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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Oct 11. 2024

[장편소설] 붉은 눈 1부 -1-

현장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회를 계획하고자 하는 가장 열광적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된다. 성자와 같은 일편단심의 이상주의자로부터 미치광이 광신자까지의 거리는 단지 한 발짝에 불과할 때가 많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예의 길


  ■ 시놉시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헌법이 개정되고 대한민국은 총통이 통치하는 권위주의 독재 국가로의 본격적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권력은 저항을 원천 봉쇄하고 통치의 효율화를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안 보실 산하 국가수사정보본부 즉, ‘국수본’이라는 권력기구가 만들어졌다. 집회와 시위는 원천적으로 금지되었고 정권은 곧 국가로 여겨졌다. 사회는 빠르게 우경화되었다. 간간히 시위가 일기는 했지만 체제의 안정을 위협하는 레지스탕스와 시위대에 국가 안보법이 적용돼 무거운 형량이 가해졌다. 국수본 요원인 정엽은 불법 시위를 조사하던 중 인간과 능력을 뛰어넘는 운동신경을 가진 정체 모를 자들이 있음을 파악한다. 정엽의 상관인 2과 김상효 부장은 불법 폭력 시위와 개성 서해산업 폭발의 관련성에 의심을 품고 직무정지 중인 정엽을 개성에 보내 사건조사를 맡긴다.


 개성공단은 2000년대 남북 모두 체제유지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북한에서 발생한 쿠데타 이후에도 확장되는 중이었다. 공단에서 의료제품을 생산하는 서해산업은 국가 안보실의 사주로 비밀리에 마약을 제조하고 유통하는 정치 자금줄이었다. 총통의 건강이 악화되고 통치가 어려워지자 안보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공작을 마다하지 않았다. 안보실장은 학생운동 중 프락치 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제약회사 사원 김수필을 서해산업 대표로 영입했다. 그는 비밀리에 마약을 제조 유통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안보실은 또한 미국의 뇌 과학 전문가인 마르크 박사를 설득해 냉전시기 CIA가 진행한 것과 유사한 의식 통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기존 프로젝트는 김경섭 교수를 통해 진행됐지만 실패하고 안보실은 대안을 찾는 중이었다.


개성은 김정일 사망 후 5군단 사령관인 김병철이 숙청을 대비해 개성일대를 점령하고 독립을 선포한 상태였다. 개성과 평양의 내전이 계속되자 UN 안보리는 남한을 포함해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개성에 파견했다. 1차 조사를 마치고 개성에서 돌아온 정엽은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문의 메모리를 입수하고 이를 통해 개성 평화유지군 무궁화부대 부사령관 이병수와 북한 5군단 김병철의 유착을 알게 된다. 이후 암호화된 메모리의 나머지 부분을 풀기 위해 노력한다. 정엽은 경찰시절 상관이었던 김주영이 마약 공급책 검거 작전 중 사망한 것에 대해 오래전부터 의심을 품고 있었다. 주영의 아들인 수원도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경찰이 되었고 이들은 협력해 김주영 경위 사건의 실체를 추적해 나간다. 정엽의 연인인 방송사 기자 연희는 자신의 아버지가 국가 주도 사업을 진행하다 권력에 의해 제거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르크 박사와 연희의 아버지 김경섭 박사는 같은 분야를 연구했고 마르크는 오래전 미국에서 그 사실을 연희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정엽과 수원은 김주영 사건을 지위했던 오정훈 경무관의 의혹에 조금씩 다가선다. 오정훈은 안보실장 김전호의 지시를 받고 있었고 의식통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한편 강석철은 북한군을 탈영해 개성에 숨어들다 서해산업 마르크 박사의 실험체가 되지만 살아남는다. 그는 연구소를 탈출해 김병철 사령관의 특작부대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붉은 눈’으로 불리게 된다. 김병철은 권력을 손에 넣은 뒤 통치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남한 평화유지군 부사령관과 협력한다. 또한 ‘붉은 눈’을 이용해 남한으로 마약을 배송시킨다. 개성에서 여러 사건을 겪은 후 마르크 박사는 김수필의 마약 유통과 자신의 실험에 회의와 우려를 느끼고 강석철과 함께 연구소를 폭발시킨다. 정엽과 수원은 사건 조사 과정에서 김주영의 죽음이 개성에서 마약이 운반된다는 비밀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이후 서해산업의 비밀을 더 파고든다. 한편 안보실장 김전호는 정권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김병철과 협상을 벌이고 ‘붉은 눈’을 활용해 남한 사회 불안을 자극하려 한다. 안보실장 김전호는 마르크 박사로부터 받은 자료로 ‘붉은 눈’ 조직을 비밀리에 만들려 하고 있었다.



프롤로그

 대한민국은 총통이 통치하는 권위주의 국가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시위는 유혈사태를 낳았고 진압되었다. 천안문 사태는 이 사건의 복사판과 같았다. 중국 공산당은 대한민국의 대응을 본보기로 삼았다는 말도 떠돌았다. 6월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투옥됐다. 몇 달 후 권력은 성명을 발표한다. 북한의 사주를 받아 사회혼란을 일으키는 불순분자들을 막고 국가 전복세력으로부터 자유대한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정권은 혼란을 수습한다는 이름으로 빠르게 여러 조치를 단숨에 밀어붙였다. 반발을 누름과 동시에 헌법을 개정했다. 거침이 없었다. 위험요소를 없애기 위해 이들은 정권을 국가와 동일시하도록 했고 사회시스템을 손보기 시작했다. 일본의 자민당 장기 집권체제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혼란이 수습되자 일부 군부 세력은 전역 후 정치에 뛰어들었다. 자신들에게 충성하면 어김없이 보상이 뒤따랐다. 사회는 변하기 시작했다. 획일적이고 수직적인 규율과 통제의 문화가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대통령 전두환은 10년의 임기를 끝내고 종신 총통이 되었다.


교육은 총통의 국가관과 한국 상황에 맞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강조했다. 총통의 보위를 수호하고 일당 독재를 정당시키는 작업이었다. 사회 안정 및 국가안보가 최우선의 정책 목표였다.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게릴라성 시위를 벌이기는 했지만 권력은 강건했다. 레지스탕스는 곧바로 싹이 잘렸다. 동시에 언론에 대한 통제가 이뤄졌다. 통치를 수월하게 만들 목적으로 국가 정보국이 설립됐고 감시망체제와 검열을 통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옥죄었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권력에 충성하는 이들에게는 막대한 이권을 보장했다.

남북은 공생적 협력관계를 이어나갔다. 겉으로는 상대 정치권력을 비판했지만 물밑으로는 대화채널을 열어두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로를 활용했다. 1990년대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수십만 주민이 죽음에 이르렀다. 체제의 위협을 느낀 평양의 권력은 이후 남한과 공단을 만들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남한 역시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는 중이었다. 외자유치가 절실해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를 띄웠다.


2000년대 초반 개성공단은 정치적 이해관계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다. 한편 체제의 위기는 바이러스처럼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후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고 혼수상태에 빠졌고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김정은과 김정철 파는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지지 세력이 나눠지고 권력투쟁은 점점 심해졌다. 그 과정에서 함경북도 6군단 사령관은 자신의 숙청을 예상하고 반란을 노리고 있었다. 김정일의 측근이었던 김병철 5군단 사령관 역시 김정일 사망 후 틈을 노려 관할구역인 개성지역과 공단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둘은 오래전 러시아에서 같이 유학을 해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남한사회 위기는 더 심각했다. 총통이 노쇠하고 판단력이 흐려지자 국내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억눌려 있던 불만들이 서서히 튀어나왔다.


법으로 막아 놓았던 집회와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공안 통치가 강화됐다. 경제는 위기에 빠졌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세수확대를 위한 약물사용 규제를 정책적으로 완화하자 중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빈부격차는 계급을 고착화시키며 사회적 활력을 짓눌렀다. 의료보험이 민영화된 이후 부작용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치료비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은 고통을 줄이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손쉽게 처방받기 시작한다. 수입규제가 느슨해지자 약물과 더불어 총기밀수와 사용도 늘었다. 불법 무기들이 사회에 돌아다녔고 총기 사용건수가 빠르게 늘어났다. 보복 살인의 숫자도 빈번했다. 펜타닐, 오피오이드, 필로폰, 헤로인 등이 사회 곳곳에 빠르게 퍼졌다. 중독자들은 도심 곳곳의 공원에서 노숙을 했고 좀비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일부는 광장으로 모여들어 천막과 텐트를 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 중이었다.


1

 현장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11월 이른 추위가 찾아온 광장에 거센 바람까지 몰아쳤다. 하늘은 빗방울을 갓 떨굴 듯 한 얼굴이다. 하늘의 회색 빛 농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짙어졌고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뺨을 때렸다. 비릿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에 스며들었다. 눈 먼지는 기피지역이 된 광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꽃먼지로 시야는 흐릿해졌다. 서울광장은 버려진 공간이었다.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벌이는 퍽치기는 가벼운 농담 수준이 된 지 오래다. 마약에 찌든 사람들이 난동을 벌이고 노숙자들은 음식과 돈을 구걸했다. 이들사이에 거친 욕설과 함께 드잡이가 자주 벌어졌다. 술 취한 목소리와 욕설이 성근 칼날처럼 퍼져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고막에 박혔다.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과 파열음처럼 이들의 걸쭉한 욕설은 광장 한편에서 공명하며 퍼져나가기가 일쑤였다. 진눈깨비가 내리자 광장을 에워싸며 술판을 벌이던 사람들이 지하로 몰려가고 흩날리는 눈발은 곧 광장을 점령했다.  


 광장 곳곳에는 빛바랜 텐트가 수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 온 뒤 솟아난 버섯과 죽순 같았다. 곳곳에 컵라면 용기와 음식물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악취와 비릿 내가 코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관리가 되지 않아 깨진 보도블록과 시멘트 덩어리는 오랜 시간 방치돼 있었다. 부서진 파편들은 사람들의 발길에 차였고 다양한 무정형 형태의 조각들은 버려진 폐교의 방치된 조각이나 청동상을 연상시켰다. 광장의 한 구석은 이미 부랑자와 노숙자들 그리고 갈 곳을 잃어버린 노인의 거주지와 다름없었다. 관리예산도 부족해 공권력이 이들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초겨울 맥코트를 걸친 남자와 검은색 두꺼운 스타킹을 신은 30대의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은 채 인상을 쓰며 옷깃을 여미고 총총히 광장을 가로질러 지하철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초겨울 외투를 입은 사람이 두터운 숄더백을 메고 노숙 인을 힐끗 쳐다보며 시선을 회피한 채 빠른 걸음으로 시청 역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슬럼화는 손쓸 새도 없이 빠르게 진행됐다. 다른 대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치안이 불안해지고 도심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부랑자와 노숙자가 늘고 범죄율이 치솟았다. 소규모 상권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도심 주변부는 쇠락의 길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부가 세수를 확대하기 위해 대마합법화를 발표하고 약물규제를 풀자 2000년대 중반부터 부작용이 서서히  사회 전반에 퍼지기 시작했다. 마약은 어느새 기호품이라는 말이 돌았다. 경찰들도 귀찮은 듯 중독자들을 모른 체하기 일 수였다. 수십만 명을 전과자로 만들 수도 없었으며  모든 음성거래를 단속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중독자들은 공원에 텐트를 치고 숙식을 하기 일 수였다. 단속은 시늉뿐이었다. 노숙인과 중독자들이 몰리면 물대포를 쏘고 텐트를 밀어냈지만 그들은 슬금슬금 다시 근처 공원과 고궁 그리고 광장으로 기어들어왔다. 사람들은 마약의 일상화라는 말로 비꼬듯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지만 검열로 인해 대놓고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각종 불이익을 감수하고 침묵하는 게 이익이라는 것을 체득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공동체보다는 나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눈감았다. 각자도생의 시기가 펼쳐졌다. 약에 취한 사람들은 대낮부터 광장을 배회했다. 일부는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과 팔을 흔들거나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정형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포털과 영상공유 사이트에 누군가 이들의 영상을 올리면 정보국에서 검열을 통해 삭제하기 바빴다. 이들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정엽은 진압용 버스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한 층 더 심해질 것이라는 라디오 뉴스가 시그널음악에 실려 장단을 맞추듯 귓가에 맴돌았다. 휴대폰으로 날씨를 확인했다. 경찰서 근처 숙소에 머문 지 4일이 지났다. 작전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오기 시작할 때였다. ‘아무런 소식도 없는데 대체 누가 대규모 시위를 주도한단 말인가.’ 정엽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해 피로감이 몰려왔다. 진압용 차량에 잠시 들어가 시트에 몸을 비스듬히 뉘었다. 소파는 낡고 해졌다. 소똥이 묻은 젖소의 엉덩이처럼 가죽은 얽어 있었고 호르몬과 땀 냄새가 뒤섞여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배식으로 육개장이 나왔는지 음식과 땀 냄새가 뒤섞여 불쾌한 느낌이 지속됐다. 정엽은 운전석 작은 창문을 몇 번씩이나 열었다 닫아 환기를 시켰지만 냄새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치익...

 무전기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곧 대규모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급박하게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자리 사수, 지역 내 소요발생 등의 단어가 잡음과 뒤섞였다. 정엽은 화들짝 놀랐다. 멀리서 웅웅 거리는 함성소리가 점차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광수대 작전을 한 이후 현장에 나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직 몸은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긴장감이 온몸을 타고 흐르고 약간의 흥분상태가 된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섬광탄과 함께 파삭하는 대형 조명이 사방에 켜졌다. 조명이 어둠을 밀어내자 공간에 흐릿한 경계선이 만들어졌다. 사이렌소리가 정적을 깨뜨리고 음파를 퍼트렸다. 어둠의 경계 저편으로 검은색 짐승들과 같은 무리들의 대열 없는 형태가 어스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우어~ 하는 함성과 사람들이 건물 곳곳의 어둠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첩보가 입수되기는 했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었다. '정보가 맞았네' 정엽은 중얼거리며 급하게 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와 광장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작업복과 같은 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보였다. 그 뒤로 일반 사람들이 방사형의 무정형 상태로 모여서 함성과 구호를 외였다. 어디서 나왔는지 인파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집회와 시위가 법률로 금지된 이후 게릴라성 시위는 가끔 벌어졌지만 대규모 도심 시위는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감청과 인터넷 검열 그리고 철저한 사상교육이 이뤄지긴 하지만 빈틈은 있게 마련이다. 모자나 마스크를 쓴 시위대는 각목과 쇠파이프 등의 무기를 손에 쥐었고 일부는 화염병을 들고 있었다. 노숙자가 사용하던 드럼통에서 모닥불이 화염으로 바뀌어 펑 소리를 내며 타 올랐다. 누군가 발화성 물질을 넣는 모양이었다.


광장은 순식간에 전쟁터처럼 변해 버렸다. 경찰은 스피커의 볼륨을 높이고 불법집회에 엄중 대응하겠다는 경고 방송을 연이어 쏟아냈다. 광장을 둘러싼 진압용 버스주위로 물 대포 차량이 연일 몰려왔고 최루액을 뿌려 사람들의 진열을 흩트리려 했다. 일부는 버스 위로 올라가 깃발을 흔들어댔다. 광기가 펼쳐졌다. 대중이 폭력과 흥분에 빠져들면 걷잡을 수 없이 사태는 커진다. 정엽은 몇 번이나 이런 사태를 경험했다. 수 십 명의 사람들이 광장을 둘러쌓은 진압용 버스를 밀어냈다. 꽈다다 소리와 함께 버스가 무너져 내렸다. 버스가 밀려 틈이 만들어지자 사람들은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버스의 유리창이 곳곳에서 깨져나갔다. 정엽이 차고 있던 경찰용 무선 이어폰에서도 여러 무선 주파수 소리가 뒤섞였다. 인원 집결과 대응위치 사수 등의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것 같은 두려움 감정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알코올과 니코틴이 혈관에 퍼지는 느낌이다. 투다닥 하는 최루탄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전투경찰과 경찰특공대가 도열한 후 광장을 에워대고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욕지기가 올라왔다.


사람들은 기침을 반복하며 옷으로 코를 감쌌다. 고통은 계속되었다. 방독면을 쓴 특공대원과 방패와 곤봉을 무장한 전투경찰들이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와 욕설이 뒤엉켰다. 상황은 시위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경찰은 효율적으로 이들 틈새를 파고들어 전열을 흩트려 놓았다.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이들은 오합지졸로 바뀌었다. 곤봉과 군홧발 그리고 방패에 시위대는 사정없이 나가떨어졌다. 정엽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곧 진압될 것 같은 모양이었다. 폭동과 소요 그리고 사회불안을 일으키는 시위와 폭력은 개정된 헌법에서 중요한 범죄로 규정되어 있었다. 쓰러진 일부가 진열을 가다듬고 사람들을 다시 규합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미 시위대의 수명은 다한 듯 보였다. 물 대포와 최루탄  사방에서 터지는 고무총탄에 사람들을 비명을 지르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섬광이 일었다. 경찰 포위망 한 복판에서 폭발이 발생한 것이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광장을 뒤집어 삼키고 있었다.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정엽은 집회 장소로 뛰어갔다.


전투경찰은 진압봉과 방패를 들고 사람들을 진압하고 있었다. 이들은 총통이 가장 우려했던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국가 전복세력이었다. 공권력은 국가의 안정과 존립이 우선한다는 헌법조항의 수호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에게 즉결 심판권도 부여되고 진압 행동에 대한 면책도 가능했다. 정엽이 다친 사람을 부축해 옮기려 허리를 구부리는 순간 검은 군홧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큰 소리를 가까이에서 듣는 것처럼 머리에 큰 울림이 느껴졌다. 뜨거운 불덩이가 머리에 떨어지는 듯했다. 시야가 하얗게 흐려졌고 검붉게 변하더니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진압 봉에 맞은 것이다. 시멘트 바닥으로 쓰러진 뒤 어지러워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손으로 상처를 누르자 피가 묻어 나왔다. 뒤이어 누군가 그의 몸을 짓밟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정엽은 몸을 빼 경찰을 발로 차 밀쳐냈다. 부상자를 데리고 혼란한 틈새에서 빠져나오려는 순간 시위대의 함성과 인파 속에서 정엽은 예사롭지 않은 대여섯 명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이들은 중무장한 경찰 진압대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검은색 옷과 후드를 입어 신원파악이 어려웠지만 특수 훈련을 받은 듯했다. 시위대가 전투경찰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자 이들은 진압 무기를 빼앗아 조를 이뤄 한 명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근력과 스피드는 상상이상이었다. 진압봉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방패로 이를 막은 경찰의 몸은 뒤로 밀려났다. 그 틈새를 노려 다른 이가 또다시 좌우의 전투경찰을 때려 밀고 중심을 무너트렸다. 대열이 무너지자 순식간에 시위대가 이들을 밀어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함성소리가 커졌다. 시위대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했다.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의 몸놀림과 반사 신경은 놀라울 정도였다. 정엽은 현장에서 상황을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상대의 곤봉을 반사적으로 피하고 근접 전에서 팔을 잡아 비틀어 넘어트렸다. 몸의 반응 속도는 인간의 기준을 뛰어넘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을 본 적이 없었다. 정엽이 정신을 가다듬고 다친 사람을 다시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시위대가 몰려간 광장 건물 앞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터지고 섬광이 번쩍였다. 광장 한 복판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광장을 집어삼켰다. 정엽이 귀에 꽂고 있던 무선 이어폰에서 자살폭탄 테러 가능성. 시위대 일부 사살이라는 말이 들렸다. 곧바로 타당하는 사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검푸른 불꽃과 함께 몇몇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광장건물 앞쪽에서는 사격 소리가 카앙, 카앙 울려 퍼졌고 소총 화기의 방사형 불꽃이 보였다. 공포탄을 쏘는 것인지. 실탄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총기 밀매가 성행하자 강력범죄에서도 종종 총기가 쓰이고 있었다. 경찰은 테이져 건으로 총기 대응이 어려워지자 선제적으로 실탄을 활용하기도 했다. 광장 뒤편에서는 누군가의 대응사격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군이나 경찰의 소총소리는 아니었다. 어느새 전열을 무너뜨린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실탄 사격을 했는지 아직은 확인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또 다른 폭발음이 들렸다. 정엽은 소리를 듣자마다 바닥에 엎드려 상황을 살폈다. 고개를 들자 정엽의 옆에 사람들이 털썩하고 쓰러졌다. 주변에서 이를 본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일대를 뒤덮었다. 피 냄새와 살이 타는 냄새가 광장에 퍼졌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욱한 회색빛 연기가 광장 중심부에서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2

 정엽은 선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린 후 치료를 받는 동안 집회에 대한 뉴스를 찾아보았다. 사건은 이미 단신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관련뉴스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보국에서 이미 손을 쓴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날의 일은 잊혀야만 하는사건이다. 집회와 모임은 공식적으로 발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네, 지금 산책하고 가는 길인데 그럼 한 시간 뒤에 뵙죠.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현장정보수집 지시를 위한 것이었다. 의례적인 전화 같았지만 정엽은 전화를 받을날 곧 큰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약속시간에 맞춰 지하철로 향했다. 역사 안 상점은 11월부터 이른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광고판에는 ‘폭탄테러에 대한 위험’과 ‘총기사용에 대한 대응 법’, ‘거동이 수상한 사람에 대한 신고’ 등의 글자가 반복됐다. 일상적 공포가 연일 사람들을 짓눌렀다. 정엽은 어머니가 실종될 때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개성공단 관계자를 취재하러 간 정엽의 어머니 최연경 기자는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돌아가는 도중 실종됐다. 어머니는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자주 써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하지만 최연경 기자는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검열로 문제가 생길 때 우회적이고 비유적인 풍자적 방법을 자주 활용했다. 그녀의 칼럼은 인기가 있었다.


권력은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지만 그녀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당시 정엽은 그런 어머니가 불안하기도 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연경 기자가 실종된 후 몇몇 단체에서 비난성명을 냈다. ‘그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등의 자극적 용어를 써가며 전향을 기정사실화 했고 여론을 만들어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정엽은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북한의 비민주적 권력에 비판적이었고 취재차 간 그곳에서 귀순을 할 아무 이유도 없었다. 수없이 어머니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녀가 개성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 정엽은 어머니와 크게 다툰 뒤 둘은 서로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게 더 후회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기 시작하자 관계 당국도 실종사건에 손을 놓다시피 했고 결국 그녀는 공식적으로 실종처리 됐다. 상실감과 채무감이 끊임없이 정엽을 짓눌렀다.


마포역 4번 출구로 나와 <마야>라는 이름의  카페로 들어섰다. 약속한 장소였다. 정엽은 연희와 이곳 루프탑에서 종종 커피를 마시곤 했다. 멀리 한강대교가 보이는 창가자리를 잘 잡으면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고일이 잘 풀리고는 했다. 부장이 격려차 보자고 할 위인은 아닐 테고 앞으로 골치 아픈 업무지시를 내리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엽은 삼십 분정도 일찍 도착해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왔지만 실내는바뀌지 않았다. 대 여섯 개의 테이블이 실내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나왔다. 테이블 간 거리가 적당해 옆 사람의 이야기가 쉽게 들리지 않는다. 정엽은 커피를 마시며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테이블 위에 놓은 작은 살구색 전구의 불이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김상효 부장은 큰 키에 다부진 체격으로 긴 코트가 잘 어울렸다. 계절상 좀 일러 보이는 더플코트를 입고 있었다. 은퇴할 나이가 이미 지났지만 그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김상효 2 부장이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정엽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세요. 빨리 앉지 않고.

아냐, 그냥 뭐 누가 있는지 해서.

여기 장소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일부러 고르신 것 아니에요? 저 여기 자주 옵니다. 저쪽에 한 학생이 앉아서 수능 문제를 풀고 있고 외모를 봐도 그 나이 때의 학생이 맞는 것 같고 도청은 없고 주변도 이미 확인했어요. 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피를 시켜서 테이블에 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졌냐? 아직 쓸 만 해?

여전히 그렇죠. 완전히 움직이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린다고 하네요. 뻐근하기도 하고.

그 정도로 다행이지. 그러기에 왜 그렇게 나서. 국수본 요원이 그런 데서 맞고 다녀? 그는 슬그머니 웃었다. 한편으로는 크게 다치지 않아 안도감이 든다는 말투였다.

실수했다고 현장으로 보내는 걸 막지 않고 놔두신 분이 누구였죠? 아니 부장님이 일부러 보내신 거죠. 사람들이 죽어 나가려고 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나요? 단순히 시위에 휩쓸린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만하기 다행이에요. 시위대의 무장상태도 심상치 않아 보였고 총기가 사용된 것도 아시죠? 사망자는요? 정보는 이미 다 막은 거죠? 부장은 대답을 하지 않고 화재를 돌렸다.

하나씩 물어라. 너 이틀간 병원에 누워있을 때 이미 다 정리된 일이야. 현장파견 정보 수집을 막지 않은 것은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어. 암튼 그건 그렇고. 시국이 그렇다. 갈수록 폭력시위가 빈번해질 것이고 사람들이 폭력에 둔감해졌어.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거지. 앞으로 총기도 더 빈번하게 사용될 거야. 밀수량이 몇 년간 세배가 늘었어. 개성에도 러시아제 총기가 많이 풀리는 모양이다.

다 알고 있는 총기 얘기를 하러 오지는 않으셨을 테고. 말씀하시죠. 정보수집 1차본은 곧 제출하겠습니다.

알았다. 너도 빨리 돌아와야지. 사람이 없어. 지금 다들 과부하 상태야. 대신 다른걸 좀 해봐라. 사실 그래서 온거야. 넌 지금 직무정지 중이니 좀 자유로울 테고.

부장님,  정말 너무 하시네요. 뭔가 또 번거로운 업무지시를 내리러 오셨군요. 징계와 면직처분은 어떻게되는 겁니까? 정엽이 불평을 늘어놓자 김 부장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기에 왜 사고를 또 쳐. 위에서는 몰아붙이지 네놈은 함부장한테 기어올라서 성가신 일 만들고. 내가 쉴 틈이 없어. 너도 알다시피 지금 국수본에 인원이 많이 부족해. 당분간 새로 인원이 충원되지는 않을 거다. 이번일은 내가 전폭적으로 지원을 할 테니 네가 일단 큰 그림을 좀 그려봐라. 네가 이 사건 맡아서 성과 나오면 윗선에서도 그동안에 네가 해 놓은 게 있을 테니 징계 문제는 해결될 거야. 이번에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네놈한테 쏟는 정성을 생각하면 내가 잠이 안 와.   


말씀하신 것은 공식적인 겁니까? 정엽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아니고. 부장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정엽을 보았다. 눈가가 살짝 떨렸다.

 아직 정보를 좀 모으고 확인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준비가 되면 그때 움직일 거다. 국수본이 나서서 주도적으로 뭘 한다고 하면 소문이 나. 다들 몸을 사리거나 증거를 없애려 할 테지. 확실한 물증이 나왔을 때 정식으로 작전을 진행해야 한다.

겁부터 주시는군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네가 최선이라는 판단이야. 믿을 만한 놈이 없어. 넌 광수대 출신이고 현장경험이 많아. 그 정도 쉬었으면 충분해. 내가 의사도 만나봤고. 지금 우리 부서 인원이 다른 업무에 투입돼서 정신없이 돌아간다. 손이 세 개라도 모자랄 판이야. 부장은 커피를 홀짝이고 말을 이었다.

사실 너한테 이번 시위 정보 수집을 맡긴 이유가 있어. 시국이 좀 급박해. 대규모 시위가 국가 전복세력과 연결돼 있다는 첩보가 있어. 더군다나 북쪽의 김병철이가 개성에서 독립인지 뭔지 선언하고 공단 쪽은 지금 무정부 상태와 다름없고. 평화유지군이 있다 한들 그들은 평양군부와 개성세력 간의 싸움이 가급적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뿐이고 개성 쪽 군 인원이 무장해제를 했다고 해도 말 뿐이야. 산발적 교전은 계속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지 종소리가 챙그랑하고 울려 퍼졌다. 부장의 시선이 옮겨가다 다시 정엽을 처다 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얼마 전 개성 공단 연구시설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다. 서해산업의 연구소라 불리는 곳이 통째로 날아갔어.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났고. 물론 사고일 가능성도 있지. 우리가 수집한 정보가 있는데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조사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퍼즐은 의외로 쉽게 맞춰질 거야. 네가 원했던 개성에 들어갈 핑계와 명분이 생긴 거지. 네놈 복직하고. 정엽은 부장의 얘기를 몰입해서 듣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그곳 상황이 특수하지 않냐. 공단 주변 치안 유지인원은 부족하고 그렇다고 안보리 협약을 위반해 무궁화 부대만 인원을 더 투입할 수도 없어. 평화유지군이 직접적으로 민간분야에 수사를 진행하기 어려운 것은 너도 알 거고. 군 수사가 본격화되면 임시정부를 선포한 김병철과 개성군부가 또 시끄럽게 굴 수도 있다. 국수본장님 말에 따르면 무궁화 부대는 폭발자체만 조사한다고 했어. 수사단을 꾸리려면 무궁화 부대와 다른 나라가 함께 참여해야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아. 실무자들이야 외부에서 들어오는 걸 꺼려하겠지만 윗선에서는 그렇게 정리를 했다. 국수본에서 일단 무궁화 부대와 명분상 함께 사고 조사를 진행하자는 얘기가 나온 거야. 민간 쪽이 참여하니까.

국수본이 수집한 정보는 뭔데요? 집회의 배후가 개성의 김병철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요?

 거기까진 아직 몰라. 부장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아니, 공단에는 뭔 비밀이 있기에 매번 그렇게 시끄럽죠?  대단한 것이라도 만들어요? 기껏해야 일용품이나 생활용품밖에 안 될 테고. 국산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수출제한 품목으로 제한이 있을 텐데. 정엽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이 많다는 투였다.


뭐, 네 말도 맞다. 그런데 그 서해산업은 좀 상징적인 업체야. 설립명분도 있고. 의료용품과 제약 품귀현상으로 십 년 전에 난리를 치른 적이 있었지. 너도 기억나지? 외환위기로 디폴트 상태까지 갔고 중국도 서안 지진으로 인해 의료용품 원료 수입이 안 돼서 큰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고. 정엽도 그 사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정엽은 뭔가 의심스러웠다. 어머니 실종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 오래전 수없이 방북신청을 요청했지만 ‘위험상황’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동안 그로 인해 괴로운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이제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필요할 때는 버려두고 이제 와서 개성파견은 갑작스레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렇게 쉽게 방북 허가가 가능한 일을 그토록 힘들게 기다렸던가. 부장이 말을 꺼냈다.

보안에 신경 쓸 부분은 네가 알아서 판단하고. 개성은 이곳에서 접근과 정보파악이 힘들어 자칭 과도정부라고 하는 개성공화국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너도 알 거다. 거기다 국정원을 포함해 기관끼리 서로 달라붙는 형국이라 정리도 잘 안 돼. 움직일 수 있는 틈은 네가 만들어봐. 시간이 되면 공단 주변도 살펴보고. 상황을 정리해 놓는 것도 정보로서 가치가 있으니까. 네 어머니 실종사건도 조사할 수 있는 기회 아니냐.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봐야지. 내가 널 얘기해 놓은 것은 그 이유도 있어. 가슴에 응어리가 지면 안 돼. 풀어야 한다. 뭐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니. 부장은 나머지 커피를 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놈 때문에 함부장하고 얼굴 붉힌 것 생각하면 아직도 혈압 때문에 뒷목이 땅긴다. 함부장 그놈도 고집이 세. 보통이 아냐. 너 정직 풀면 안 된다고 얼마나 난리인지 알아? 아휴 말을 말자. 아, 그리고 정엽아. 그는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지난번 사건처럼 인정에 휩쓸리면 일을 그르치게 돼. 그건 잘 기억하도록 하고. 넌 그게 문제야.

정엽은 부장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얘기를 꺼내봐야 핑곗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부장의 말은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했다. 우연이라면 뭔가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일 테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다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연이 반복된다는 것은 뭔가 설계된 것일 수 있다. 정엽은 부장과 헤어지고 그의 말을 곱씹었다. 국수본 정보파트에서 잔뼈가 굵은 부장이 의심스러운 신호를 확인했다는 것은 뭔가 있다는 뜻이다. 그걸 찾아내라는 지시였다. 그는 국수본의 초기 멤버 아닌가. 정체를 숨기고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존재가 모래를 덮고 형체를 숨기고 있다. 발을 헛디디게 되면 그 안에 빠질 것이다. 다만 그것을 끄집어낼 수 있다면 뭔가 큰 것을 얻게 된다.




 정엽이 국수본에서 정직 처리 된 것은 3개월 전이었다정부 정책에 반대여론을 만드는 사이버 여론 선동인원을 검거하는 <파타 모르가나>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프로젝트 이름이 신기루? 조직적 사이버 선동인원과 배후가 있다는 게 신기루 아냐? 정엽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타 모르가나>는 후반기 국수본 실적을 책임져야 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남산로 23번 길 국수본 분실로 사이버 공작을 주도했다고 불리는 이들이 압송되었다. 국수본 1과는 실적이 필요했다. 정엽은 해외로 첨단기술과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만한 정보를 판매한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된 강준호에 대한 심문과 정보파악을 위해 그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유치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체념하듯 벽에 등을 기대고 힘이 빠진 들개처럼 앉아 있었다. 심문조사가 이어지고 오랫동안 갇혀 피로가 쌓인 듯했다. 조사가 상당히 길어지는 모양이군. 다들 지쳐 보여. 그런 생각을 하며 유치장을 지나가는 순간 정엽은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어머니 실종사건으로 도움을 받았던시민단체 <정의연>에서 근무하고 있던 한수길이었다당시 정엽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일도 그가 처리해 준 기억이 있었다. 한수길은 당시 명맥만 유지하던 시민단체 <정의연>의 간사 역할을 헸다. 정엽과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터놓고 지낼 수 있었으며. 탄원서나 여러 법적 절차에 도움을 준 것이 항상 고마웠다.


  잠시만요. 저기 저분 왜 여기 있는 거죠? 정엽은 한수길을 가리키며 경비를 불렀다.   

 아, 온라인 테러와 국가 전복 사건 용의자로 현장 체포된 사람들입니다. 경찰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뭐가 그리 불만들이 많은지. 총통께서 해준 것에 대해서 고마운 줄 알아야지 이거야 원.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엽은 면회를 요청했다. 한수길은 카키색 누비의 구치소 복장을 한 채 힘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있는지 휘청거리며 벽면 잡기를 반복했다.

한수길 선생님 저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정엽과 그는 변호사 접견실에서 마주 앉았다.

시원한 물 한잔만 마실 수 있을까요? 한수길은 상황을 파악하고 곧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한수길은 지쳐 보였다. 얼굴여기저기에 주름이 져 있었고 스트레스 때문인지 얼굴색은 검게 그을려 보였다. 지친 기운이 풍겼다.

여기서는 안심하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정엽이 천천히 말했다.

정엽 선생님 경찰되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여기 계신 건가요?

아뇨 경찰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국수본에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잘 됐군요. 어머니는 참 어떻게 됐습니까? 그 이후에 방북은 하셨는지요. 한수길의 물음에 정엽은 고개를 가로 저였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방북은 현재 위험상황이라고 허가가 나지 않습니다. 공단의 필수 인원이 아니라는 이유예요. 특별승인도 안 되더군요. 그동안 어머니가 정부정책에 많은 비판을 하셔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죠. 정엽은 쓴 미소를 지었다.

간사님은 어떻게 된 겁니까? 아까 얘기 들어보니 국가 전복 세력이라는 혐의라고 하던데요.

푸하하.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국가 전복이라뇨. 제가 조직적으로 국가를 전복할 힘이나 있나요? 여론을 조작하고 선동했다는 혐의도 말도 안 되고요. 국수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 모임에서 정부의 마약, 의료 정책과 공안통치에 대해서 비판하고 댓글을 다니 아예 이를 막아버리려는 거죠. 저들도 실적이 필요할 테니.  정엽은 조서와 서류를 통해 인적사항을 확인한 기억이 떠올랐다. 24살 한국대학교 3학년 생은 군 제대 후 복학을 한 상태였다. 또 다른 이는 평범한 전자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나머지 유치장에 구금돼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는 게임 동호회 등에서 만나 서로 온라인으로 친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정부는 뭐라도 하는 시늉을 해야 해요. 상황이 급박하니까. 정엽선생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수길은 알고 있는 것 아니냐는 투로 말을 꺼냈다.   

정엽 선생님은 이 사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는 원탁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그의 손목 뒤로 수갑을 찬 곳에 검푸른 멍이 보였다. 물컵을 든 손이 조금씩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물리적 압박이나 구타가 있었습니까? 정엽이 그의 손을 보며 물었다. 한수길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제가 말한다고 해도 뭔가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엽 선생님이 경찰이 되었다고 했을 때 무엇을 바라고 그쪽으로 갔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어머니사건 이후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아니 뭐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국수본에 계신다면 너무 권력에 취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겁니다. 아, 제가 주제넘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제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아닌지 요즘 혼란스럽기는 합니다. 오늘은 다른 사건 때문에 왔는데 관련내용을 확인해해 보겠습니다.

소용없을 겁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수길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 잘 마셨습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손으로 누르며 복도를 걸어 나갔다.


 정엽은 국수본으로 복귀해 1과 함영진 부장을 찾았다. 그의 나이와 경력은 김상효 부장보다 한참 아래였다. 하지만 1과의 실권자였고 이번 <파타 모르가나>의 책임자였다. 정엽은 면담을 요청했다. 함영진은 탐탁지 않은 뚱한 표정으로 정엽을 바라보았다. 정엽은 그와 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 차이로 몇 번 부딪친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서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철저하게 권력을 추종하는 인간형으로 사건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군인출신으로 총통의 신임이 깊었고 이를 이용해 여러 이권에 개입하고 있는 것을 정엽은 알고 있었다.


 구치소에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왜? 자네가 아는 사람도 있던가?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정엽의 시선을 피하며 난초를 쓰다듬고 있었다.

네, 시민단체 관계자 조직적 댓글과 국가전복 사건과 관련이 없는 대학생도 있고요.

재판과정에서 밝혀질 거네.

왜 이런 일을 자초하시죠. 국수본장님 눈에 들려고 하시나요? 아님 총통 각하에게 직보 될 수 있도록 하시려고요?

뭐야? 그는 갑작스레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정엽은 그의 심중을 건드렸다.

관련 없는 자들은 석방하시죠?

건방진 놈. 어디다 대고 이래라 저래라야. 네놈이 여기 들어올 때부터 난 맘에 안 들었어. 김상효 부장이 감싸고돈다고 네놈이 좀 나대는 거 같은데. 네 어머니가 북한 쪽으로 전향했다지? 총통과 이 나라를 배신하고. 그런 놈을 여기에 두었으니. 김상효 부장도 참 사람 보는 눈이 없어.

부장님 말씀이 심한 것 아닙니까? 정엽은 목소리를 높였다.

사건과 관계없는 일부 인원은 제 직권으로 이첩해 처리하겠습니다. 강준호 사건과 관련성도 있으니까요.

 어디 할 테면 해 봐.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난 쭉 봐왔지만 네놈의 사상이 의심스러워 언젠가 네놈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가 주시하고 있겠지만. 함영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말을 마친 후 관심 없다는 듯 의자를 돌리고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며칠 후 정엽은 프로젝트 관련자 석방과 관련해 직권을 남용했고 상관의 명령에 합리적 이유 없이 불복했다는 이유로 인사위원회를 통해 면직처리 됐다. 그는 총과 신분증을 반납하고 간단한 짐을 싸서 자신의 자리에서 나왔다. 주위에서 몇 명이 수군거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엽은 이후 김상효 부장의 광장 시위현장 조사 지시로 임시 복귀를 한 것이다.


 부장을 만난 후 집에 돌아와 받은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실종된 지역을 다시 확인했다. 개성으로 간들 십 년도 훨씬 지난 일이다. 무엇을 찾을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탐문조사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미 너무 늦었다. 남아 있는 것은 있을까? 시신을 찾는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납치됐다면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슬픔과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아직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응어리가 만져졌다. 쉽게 없어지지 않는. 자료 속 첩보의 내용은 흥미로웠다. 강화도 해안에 여러 사체가 계속 발견되는데 북한지역에서 떠밀려온 사체로 보인다는 것이다. 사체는 모두 젊은 남자로 건장한 체형이며 모두 동일한 옷을 입고 있다. 짧은 머리를 하고 있어 군인 등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사체를 인계할 주체가 없어 부검을 실시하자 모두에게서 같은 마약성분이 검출되었고 북한장마당에서 이제 공공연하게 마약을 구할 수 있으며 국내에서도 유사한 마약이 유통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북한 어딘가에서 대규모 마약 제조와 밀매가 의심된다고도 했다. 이 와중에 공단의 연구소가 폭발과 화재에 휩싸였고 의도적인 폭발로 보인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국수본의 정보 수집능력은 인정할 만했다. 보고서는 정보 2과에서 정보부에서 담당했을 것이다.


2과는 '대북대응과 공공안정과 관련된 모든 정보 역량을 집중했을 테니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았을 테지'  1 과가 공안과 기획수사와 기소를 담당한다면 정엽이 속한 정보 2과는 정보수집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물론 정보 2 과가 수사와 기소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분야에 특화 돼 있는가의 차이일 뿐이었다. 국가수사정보본부 즉, 국수본의 창설은 1996년이었다. 헌법이 개정된 후 대통령은 두 번의 대통령 임기를 채우고 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그는 모든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북쪽에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이 있다면 남한은 총통이 모든 권력을 잡은 것이다. 외신은 새로운 남북국 시대가 수 천 년 만에 다시 도래했다고 보도했다. 외신은 이 기묘한 상황을 경제체제만 다른 완벽한 대칭형 쌍둥이라고 비꼬았다.


 국민들의 요구를 강제로 눌렀기에 공안 통치를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수본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치거나 국가보안 및 공공의 안전 그리고 고위공직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사건의 이첩을 요구해 권력의 입맛에 맞췄다. 여론을 만들기도 하고 사건을 조작해 정권에 유리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총통은 체제의 위험요소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당시 명맥은 유지했던 야당은 총통제와 국수본 설립은 무소불위의 권한이며 일당독재 및 정치적 반대세력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조직은 탄생했다. 국수본의 설치는 사법부와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검찰 일부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인사로 조직을 다스렸지만 권력에 반발하는 일부는 남아 있었다. 총통 직속 국가 안보실과 국수본 그리고 정보국은 이후 통치의 효율성을 더욱 높여나갔다. 하지만 모든 조직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파벌이 생기고 사건에 대해 서로 입장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총통의 완전한 종신 친정체제 구축에 국수본은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분명했다.


 정엽은 읽은 보고서를 책상 위에 던져서 올려두었다. 옆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각종 서류와 수사기록들과 자료들이 뒤엉켜 있었다. 독서 등의 조도를 높여 다른 자료를 읽어 나갔다. 공단과 그 옆의 연구소의 연혁과 현황 설비 등을 파악했다. 경공업 제품들 소비재와 각종 일상용품을 생산 제조하는 공단이 많았다. 남북 모두에서 사용하는 일상용품 생산업체도 있었다. 수출까지 고려한 제품들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남한 제품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태라는 조항이 달려 있었다. 의문의 연구소는 남북 합작 공동 농업개선 및 생산량 증대를 위한 연구시설, 의료제품 연구를 위한 목적이라고 했다. 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특별한 것은 없는 일반적인 연구시설로 보였다. 폭발과 화재라. 그는 중얼거렸다. 보고서는 화약 폭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반적인 실험실 폭발과 화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평화유지군 무궁화 부대로부터 받은 일부 내용도 확인했다. 그는 한 시간쯤 뒤 침대로 갔다. 아침 일찍 움직이려면 이제 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오전 9시 정엽의 차는 77번 국도를 따라 파주에서 임진강을 건너 도라산역 부근을 달리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북측의 강가에는 난민들의 텐트와 천막 그리고 판잣집이 성냥갑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 모습이 여름철 해수욕장을 방불케 했지만 지금은 겨울 초입이라 피서객은 아닐 것이다. 취사와 난방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간간이 보이는 사람들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지 작은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보이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흡사 작은 개미가 뭉쳐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했다. 국지전을 피해 임시로 내려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정엽은 남한 검문소에 특별 출입증과 무기 소지허가증을 제시했다. 무신경해 보이는 검문소 직원은 흥미가 없다는 듯 출입증과 정엽을 번갈아 처다 보고 문을 열었다.


 전자출입문 소리가 들리고 정엽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북측 검문소로 이어졌다. 검문과정에서 정엽이 소지한 무기로 인해 실랑이가 벌어졌고 두어 시간을 대기한 후 통과가 이뤄졌다. 공단 설립 후 월경을 위한 검문소는 이전과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 유지되는 듯했다. 다만 사람만이 바뀌었다고 했다. 북한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지만 휴전선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경비가 더 삼엄해졌을 뿐이다. 개성세력과 평양세력의 교전이 반복됐지만 북한 난민들이 물밀 듯이 남쪽 휴전선으로 넘어오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휴전선을 지키던 북쪽 만경부대 일부는 탈영했고 남은 세력들은 전 사령관이었던 김병철에게 투항했다. 확지 전과 비상상황을 막기 위해 남한군은 비상근무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북한의 영토에 들어섰다. 긴장감이 폭포수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또 한 무리의 보안위원들이 정엽의 신분증을 확인했다. 이들은 남한의 경찰과 유사한 사회 안전성 소속이었다. 북한 측의 낡은 버스로 갈아탔고 버스는 중앙선이 없는 도로를 달렸다. 북한 사회 안전성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운전석 뒷자리에 정엽은 앉았다. 운전사는 남색계열의 인민복을 입고 있었는데 목의 옷깃이 거의 낡아있었다. 정엽은 묵묵히 창가를 보고 주변을 살폈다. 도로 옆으로 산과 벌판이 보였다. 황무지 곳곳에 무성한 잡초가 자라고 있었고 정돈되지 않은 지역 곳곳에 불에 탄 흔적이 눈에 띄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도로포장 상태가 좋지 않았다. 차는 끊임없이 덜컹거렸다. 잠시 후 차량은 개성시내 남대문 교차로를 돌아 십 여분 후 시 외각의 한 장소에 도착해 정엽을 내려주었다. 주변을 돌아보자 un평화유지군 무궁화 부대 인원들이 눈에 띄었다. 정엽은 사령실이 있는 적갈색 벽돌로 이뤄진 건물로 안내를 받았다. 정엽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뒤 저 멀리 부대시설이 눈에 띄었다.


 어서 오시라요. 예상과 다르게 젊은 분 이로구만.

그는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부사령관은 정엽을 놀리듯 북한 말투를 쓰며 친근한 인상을 남기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정엽이라고 합니다.

 무궁화 부대는 un평화유지군으로 개성일대의 치안과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병수 대령이 부대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짧게 자른 머리에 군대군데 흰머리가 있었지만 머리숱은 많아 보였다. 짧게 자른 머리와 도드라지는 턱 선이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을린 얼굴과 두툼한 손에는 상처가 많았다. 그는 강한 악력을 자랑하듯 정엽의 손을 꼭 쥐었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공단의 사고를 조사하러 오셨다고? 우리가 자체조사를 하고 있고 그 내용의 일부는 보냈는데 국수본에서 뭘 또 조사를 한다고 합니까? 국정원 국수본 아주 힘깨나 쓴다는 기관은 다 모이는군요. 아니 평화유지군의 자체 조사결과를 못 믿는 겁니까? 그의 말투에는 귀찮고 성가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정엽은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했다. 어쨌든 여기서는 이들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대령은 묻지도 않은 내용에 대해서도 말을 꺼냈다.

개성지역은 이미 자본주의화가 어느 정도 진행됐죠. 장마당 활성화야 예전일이고 다들 돈을 벌려고 난리입니다. 얼마 전부터는 돈 되는 일은 뭐든지 다 하죠. 사회주의 경제는 이미 개성일대에서 끝난 겁니다. 매춘, 빙두, 엑스터시, 아편, 얼음 말도 마쇼. 시장 가면 다 있어.

그는 초반의 인상과 다르게  수더분하게 말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뭔가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엽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병수는 화제를 주도하려 했다. 정엽은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아시겠지만 외부기관을 통한 조사가 공정성 시비에서 자유롭기에 지금처럼 결정이 된 듯합니다. 저도 업무 때문에 온 겁니다.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병수는 무슨 말을 꺼내려다 마는 듯 머뭇거렸다. 잠시 후 정엽은 화제를 바꿨다.

 치안은 이제 좀 안정돼 가고 있습니까?

 아직 불안합니다. 마땅찮은 표정으로 이병수는 대답했다.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김병철의 영향력도 여전해요. 개성 외각과 개풍군 일대에 아직 투항하지 않은 부대도 있죠. 굳이 작전을 강화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없을 테고요. 철군하면 여기가 어떻게 정리될지 아직은 감이 안 와요. 정치적 협상이 이뤄질 것이고 사실 우리로써는 포기할 수 없는 곳이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양과의 관계도 생각해 봐야 하니 복잡할 겁니다. 아무튼 외국군은 철수할 거 아닙니까? 언제까지 여기 남아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렇군요. 정엽도 이곳이 몇 년 후 이곳의 상황이 바뀔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더 급한 일이 많다.

 오늘은 근처에서 좀 쉬고 낼부터 움직이면 되지 않을까요? 숙소는 여기 군 간부용 시설을 쓰면 될 겁니다.

 아닙니다. 아직 오후라 먼저 지역 일대를 돌아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이동하실 겁니다. 차도 안 가져오셨을 테고 움직이기 쉽지 않을 텐데요. 걸어서 이동하시려고요? 여기 치안 상태를 확답을 못해요. 평화유지군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서 조심해야 합니다. 일단 김수혁 대위가 동행할 겁니다.


썩 내 키지 않았지만 일단 정엽은 그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다른 방법이 마땅히 생각나지도 않았다. 정엽이 사령부에서 나오자 문 앞에 군용 지프차가 놓여 있었다. 김수혁 대위는 푸른색의 유엔이라는 표시가 붙은 지프차량에 앉아 정엽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30대 초중반정도로 보였고 165cm 정도의 키였다. 손등에는 화상자국 같은 것이 보였고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이곳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외모처럼 보였다. 흡사 강남의 한 벤처 사무실에서 발표 자료를 만들다 막 뛰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를 타고 차분히 거리를 살펴보자 비로써 거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에서 보는 것과 낮은 군용 지프에 보는 시가지 모습은 사뭇 달랐다. 수년 전 연희와 함께 간 여수와 순천의 70, 80년대 드라마 세트장 생각이 났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자 날이 흐리고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시내에는 아직 조명이 들어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멀리서 보면 마치 롤플레잉 게임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무채색 상가의 간판은 1990년대 남한의 한적한 지방과 유사했다. 정엽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김 대위가 그를 불렀다.


이수사관님? 이렇게 불러야 할까요? 일단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 이거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사령부 나와서 좀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죠. 제가 주로 행정업무 쪽이라 외부일정이 있으면 바람 쐬러 나오기 좋습니다.

우선 연구시설의 위치부터 확인해야 할 듯합니다. 이곳은 공단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을까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차로 20분 안에 모든 곳에 도착합니다. 수혁이 말했다.


그는 개성시내에서 남측 공단으로 차를 몰았다. 가끔 지나가는 차들이 눈에 띌 뿐이었다. 둘은 묵묵히 앞을 보면서 목적지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의 상태가 좋지 않은지. 화면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김수혁 대위는 그럴 때마다 짜증스럽다는 듯이 손으로 조수석 상판을 내리쳤다. 충격이 전해지만 화면이 나오다가 안내 목소리가 치익 소리를 내며 발음이 뭉개졌고 다시 화면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정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적한 시골을 드라이브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평선 앞으로 거대한 산들이 펼쳐져있었고 들판의 잡목과 나무 야생화가 길가에 피어있었다. 늦가을 무렵이라 단풍이 짙게 물들기 시작했다. 산에 나무는 많이 없었다. 가끔 밭 한가운데에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엽은 여기도 남한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시죠 이런 거. 여긴 아직 그렇습니다. 개성이 독립되었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교전이 좀 잠잠해졌을 뿐인 것이죠. 여기는 물자가 귀해요. 수혁은 정엽을 보면서 말을 꺼냈다.

북한이라 뭔가 다를까 했는데 시골 풍경은 똑같군요

여기나 거기나 시골이 뭐 다를 게 있겠습니까?

오신 지 얼마나 됐죠? 지원하신 건가요?

그렇죠. 여기 생명수당, 위험수당 나와서 왔습니다. 북한 사람들 드셉니다. 일부는 아직 자존심을 못 버렸어요. 공단이 본격적으로 운영된 지 10년도 훨씬 넘었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 경제에 좀 트여 있기는 하죠.

이곳 사정은 좀 아십니까?

아뇨. 아직은 출입도 자유롭지 않고 이래저래 주워 들어 알게 된 게 많습니다. 그래도 저 아래의 시장에 가면 있을 것은 다 있습니다. 여기선 장마당이라고 하죠. 아래동네 윗동네 물건으로 불리는 남한 그리고 중국산입니다.

근데 어떻게 개성일대가 분할된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북한 쪽에서 이걸 용인하기 쉽지 않을 텐데.

평양 군부세력이 나뉘었죠. 김정은이 집권하기 전 공백 기간이 좀 있었는데 친중파와 주체세력으로 갈라 선거죠. 친중파는 신의주에서 밀무역 좀 해서 부를 쌓았을 겁니다. 그전에 물밑작업이 좀 있었어요. 암튼 김정은이가 집권한 뒤에 당하고 군부세력을 쉽게 장악하지 못하고 힘이 약했던 거죠. 그런데다 남한하고 개성공단 사업을 진행했고 이게 잘 되니 없애려고 했을 테고. 그렇잖습니까? 뭔가 다른 쪽이 도움이 되고 잘 사는 건 싫다. 우리는 우리식의 사회주의가 필요하다. 뭐 그런 생각하는 사람들이겠죠. 이쪽 지역 경제력이 좀 커요. 어찌 됐든 돈이 도니까요. 평양과 격차가 많이 줄어들어 된 거죠. 여기 개들은 1달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죠. 그런데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공단을 없애려 하니 당연히 들고일어날 수밖에요. 쿠데타에 가담한 세력은 남한 쪽 하고 친분이 있거나 중국과 연합한 일부일 겁니다. 사람들이 자본주의 돈맛을 알아 버린 거죠. 사상 통제를 한다고 해도 그게 쉽지 않아요. 사람의 욕망을 통제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요. 공단도 사실 두 체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 아닙니까?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먹을 것도 없고 수십 만 명씩 죽었는데 남한도 경제 상황이 안 좋으니 이벤트로 만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십수 년 전에요. 남한도 외환위기 때문에 힘들었을 때 아닌가요? 정엽도 그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김정일이 그때 갑자기 죽지만 않았어도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아쉽죠. 인간사야 모르는 거지만. 정엽은 군에서는 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싶어 김수혁 대위의 말을 유심히 귀담아 들었다.

사실 내부적으로는 더 복잡할 겁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알게 됐을 거고요. 저기 보이는 게 선하역입니다. 근처로 내려가면 공단이 있죠. 공단 주변의 시설에 남한 자금도 많이 들어왔죠. 아, 참 오시면서 보셨죠?

네 멀리서 보이더군요.

 정엽의 눈에 거대한 공업지구가 들어왔다. 뿌연 하늘 탓에 소묘로 그린 그림을 뭉개 놓은 듯 보이는 건물이었다. 둘은 공업지구에서 좌측으로 이동해 시멘트 길을 달렸다. 아스팔트가 아닌 시멘트 포장의 좁은 2차선 길로 들어섰다.

이쪽이 지름길입니다. 길 상태는 좋지 않지만요. 뭐 차는 거의 없죠. 군데군데 웅덩이가 폐인 길을 지날 때마다 차량에 진동이 느껴졌다. 차량은 산길 입구로 진입했다. 곧이어 거대한 평지가 나타났다. 기분 탓인지 탄 냄새가 아직까지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개성일대에서도 불꽃이 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큰 위력을 가진 폭발은 분명했을 것이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둘은 문을 열고 내려 둘은 거대한 구덩이처럼 보이는 곳을 조망했다. 연구동의 위치가 높아 시설 동 건물이 쉽게 보였다. 불타고 남은 건물의 잔해 안에 뒤엉킨 철골 구조가 앙상하게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려 있었다. 거대한 운석이 떨어진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연구소 시설은 크게 연구동 시설 관리 동 그리고 운동장과 비슷한 시설로 구획된 듯했다.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표시가 그을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저쪽이 생산동이고 여기가 연구동일 겁니다.

화재와 폭발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이뤄진 겁니까? 정엽이 쪼그리고 앉아 건물 잔해를 만져보며 물었다.

평화유지군하고 공단 위원회가 기본 조사를 했는데. CCTV도 없고 내부폭발로 일단은 결론을 내린 상황입니다. 이곳이 공단의 한 연구시설로 등록이 되어 있기는 한데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당이나 군부가 개입돼 자료를 폐기했을 수도 있고요. 어찌 됐든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 놓은 시설인 것은 분명합니다.

폭발물 잔해조사는 이뤄졌고 용의자는 나왔나요?

아직 직접 수사전입니다. 폭발사고조사 결과는 아직 안 나왔습니다. 곧 사건에 대한 본격적 조사가 진행될 거라 하더군요.

이 정도 규모의 연구시설이면 인원도 상당했을 것이고 뭔가 중요한 것을 연구 실험한 것 같은데요.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업체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폭발 전에 사람들은 없었답니다. 일요일 밤이라서요. 실험용 동물들이 있었는데 그것들도 다 타서 재만 남았고요. 뭐 업체는 자신들은 모르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더군요. 동물실험이 진행 중이었다고 하고. 자세한 얘기는 꺼리는 듯했습니다.

 정엽과 김수혁 대위는 계단을 따라 앙상한 철골이 드러난 시설 안으로 들어섰다. 타다 남은 건축자재들과 녹아버린 설비가 뒤엉켜 얼핏 보면 바다 위를 부유하는 쓰레기 같았다. 습기를 머금은 잿더미는 덩어리째 엉켜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자 눅눅하고 축축한 공기가 바닥을 뒤덮었다. 마치 불에 타 방치된 흉가처럼 보였다. 눌어붙은 문을 밀어서 공간을 살펴보았다. 김수혁 대위는 중얼거리며 정엽을 따라 지하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입구로 들어가자 한쪽 벽면의 시멘트는 무너져 내려 있었고 눌어붙은 동물사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개와 양 그리고 유인원 종류도 있었다. 수십 마리나 되는 원숭이와 개들의 사체가 보였다. 절반쯤 타버린 동물들은 우리를 나가려 발버둥을 쳤는지 고통스레 몸이 굳어 형체만 남은 동물들도 여럿 보였다.


지하 일층이 다일까요?

글쎄요. 저도 처음 와보는 곳이라 아직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더 둘러보려면 장비가 필요할듯한데 없으니 오늘은 여기까지가 한계 같네요. 김수혁이 발로 잔해를 뒤집고 있었다.

동물들이 많이 죽었네요. 생지옥이 따로 없네. 실험실 같아 보이는데. 원래 이렇게 동물들을 많이 사용합니까. 현장을 보니 이거 완전 지옥 같군요. 이럴 줄은 몰랐는데. 수혁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건물의 지하시설이 있을 텐데 지금은 확인이 어려워요. 일반적 화재가 아닐듯하고 규모를 보니 폭발음이 개성시내까지 들렸을 겁니다. 저도 당시 사이렌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수혁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생산동에 남아 있던 몇몇의 남한 직원들은 사고를 바로 알았을 것이고. 남한의 운영위원회에서도 조사를 진행했을 텐데 아직 확실한 것은 없군요.


 수혁이 말을 마치자 정엽은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쪽으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덤프트럭이 몇 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김수혁 대위는 미간을 찡그리며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날 새벽 저희도 공습이나 폭탄이 터진 줄 알고 다들 전투태세에 들어갔죠. 전 부대 비상이 걸렸고요. 수사관님까지 파견된 것은 의외입니다. 군관할지역과 민간인 지역이 섞여 있어 이래재래 말도 많았습니다. 군사시설도 아니고 민간시설이기는 한데 책임을 따지자면 또 애매한 부분이 있죠.

일단 규모와 위치 그리고 상태는 확인을 했으니 차후에 더 필요한 부분 찾아봐야겠네요.

 정엽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 두었다. 이후 둘은 건물 입구로 나왔다. 어느새 서편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 멀리 공단에 불빛이 점멸했다. 저녁때가 되자 공기는 차가워졌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었다. 어둠이 입을 벌려 서쪽 노을의 붉은 기운을 잡아먹고 있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지나자 늑대와 같은 어둠이 곧 시야를 덮칠 듯했다.


해가 일찍 떨어졌군요. 공단으로 가시겠습니까? 조사해야 할 업체가 있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오늘은 일단 숙소로 가시고 내일 다시 움직이는 것도 좋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그 정도로 위험할까요? 이곳의 치안은. 주민들도 그렇게 위험을 느끼고 있습니까? 정엽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뭐, 사람마다 다르죠. 지역주민들이야 이곳 사정에 훤할 테고 우리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저도 이방인일 뿐입니다. 이곳에 상주한 지 2년이 넘은 김수혁의 말에는 아직 이곳이 두렵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정엽도 첫날부터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숙소에서 정리해야 할 부분도 있었고 건물의 규모와 상태도 대략 파악을 했으니 앞으로 조사할 내용을 확인한 뒤 공단 운영위원회를 찾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일단 오늘은 그럼 움직이시죠. 정엽이 말을 꺼냈다.

둘은 차를 타고 가로등이 없는 도로를 상향등을 켜고 달렸다. 정엽은 돌아가는 길은 다른 길로 가자고 김대위에게 말을 전했다. 사진과 함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정엽이 말한 곳으로 차를 몰았다.

잠시 이 근방에서 멈춰주시죠.


공단에서 나와 삼거리를 지나 개성으로 가는 평범한 길이었다. 수혁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엽은 그곳에 내려 길가에서 꽃을 꺾어 바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수혁은 이유를 물어볼까 하다가 정엽의 얼굴 표정을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정엽은 어머니가 실종된 지역에서 잠시 머물렀다. 시내로 돌아오는 30여분 동안 한 대의 차도 마주치지 않았다. 달리는 차의 시야가 점차 좁아졌고 다른 차원의 공간을 달리는 기분을 느꼈다. 어머니는 어떻게 된 것일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정엽은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믿고 싶지 않았다.



 정부에 반대하는 물리적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시위대는 정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단순한 모임에서 출발했지만 점점 참여자 수와 빈도가 확대되는 중이다. 20일 광장 시위 현장에 수 십여 명이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 입장을 게릴라성으로 밝히고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일부 현장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하고 기물파손 등이 이뤄지기도 했다. 시위는 현행법 위반이지만 이들의 시위는 갈수록 진화하고 있으며 빈도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지난 3달간 연속으로 발생한 집회 시위는 10여 년 간 처음 있었던 일로 경찰과 정보국 및 관계당국은 긴장하며 집회에 참여한 이들의 배후와 신원파악에 집중하고 있다. 관계 당국은 엄중하게 대처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시위대로 보이는 이들은 정부의 정보통제 및 중독자 방치 및 여러 의료 및 약물정책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담고 있는 전단지를 살포하고,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이들은 유인물을 통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집회와 시위를 이어나가겠다며 법 개정을 요구하는 중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정부의 무리한 물리적 대응이 사태를 오히려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시위 참여자에 과도한 진압이 오히려 반발을 키워 사태를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중략).....


기사입력 202x, 11월 20일



 CBN방송국 7층 회의실에서 김희수 사회 부장은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사를 고치며 가끔 턱을 괴고 한 손으로 연필을 테이블에 부딪쳐 딱딱 소리를 냈다. 김 부장은 심기가 편하지 않았다. 시국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는 사회부 기사 논조가 문제라는 말을 윗선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기사를 작성한 담당 기자와 보도내용에 대한 주의를 재차 요구받았다. 담당기자인 연희는 며칠 전 경위서를 썼고 상벌위원회가 곧 열릴 태세였다. 불법 시위 진압과정의 과도한 폭력성이 사람들의 반발과 문제를 키운다는 기사가 문제였다. 정부를 비판하는 형태의 기사에 대해 방송위원회도 문제를 제기했다. 방송위원회 관계자는 경영진에게 이런저런 압력을 가했다. 연희의 기사와 보도는 눈엣가시였고 제제에 대한 명분은 슬슬 쌓이고 있었다.

경영진도 인사준비를 할 참이었다. CBN은 공중파 방송사지만 건설사를 모기업으로 하고 있으며 종합편성 채널로 시작해 공중파가 되었다. 설립초기부터 특혜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돌았다. CBN은 정부 정책의 기조를 강조하는 여론을 만드는데 탁월했지만 방송국도 시청자의 요구와 선호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기사와 보도에 대한 우려는 분명해졌다. 며칠 전 사무관 한 명이 사장실을 찾아오기도 했다. 부장은 이번에도 연희를 불렀다. 연희는 회의실 한쪽에서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회색 터틀넥을 입어 시선이 얼굴에 좀 더 쏠렸다. 누가 보더라도 수척한 모습이었다. 최근에 기사와 보도로 인한 논란으로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졌다. 얼굴은 생기를 잃어갔고 체중이 줄어 말라 보였다. 연희는 입사 초기만 해도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 서글서글한 표정과 더불어 뚜렷한 이목구비로 메인뉴스 앵커감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느새 시청자 게시판 안주거리로 종종 오르내리고 있었다.


 밥 좀 챙겨 먹고 다녀라. 얼굴이 그게 뭐냐. 김연희 기자 일하기 싫지? 어디 구석에 가서 하루 종일 동영상이나 볼래? 해시태그 달고 콘텐츠 보면서 아이스링크 관리하고 싶어? 너 그러다가 보직 바뀔 거야. 더 이상 나도 못 막아. 부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연희는 부장이 윗선에 불려 가 또 한 얘기 들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종종 있었던 일이다.

 야, 나도 답답하다. 위에서 저렇게 나오니 핑곗거리라도 만들어야 할 거 아냐. 너 꼴리는 대로 나 몰래 기사 싸지르고 다니고, 데스킹 한걸 다시 바꾸고 내가 수습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부장은 잠시 멈칫하다 연희를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이번 정기인사에서 너 한직으로 돌 수 있어.

 부장님 제가 없는 말 썼나요? 팩트에 안 맞는 게 있었던가요? 부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시국이라는 게 있잖아. 맞출 건 맞춰 줘야지. 소나기는 피해야 할 거 아냐. 무분별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작전상 후퇴라는 것도 있어. 전투에서는 지고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다. 너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자리 빼야 해.

부장님. 이게 무분별한 거예요? 연희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언제까지 저들에게 맞춰줍니까?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와서 줄잡았다고 이러쿵저러쿵하는걸 가만히 보고 계실 거예요?

 너 이렇게 하다가 총통 욕도 하겠다. 그건 기사에 안 써? 보도 안 해?

하면 좀 어때요. 총통은 뭐 잘못한 거 없나요? 연희는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진짜 이대로 숨이 막혀서 살겠어요? 지들 눈 밖에 나면 잡아다가 가둬버리고 감시와 사찰은 일상이고. 검열은 기본이죠. 왜요. 총통 암살모의라도 나왔나요? 부장이 연희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좀 냉정해져. 말조심하고 그렇게 흥분하면 될 것도 안 돼. 20대야? 아직도 그렇게 치기 어려서 어떻게 일을 할 거야. 사회생활 한지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그렇게 일차원적이야. 당위와 현실을 구분할 때 되지 않았어? 그런 식으로 현실을 바라보면서 냉정함을 지켜낼 수 있어?


부장은 한심하다는 듯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혔다. 사실 부장의 말도 맞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쉽게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부장은 언론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신문사에 입사해 공중파 부장으로 2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켰다. 검열에 맞서 투쟁을 벌였던 전력도 있고 정부정책의 문제를 앞장서 비판하기도 했다. 선 굵은 취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가 기사화했던 입찰비리 사건이나 공무원과 경찰의 사건 조작 보도는 숱한 외압을 받았다. 권력은 언제나 자신들의 잘못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김희수 부장은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해 왔다. 살아남기 힘든 이 바닥에서 공중파의 사회부장이 됐으니 그녀도 할 만큼은 한 것이다. 하지만 연희는 그런 그녀가 이제는 현실적이 되었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한 때 연희도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었고 존경심을 품기도 했다. 연희는 경영진과 인사권자에게 굽실거리는 그를 볼 때마다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건 그렇고 잠시 쉬는 걸로 해. 이번에도 말 안 들으면 타 부서 발령이야.

예? 무슨 말씀이세요.

 며칠 휴가가라고. 머리 좀 식히고 와. 일단 내가 얘기해 놨으니까. 애인이랑 바닷가 좀 가든가. 제주도 가서 며칠 좀 뒹굴어.

 부장님, 연희는 큰 소리로 부장을 불렀다.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빨리 나가봐. 나 바빠.


 연희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아 버리고 회의실을 나왔다. 업무회의가 끝난 뒤 사무실은 각자의 일로 분주했다. 연희가 들어오자 몇몇 후배 기자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눈치를 살폈다. 연희는 혼자 외딴섬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자들은 이미 각자의 출입처로 흩어져 사무실에는 소수만 남아있었다. 연희의 출입처는 이미 다른 후배가 맡기로 한 뒤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서류를 책상에 집어던졌다. 이번기회에 좀 쉬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도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일단 회사를 나와 역으로 향했다. 얼마 전 취재했던 기습집회와 시위의 모습이 떠올랐다. ‘총통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는 슬로건이 나붙었고 참여자의 신원조사와 탐문 수사 등으로 정국은 벌집을 쑤신 듯했다. 동영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치적 슬로건을 내세우는 집회는 사회혼란을 부추긴다는 명분으로 엄격하게 통제된다.


 연희의 기사는 일부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이다. 수 십 년 만에 대규모 폭력시위가 연이어 발생했고 그 사건의 여파는 사회 곳곳에 미쳤다. 그녀가 회사를 나와 역으로 들어설 무렵 경찰들의 연이은 검문이 이어졌다. 이곳이 병영사회인지 멋진 신세계인지 그녀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중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보다 못하지는 않으리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불심 검문은 종종 있었다. 테러를 예방한다는 의도였지만 사람들은 불만을 제기했다. 검문과정에서 일부는 사생활 침해라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문제는 그 빈도였다. 그녀는 이 상황에 대한 기사와 보도 내용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안주를 산 뒤에 마포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셨다. 몸이 나른해졌다. 정엽은 며칠째 연락이 없다. 다툰 이후로 일주일째였다.


  또 국수본의 일이 바빠서라는 핑계를 댈 테지. 시위에 파견을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헤어져야 할 때가 됐나? 도통 요새 그의 기분과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압수수사가 진행된 이후에 긴박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녀는 시위 직후 익명으로 잠깐 올라왔다가 사라진 영상을 얼마 전 보았다. 광장의 시위에 대한 보도는 철저하게 통제되었고 시위장면은  검열로 인해 곧 사라졌다. 시위대 몇 명에 대한 영상에 관심이 쏠렸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 같은 움직임이라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를 헤집고 경찰을 무력화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영상의 프레임을 느리게 만든 것’이다. ‘영상을 빨리 돌려서 저렇게 보인다.’ ‘조작이다 ‘. 등등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은 인터넷을 달궜고 결론은 나지 않은 상태였다. ‘인간의 움직임이 아닌 야수와 같다’는 글이 그녀의 기억에 남았다. 정보국은 즉시 그 영상을 검열을 통해 삭제했을 것이다. 인터넷을 우회해서라도 그에 대한 정보와 영상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정확한 출처 확인이 쉽지 않았다.


3

 오래된 나무침대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평화유지군 무궁화 부대 사령부로 돌아온 뒤 정엽은 부대에서 저녁을 먹고 장교 숙소로 돌아왔다. 노트북 컴퓨터로 파악한 정보를 꼼꼼하게 정리해 나갔다. 바뀐 잠자리와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이유 모를 상념이 반복됐다. 정엽은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뒤척거리다 새벽에 일어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포탈에는 온통 가십성 뉴스뿐이었다. 연예인의 공개연애와 정치인의 뇌물스캔들 폭력사건 등이 눈에 띄었다. 정보국이 민감한 내용은 이미 다 검열을 했을 것이다. 정엽은 개성 쪽 뉴스 몇 개를 찾아보았다. ‘개성일대 평화로운 일상’, ‘공단은 정상화 운영 중’이라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최신기사는 없었고 오래전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공단의 폭발이나 화재에 대한 내용은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 손을 썼을 테지. 그는 중얼거렸다. 세면을 하고 시내로 걸어 나와 거리를 돌아보았다. 출근시간이 가까워 오자 거리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버스가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사람들은 일터로 아이들은 학교로 가는 듯했다.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얘기를 하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여인들이 눈에 띄었다. 파란색 치마와 흰 셔츠를 입은 교통안내원이 열심히 붉은색 막대를 손에 쥔 채 교차로에서 수신호를 하고 있었다. 교전이 벌어져도 주민들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김수혁 대위의 말처럼 이들에게 가끔씩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와 총격을 이제 일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대로변에 커다란 두 개의 쌍둥이 빌딩을 중심으로 저 멀리 중심가가 보였다. 교통안내원의 수신호가 차량이 늘어나자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흡사 쿵후 고수의 동작을 연상케 했다. 정엽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령부 건물로 향했다. 김수혁 대위는 공단 폭발 조사는 개풍군 일대에 주둔하는 부대에서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오전에 개풍군 평화유지군 부대에 들른 후에 연구소 운영업체인 서해 산업을 찾을 예정이었다. 관계자와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


   

최근에 여러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엽이 창밖을 보며 멍하니 경치를 보고 있을 무렵 수혁이 말을 꺼냈다. 차량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프차의 승차감이 좋지 않아 온몸이 들썩거렸다. 어제 지나간 자리 같았다. 차량은 교통안내원의 수신호를 받아 교차로에서 잠시 멈췄다.   

어떤 사건 말입니까? 정엽이 물었다.

한 달 전쯤에도 의문의 폭발사고가 있었죠. 저희는 부대를 노린 테러라고 봤고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부대원 몇 명이 다쳤고 총격전도 있었죠. 군 이탈세력 같은데 아직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주민들한테는 이상한 얘기도 돌고 있고요.

이상한 얘기? 정엽은 고개를 돌려 수혁을 바라보았다.

부사령관님은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평화유지군 활동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분간 이 지역 치안을 담당해야 할 거 아닙니까. 외국 주둔군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아니죠. 이들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같은 민족 아닙니까? 주민들도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들 말로는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혹시 그들이 테러와 폭발사건하고 엮여 있을 수도 있고요.

붉은 눈이라. 그게 뭡니까? 정엽은 놀란 듯 되물었다

저도 아직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주민들이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곳에 안 좋은 상황을 만들어 이득을 취하려 소문을 퍼트리는지도 모르고요. 어떤 주민들은 오히려 붉은 눈이 주민들을 돕고 있다고 하고. 말들이 서로 달라서 헷갈립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들의 운동능력이 일반인들의 몇 배나 되기에 혼자서 수 십 명을 상대할 수 있다 뭐 이런 얘기입니다만.

늑대인간 비슷한 것인가요? 정엽이 농담 삼아 물었다.

늑대인간이라. 수혁은 정엽을 힐끗 쳐다본 뒤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이런 소문이 도는 것을 보면 뭔가 실체가 있으니까 나온 얘기겠죠. 뜬금없이 얘기가 돌지는 않을 테니. 정엽은 김수혁 중위의 말에서 이곳에 남한에는 알려지지 않은 복잡한 내막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신호를 하는 교통안내원은 정엽이 탄 차에 신호를 보냈다. 안내원은 끝없이 몸을 움직였고 그 광경이 어딘지 모르게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차량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기묘한 수신호를 뒤로하고 쌍둥이 건물을 옆에 둔 뒤 곧게 뻗은 개성의 대로를 달렸다. 수원의 외각 지역과 비슷한 듯했다.

저기가 김일성 동상이 있던 자립니다. 지금은 다 치워졌지만요.

수혁은 운전대에서 손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차는 개성중앙시장의 교차로를 돌아 사범대학 쪽으로 향했다. 마주치는 몇몇 차량들은 작전용 군용 차량이 대부분이었고 오래된 중국제 차들이 눈에 띄었다. 오전시간이었는데도 도로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내를 벗어나자 도로는 더욱 한산했다. 정엽이 탄 차는 중앙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거친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산과 풀만 없다면 미국 서부나 만주일대를 횡단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몇 번 다니기는 했지만 참 황량합니다. 여기는 시간이 멈춰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개풍군에는 왜 평화유지군 부대가 있는 겁니까? 그쪽지역은 개성하고 공단에 비해 인구도 별로 없는 것 아닌가요? 정엽이 물었다.

 개성일대가 형식상으로는 중립지역이지만 치안에 대한 수요는 어디든 필요하죠. 개성이 중요한 게 공단사업이 커지면서 북한경제도 이곳의 외화에 의존하고 있었죠. 그 비중은 점점 늘었고. 개성일대 공단 근처는 자본주의 물결이 넘쳐나요. 룸살롱부터 시작해서 없는 게 없죠. 달러 좋아하는 건 이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 수사관님도 알다시피 시장이 개방되면서 안 좋은 것들도 빠르게 들어왔죠. 매춘과 마약 폭력배들이 뒤섞여 있는 것도 당연하고요. 그 일대는 이미 우범지역입니다. 이권을 두고 여기도 피 튀깁니다. 몇 달 전 군 출신 조폭끼리 살인사건도 나서 골치 아팠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걸 행정력과 공권력은 아직 다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요. 뒷골목에는 큰 조폭집단도 있는 것 같더군요.

그렇군요. 이곳도 이제 슬슬 남쪽과 같아지겠군요. 정엽은 창밖을 보며 수혁에 말에 대답했다.

군용 지프차는 덜컹거릴 때마다 으르렁 거리며 굉음을 냈다. 시내 중심부를 지나 10 분쯤 지나자 4km 앞에 개풍군이라는 낡은 이정표가 보였다. 외각에는 길을 따라 시멘트로 만든 집들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다. 가로수는 없는 길가 주변엔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풀은 도로 가까이로 지나치게 자라서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차가 지나칠 때마다 풀들이 우는 듯 한 풀벌레 소리와 바람소리가 뒤섞였다. 10여분쯤을 더 달리자 도로 왼편에 작은 도랑이 정엽의 눈에 띄었다. 그때였다. 멀리 도랑 위에 사람의 형체가 눈에 띄었다. 정엽은 그를 가리키며 수혁대위를 불렀다.


네? 수혁은 정엽을 돌아보았다.

멈춰……

 정엽은 순간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중심축 파지법 자세로 28 구경 k5 권총을 빼 들었다. 정엽이 탄 군용 지프는 빠르게 조준사격을 하고 있는 검은 옷의 사람을 미끄러지듯 지나쳐가고 있었다. 두발의 총격이 들렸고 순간적으로 수혁의 왼편 어깨를 총탄이 관통했다. 이후 앞 우리 창이 깨져나갔다. 피가 유리창에 튀어 데칼코마니 같은 형체를 만들었고 기어박스에도 튀었다. 순간적으로 수혁의 몸은 핸들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는 정신을 잃은 듯했다. 총탄이 타이어에 맞았는지 차는 중심을 잃고 지그재그로 차선을 넘나들었다. 두 번째 총소리가 들린 직후였다. 정엽은 핸들을 잡았다. 어떻게든 차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지만 차는 강둑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가 몇 바퀴를 굴렀다.


벨트를 차고 있었지만 차가 전복돼 위아래가 뒤바뀌자 의식이 흐려졌고 온몸에 통증과 갑작스러운 한기가 느껴졌다. 출혈이 생긴 모양이었다. 차가 도랑에 걸쳐 뒤집혀 움직임이 멈추자 품 안에서 휴대폰의 비상버튼을 눌렀다. 통화 이탈 지역이라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정엽은 아직 의식이 있었다. 그때였다. 오십 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검은 옷을 입은 형체가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정엽은 끝까지 그를 노려보았지만 시야가 어두워지고 의식은 점차 흐려졌다. 피가 눈으로 흘러들었다. 뿌연 형체가 어스름이 보였다. 짧게 자른 머리와 각진 얼굴 그리고 검붉은 피부톤이 드러났다. 인민복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큰 키의 마른 체형의 사람이었다. 얼굴의 윤곽은 흐릿했지만 걸어오는 그 모습에서 붉은색 눈이 번뜩이는 듯했다.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정엽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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