아니라 그에 앞서, 대체 이 쿠바인 손에 왜 아이폰 6S가 있는가. 있다손 치더라도 인터넷 이용요금이 어마어마해 전혀 스마트하게 쓸 수 없을 이 사치품이 왜 필요한가.


쿠바는 어딜가나 치열하게 흥정을 해야 하는 장삿속들이지만, 그래도 악질의 사기나 범죄는 거의 없다. 대체로 마을은 안전하고 사람들은 순박하다. 그럼에도 ‘견물생심'이라는 굴지의 명제는 쿠바에도 예외가 없다. 특히 본인의 처지와 간극이 큰데 ‘견물’할 상황에 많이 노출된다면 충동은 더욱 심하다. 스마트폰을 봤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갖고 싶은 게다.


그리고 뜨리니다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일어났다. 클럽에서 친구가 스마트폰을 소매치기 당했다.


우연히 버스에서 만난 삼총사와 뜨리니다드에서의 5일을 함께했다. 한 명은 상하이 출신의 노라, 또 한 명은 웨일즈 출신의 아넷으로 낮에는 다 따로 다니다가 매일밤 8시에 만나 나이트 라이프를 함께 했다. 나와 노라는 아시아인이 드물어서 시선을 많이 받고, 아넷은 예뻐서[…] 피곤한 탓에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자는 모종의 합의랄까. 무튼 하루는 산등성이에 천연 동굴로 만들어진, 아마 현재 쿠바 최고의 핫플레이스일 ‘클럽 아얄라'에 갔다.



신명나게 놀고 있는데 노라의 스마트폰이 사라졌다! 핸드폰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와 없어진 걸 발견했던 때 사이에 함께 춤을 췄던 빨간 모자가 훔쳐간 것 같아서 스태프에게 인상착의를 말하고 그를 찾으러 다니는데, 왠걸 그 레드 가이가 입구로 스윽 나오는 것 아닌가. 아넷이랑 내가 따라가며 ‘너 내 친구랑 춤춘 애 맞지’ ‘너가 폰 갖고 있지’ 하니까 ‘아닌데? 아닌데?’ 하더니 갑자기 달린다. 무작정 쫓아갔다. 거짓말처럼 갈림길이 나와서 거기 서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오른편이란다. 아무리 가도 뒷꽁무니가 안보이길래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왼편길로 올라오던 사람에게 혹시나 하고 물어보니 역시나 그 빨간 모자가 달려가더란다. 이색갸….절체절명의 상황에 거짓말을 하다니… 뒤늦게 도착한 경찰에게 인상착의와 상황을 개발새발 설명하니, 알아듣는지 아닌지 모르겠던 이 경찰은 무전을 몇 번 치더니 놀랍게도 빨간 모자를 찾았단다. 읭? 정말?


이렇게 금방 잡은 걸 보면 2가지 중 하나다.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상습범이거나, 서툴러서 금방 꼬리가 잡힌다거나. 훔치고 나서 한동안 클럽에 머물러 있었다든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훔친 핸드폰도 숨기지 않는 등 허술함을 생각하면 후자일 듯 하다. 가져가서 중국에 팔 것도 아니고, 정말 그냥 스마트폰이 가지고 싶었던 갓 스무살 넘긴 좀도둑이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팔아 돈을 얻기 위한 거라면, 그리고 이게 조직화되어 있다면 그게 바로 범죄다.


미국의 엠바고에 대한 자구책으로 전 국가 차원에서 밀기 시작한 이 나라의 여행업이 쿠바인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고급 레스토랑의 직원도 그렇고, 빨간 모자 아이도 그렇고 욕망을 실현할 길이 요원하면 편법이 발생한다. (물론 지금 한국도 그렇지만) 공부 열심히 하고 일 많이 한다고 해서 도무지 스마트폰을 가질 턱이 없는 거다. 그 새벽에 범인 얼굴 확인하고 휴대폰 찾으러 셋이 경찰서를 다녀오면서, 다행이면서도 씁쓸했다.



# 그래도, 돌덩이 하나만 밟아도 10cm 정도 위로 솟구치던 디스코팡팡 경찰트럭을 탄 건 지금 생각해도 재밌었다. 영상이 어둡지만 사운드에 현장감이 잘 살아있다.
# 다음날 노라는 조서를 쓰러 다시 경찰서에 갔는데 오전 8시에 가서 오후 2시에 나왔다고 한다. 느린 일처리와 언어 장벽이 만난 결과다. 그날 그 동네 모든 경찰을 다 만난 노라는 뜨리니다드에서 가장 안전한 걸이 되었다.

클럽 아얄라 입성부터 경찰서 대연행까지


# 가이드북에는 없던 소소한 뜨리니다드 여행 팁
- 물자가 부족한 쿠바라 스마트폰 케이스같은 부가가치 상품이거나, 짝퉁 명품이 각광받는다. 중국산이 국산, 즉 쿠바산보다 양질이다. 감사할 현지인에게 선물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여분을 가져가면 좋아할 듯.
- 일단 쿠바 땅에 발이 닿으면 인터넷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 앱 다운로드가 안된다. 내 경우에는 카톡도 막혔다. 와이파이가 아닌 GPS 기반의 오프라인 맵이라든지, 스패니쉬 번역 사전은 미리미리 다운받자. 경찰서가서 조서 쓸 일이 없으리라 자신하지 말지어다 (흑)
- 클럽 가는 길에 $1 모히또를 파는 노점이 죽 이어진다. 한두잔씩 마시며 올라가다보면 따로 웜업이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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