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 쓰지 그랬어
에세이는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글쓴이가 묻어나야 한다. 그 사람만의 경험이든, 관점이든, 유머든, 글투든 누구 것인지 모르겠다면 진정한 에세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글에서 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게 괜시리 어색해서 정보로 꽉 채우거나 매우 보편적인 이야기로 뭉개 버리곤 한다. 내 얘기를 뭐 그렇게 궁금해하겠나, 이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제 친구들에게 이 10쇄야[..]라고 불린다는 소영이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그를 궁금해한다. 책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에세이스트로서 우위를 선점한 셈이다. 아나운서였고, 현재도 공인이고, 말 많고 탈 많던 시절에 MBC를 퇴사했고, 오상진님과 결혼했고, 돌연 당인리 책발전소라는 책방을 열었다. 이 여러 겹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을 펼쳐들었고, 많은 사람들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랬다면 일단 이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힘들 때고 기쁠 때고 원체 말을 무덤덤하게 하는 스타일인데, 글은 어쩜 이렇게 절절한지. 눈 앞에서 같은 질문을 했더라도 이런 소상한 대답은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유난 떨지 않으면서도 담백하게 자신을 잘 담아낸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남편과의 꽁냥 파트는 글로 봐도 예능 <신혼일기>를 보는 것 마냥 눈 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이건 마치.. 해리포터 영화부터 보고 책 읽으면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엠마 왓슨이 VR로 어른거리는 것과 같은 효과. 대리만족에 아줌마 미소가 절로 탑재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자칫 산만할 수 있는 이 모든 겹을 잘 엮어낸 책이다. 남편과의 도쿄 책방 여행기를 큰 줄기로 하여 책과 관련한 개인적인 감상과 경험들, 퇴사 이야기, 연애와 결혼 이야기, 책방을 열기로 결심하게 되는 과정,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이 무리없이 잔가지를 친다. 시공간을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며 이야기를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만든다. 필력도 좋아 쭉쭉 읽히고 은근 웃기기까지 하다. 소영이가 다독, 다작, 다상량의 표본이라고 늘 생각했는데, 그 뿌리가 이렇게 발현되나보다.
얼마 전 소영이를 볼 일이 있었다. 끝없이 밀려드는 바쁨과 고민, 설렘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 가운데 자영업 사장님도, 스타트업 대표도 아닌, 회사원이나 셀럽은 더더욱 아닌 어떤 모습이 언뜻 스쳤다. 생계를 걱정하는 건 아니고, 어떻게 하면 돈을 더 잘 벌고 유명해질까 세속적인 고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까, 이 책방은 어디를 향해 달려 나가야 할까, 하고 진짜 본질적인 질문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 때 코끝이 찡했다. 너무 자유로워 보여서. 맴도는 말이 아니라 뻗어나가는 말인 것 같아서. 지금의 고민들이 또다시 몇 년 뒤 '진작 할 걸 그랬어'라는 말을 만들겠지. 이제 막 인생 2장을 열려는 이의 생명력을 느끼고 싶다면 <진작 할 걸 그랬어>를 읽어보자. 진짜 실시간. 여전히 따끈따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