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떡 건축, 회색 도시의 미래>를 읽고
1.
15년 지난 지금까지도 '도시 재생'에 빠지지 않는 사례가 있다. 도쿄 대표 환락가 롯폰기를 다시 태어나게 한 '롯폰기 힐즈'. 3만평 남짓하는 롯폰기 힐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도시다. 수평 거리로는 비교적 좁지만, 그 안에 엄청난 밀도와 복합성을 구현했다. 50층 넘게 우뚝 솟은 빌딩들의 저층부는 상업 시설로, 중간층은 오피스로, 고층부는 호텔 및 주거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미술관, 도서관, 정원 등 문화예술 공간도 살뜰하게 갖췄다. 평일 유동인구만 일평균 12만명. 어마어마하다.
'돈으로 발랐군'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의 진정성이 있다. 롯폰기 힐즈 탄생 배경에는 수직도시론이 있었다. 단순히 땅값이 비싸니까 높이 짓자는 것이 아니다. 지식산업사회에 지식 노동자들에게 적합한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지식 노동자들은 머리와 감성을 가지고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만큼 여가 시간도 중요하다. 여가 시간이 휴식의 기능도 하지만 일을 위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직도시를 건설해 출퇴근 시간의 낭비를 줄이고, 절약한 시간만큼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무언가를 배우며 여러 사람과 교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결국 일터, 주거지, 놀이시설, 휴식 공간의 경계를 없애 지식산업사회에 적합한 환경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롯폰기 힐즈에서는 도쿄 전망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도서관과 미술관에 가고, 정원에서 쉬기도 하고, 컨퍼런스도 간다. 멀티플렉스가 결합된 쇼핑몰과는 또 다르게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누군가는 여기서 일을 하고, 누군는 여기서 산다. 참 바람직한 방향성이다.
하지만 어쩐지 여기에 살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생활하기에 엄청나게 편리한데, 휴머니티가 부족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휴먼 스케일을 넘어섰다. 그도 그럴 것이 롯폰기 힐즈는 '모리'라는 굴지의 부동산 개발회사가 지자체와 손잡고 장장 17년동안 지역 주민을 설득하며 만들어 낸 대작이다. 규모는 차치하더라도 상설 전시가 없는 미술관이라든지, 고급 레스토랑과 바의 전유물이던 빌딩 최고층부(49층)을 도서관으로 꾸민다든지 하는 건, 공권력+자본+모리의 집념, 이 쓰리콤보가 아니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다.
그래서 무지개떡 건축이 반갑다. 내가 언감생심 롯폰기 힐즈는 못 짓겠지만, 살아 생전 무지개떡 건축은 의뢰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2.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과 삶은 분리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내 사생활을 침범하는 느낌, 집에 오면 늘어지는 느낌 때문에 집으로 일을 가져가지 않았다. 집에 다 와서도 집 근처 카페를 전전하며 기어이 일을 마치고 들어가곤 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발목 인대가 끊어져서 수술을 받고 어쩔 수 없이 한 달 재택근무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출퇴근을 하지 않음으로써 삶과 업무의 질이 수직상승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가장 머리가 맑고 에너지 뿜뿜 솟는 귀중한 시간에, 길거리에 온 에너지를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는 안 되겠다 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일할 수 있는 것도 장점. 퇴근할 무렵이면 이미 파김치라 '집으로 순간이동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진부할 만큼 흔한 일이었는데, 그런 초능력이 없어도 된다. 육아를 병행해야 한다든지 하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재택(직주근접)은 생각보다 더 옳았다.
물론 한 건물 안에 한 개인의 직/주가 붙어있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이런 건물이 많아진다는 것은 현재 집중화 되어있는 상업시설과 주거를 분산하는 것이고, 그러면 자연히 사람들의 평균 직-주 거리가 좁아질테다. 물론 아직 무지개떡 건축에 대한 선택지가 많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럼에도 머물고 싶은 공간의 특성을 '무지개떡 건축'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게 된 건 큰 수확이다. 이번 시즌이 끝나기 전에 살고 싶은 집, 일하고 싶은 공간, 기꺼이 추억을 쌓아 갈 만한 지역과 도시에 대해 내 나름의 초안을 만들어야겠다 싶다.
3.
상수동 살던 힙스터 지인이 있는데, 수원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어쩔 수 없이 용인으로 이사하고 나서 그렇게 슬퍼할 수가 없다. 정말 한 3개월 정도는 상수동과 이별하는 슬픔으로 SNS 타임라인을 도배했다. 분명 집 자체로만 보면 용인집이 더 넓고 쾌적한데다, 일터와도 가깝다. 하지만 이 널따란 집이 다 무슨 소용인가. 직주근접만도 답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도시에 살아야 하는 도시 근린형 인간들이다.
나이 들어서도(=돈이 생기면, 선택지가 있다면) 남양주/방배동보다, 상수동/서촌/해방촌에 살고 싶다. 하지만 막상 그 곳에서 내가 살 집이 그려지지는 않는 것이 함정. 레퍼런스가 부족하다. 당장 살아야 한다면 어딘가 본 적 있는 옥탑방, 연립주택 단칸방을 떠올리겠지만, 나이 들어서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 하면 잘 모르겠다. 내가 그 지역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주거의 질이 그렇게 간단히 접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지역에 어울리는 좀 더 참신한 건축 형태에 갈증을 느끼던 차에 무지개떡 건축 사례를 보고 목을 한껏 적셨다. 아직 훨씬 더 과감한 상상력이 필요한 지점이구나 싶다.
4.
롯폰기 힐즈를 만든 모리의 모리 미누로가 고안한 수직도시론은, 1920년대에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한 초고층 도시계획론의 연장선상이라고 한다. 무지개떡 건축도 형태는 다르지만 철학은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도시 한 가운데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인사동처럼 상가만 남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녕 아파트 말고 밀도를 공급할 뾰족한 대안이 없을까?"
서문에 나온 이 고민만으로도 롯폰기 힐즈 못지 않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 작년, 디자인을 단순 비주얼이 아닌 '문제 해결의 관점'으로 보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는데, 올해는 건축을 '새로운 생활과 시대적 패러다임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바라보는 원년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