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을 한 네놈들은 모두 모가지가 날아갈 줄 알아.
개성일대 5군단 김병철 사령관은 초초한지 계속 담배를 물었다. 개성에는 천둥번개와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비밀리에 자신의 친위부대를 불러 모았다. 작전에 투입된 두 개 소대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무장을 하고 군용 트럭에 올랐다. 김병철과 이들은 목숨을 담보로 일생의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친위 소대원을 선발하고 이번 작전의 성공이 인간다운 새로운 인생을 사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일렀다. 이들의 목적지는 해주시 벽산에 있는 비밀 무기 저장소였다. 김정일의 측근이었던 그였기에 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었다.
비바람을 뚫고 차는 출발했다. 군용 트럭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빗속을 뚫고 굉음을 내며 나아갔다. 한밤중이라 유난히 엔진소리가 크게 들렸다. 목적지까지 이제 20여분이 남았다. 일렬로 뒷자리에 앉은 소대의 입김이 그나마 약한 온기를 만들었다. 그들의 손은 긴장으로 땀이 배어있었다. 같은 시간 김병철은 5군단 사령관 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전력수급문제로 백열조명등이 점멸했다. 천둥과 번개가 연이어 몰아쳤다. 그는 연거푸 2개의 담배를 잇달아 피운 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젖혔다. 모든 신경이 곤두선 느낌이 들었다.
김병철은 정치장교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보위장교는 그와 뜻을 같이 하기로 이미 약속이 된 상태였다. 문제는 정치장교였다. 정치장교의 감시망이 있었지만 오늘은 야간 훈련이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에서 누군가를 따돌리기는 쉽지 않다. 포섭하거나 아예없애야 한다. 작전이 성공하면 정치장교는 처단할 수밖에 없다. 함경북도 6군단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어제 받았다. 기회는 오늘이다. 6군단의 전차부대가 평양으로 진격할 것이고 평양근교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모든 부대에 비상이 걸려있다. 김병철은 6 군단장을 잘 알고 있다. 김정은이 집권하게 되면 그는 바로 숙청될 것이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평생 중노동을 하거나 처형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에 물든 반동분자라는 누명과 함께. 그는 국경지역의 밀무역에 관여했다. 평양으로 진격하지만 성공은 장담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 시간을 끌고 중국으로 망명을 신청하는 방법도 있다.
그는 장성택과 함께 국경 무역을 통해서 부를 손에 넣었다. 김정은이 집권하면 이를 핑계로 그를 몰아낼 것이 분명하다. 김병철은 6 군단장을 알고 있었다. 노동 교화형을 선고받고 비인간적인 삶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반란을 시도해도 평양에 지지 세력과 기반이 없다. 그 선택은 무모하고 공허한 몸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성정은 결심을 되돌리지는 않는다. 김병철도 5군단이 자신의 마지막 군 생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김정일은 이미 고혈압과 심근경색으로 회복이 불가능하다.
김정은과 강경파 사회주의 노 선가 가 개방개혁을 강조했던 자신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김 씨 부자가 공화국을 망치고 인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이런 삶은 이런체제는 이제 종말을 고해야 한다. 김병철은 공단의 크기를 키우고 남조선과 외국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해 인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화국을 위해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할 일이다. 모든 것은 한 시간 뒤에 결정된다.
두 대의 군용 트럭은 부대 앞 검문소에 멈춰 섰다. 초소 병사가 출입증과 암호를 요구하자 운전병은 차에서 내렸다. 보조석에서 내린 리성호 대좌는 권총으로 둘을 사살하고 시신을 뒷자리에 던져 넣었다. 트럭은 곧장 부대 내로 향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져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트럭은 부대로 진격해 곧장 무기고로 향했다. 대원들은 차에서 내려 무기고 문 앞에 경비병을 복부에 칼을 꽂아 넣었다. 순식간에 이들은 비명과 함께 빗물에 쓰러졌다. 붉은 피가 빗물에 쓸려 나왔다. 10여 명은 거대한 무기고 안에 들어가 견고한 금속으로 덮인 상자 5구를 탈취해 곧장 차에 실었다. 10여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들이 출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출발하자 뒤따라오는 차량에서 사격이 시작됐다. 리성호 대좌부대의 대응 사격이 이어졌고 추격하던 지프차량이 타이어에 총을 맞고 전복됐다.
두 대의 차량 중 앞선 차량에 물건이 실려 있었다. 앞 차량은 최대 속력으로 개성으로 향했다. 뒷 차량은 대응 사격을 하며 추격차량을 따돌리며 시간을 벌고 있었다. 연안군에서 개성으로 돌아오는 군 경계 길목에서 매복인원이 뒤쫓아 오던 차량에 자동 소총을 발포했다. 순식간에 추격 차량은 폭발음을 내고 전소했다. 리성호 부대는 곧바로 김병철이 대기하고 있던 곳으로 향했다. 작전은 성공했다. 개성 근처에 이르자 리성호는 김병철에게 군용 무전기로 보고 했다.
작전 완료했습니다.
수고했다. 공화국과 인민을 위한 혁명을 위해 ‘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삼십여 분 뒤 김병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김병철 네놈이 이때를 노려 반란을 저질러? 총참모장 김수일의 전화였다.
반역을 한 네놈들은 모두 모가지가 날아갈 줄 알아.
평양은 지금 교전 중인데 여기까지 신경 쓸 수 있갔소? 김병철은 낮은 톤의 목소리로 답했다. 6군단의 탱크와 병력들이 평양으로 진격하며 91 수도 방어 군단과 교전이 진행되고 있었고 아직 완전히 진압되지는 못했다. 방송에서는 반역분자들을 색출해 절단 내고 위대한 최고지도자 동지를 전사적으로 지켜내자는 내용만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었다.
평양이 접수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알 거요. 최고 존엄도 사람이고 당신도 숨을 쉬잖소. 이미 나를 따르는 인원들은 목숨을 걸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데 전력하기로 했소.
이 미친놈의 새끼가 어디서. 네놈의 입을 찢고 대가리를 잘라버리겠어. 내가 못할 줄 알아. 그는 격정에 차 말을 채 마치지 못할 정도였다.
잠시 대기 하라요. 이쪽으로 허튼짓을 했다가는 시험 삼아 이 무기로 평양을 노릴 것이요. 평양을 수호하는데 만전을 기해 보시오. 여기는 이제 나름대로 살아볼 것이요. 김수일의 욕설과 외침을 뒤로하고 김병철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평양 근처의 반란이 진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들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6군단 반군 진압은 며칠이 더 걸렸고 그때까지 평양은 개성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사이 김병철은 당을 점령하고 재빨리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자신을 따르지 않거나 반대하는 세력들은 모두 잡아서 군 유치장과 교도시설 그리고 강제 노역장에 넣어 버렸다.
개성 일대는 공단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후 자본주의체제의 경제구조가 암묵적으로 퍼진 상태였다. 장마당은 점점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고 식량과 물자 배급이 어려워지자 당국도 어느 정도는 묵인했다. 공단이 들어서기 전에도 개성외각의 장마당에서는 비밀리에 중국산과 남쪽 물건이라고 불리는 한국산 제품을 팔기도 했다. 공단의 설립은 장마당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고 사람들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성 주민들은 김정은과 강경파가 득세하면 몇 년간 누렸던 시장거래가 위축될 것을 우려했다.
이들은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단이 설립되고 안정기에 접어들자 사람들의 생활은 기존보다 윤택해졌다. 이제는 아무도 고난의 행군시대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욕망은 뒤로 돌리기 어렵다. 김병철은 사람들의 마음을 간파했다. 개성군 사령관에 부임해 시장에 대한 간섭을 줄이고 질서를 잡았다. 당과도 협력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5군단은 인민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고 시민들에게 각인시켰다. 군 범죄도 줄어들었고 김병철이 군단장이 된 후 민간에 의지하던 부분을 줄여 개성인민들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당에 대한 관리도 잊지 않았다. 수년간 이 과정을 거치자 그를 따르는 세력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영화와 같은 일이 몇 년간 개성에서 일어났다. 물론 북한 내부의 권력다툼과 6군단의 반란 그리고 권력 교체기의 공백을 거쳤지만 1인 절대 권력의 권위주의 국가에서 이렇게 도발적인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김병철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김정은의 권력을 압도했다. 김정은이 과도한 숙청으로 내부 갈등을 키운 것이 화근이었다. 친중파와 온건 개방개혁주의자들 그리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고수하려는 강경파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고 김정일은 혼수상태에서 후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고 숨을 거뒀다. 결국 김정은이 권력을 잡았지만 개성의 반란세력을 바로 없애지는 못했다. 몇 년간 김병철은 주민들의 신임을 끌어내며 치밀한 전략을 가지고 움직였다.
남쪽에는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다. 평양과도 대립해야 하는데 굳이 남조선과 갈등을 키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김병철을 따르는 당과 군 세력은 임시정부를 선포해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김병철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와 당 그리고 주민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실세였다. 그는 공단과 장마당에서 달러와 위안화 북한 돈 모두 장마당에서 사용되도록 했다. 개성일대의 사회주의 경제 체제는 이미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양 권력과 군부는 병력을 개성으로 내려 보내 진압을 시도했지만 소모전만 계속될 뿐이었다. 함경도 6군단의 반란으로 평양도 피해를 입었기에 전력을 다 할 수 없었다. 포격과 총격으로 평양에서도 건물이 일부 무너지고 민간인 사상자와 사망자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내전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남한 정부는 정보를 파악하고 미국과 함께 평양 사태와 더불어 개성지역의 분쟁에 대해서 주의 깊게 논의했다. 몇 년간 소모적 국지전이 지속되고 민간인의 피해와 부상자와 사망자가 계속 늘어나자 국제사회는 우려를 나타냈다. 남한 정부도 un차원의 대응 요구에 목소리를 냈다. 결국 안보리가 소집되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평화유지군 파병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북한 내정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완강한 반대의사를 보이며 전체회의에서 퇴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에 걸친 전체 회의에서 중국과 러시아도 이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를 우려한 나머지 결국 파병에 동의했다. 남한군과 미군이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개성으로 진군할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하려 한 것이다. 북한에 시간을 벌어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국지전을 치르고 있기에 국내 사정이 복잡했다. 중국도 대만과의 반복되는 무력충돌로 인해 개성사태가 제3차 대전으로 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김병철은 개성의 당 간부를 통해 비밀리에 남한과의 접촉을 다시 시도했다. 평양의 김정은은 평화유지군이 공화국의 영토에 진입하는 순간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에게 주체의 무력을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당면한 상황을 해결하기도 벅찼다. 파병은 결정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인도네시아 벨기에 칠레 그리고 한국의 무궁화 부대가 개성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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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필의 일상은 평온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제약회사에 취업했다. 다들 그렇듯 그의 일상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석사과정에 진학해 신약연구를 꿈꿨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2008년 전 세계를 뒤흔든 외환위기로 장학금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씨가 말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현실적 선택을 했다. 일과는 병원을 다니며 자회사 약품을 파는 것이다. 그래도 화학을 전공해 어느 정도 약품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의사들과의 대화에서도 아는 척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의약과 제약 관련 분야는 성장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2008년 후반 대한민국 경제가 외환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위기가 닥치기 전 세계적인 경기호황에 따라 대기업들은 외화를 빌려 부동산과 소비재에 투자를 늘렸다. 하지만 경제상황이 급변하면서 시작했고 유가와 환율이 오르기 시작했다. 부동산으로 몰린 막대한 자금은 투기를 부추겼고 건설사들의 미분양 아파트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돈을 빌려준 저축은행이 유동성 위험에 빠진 것이다.
뒤이어 순차적으로 금융위기가 시장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기업들은 돈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국가 재정 건전성은 극도로 악화됐다.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가 금리인상을 머뭇거리자 외화 유출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는 디폴트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쓰나미는 사람들의 삶을 집어삼켰다. 실업자가 늘어났고 의료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의료보험의 보장범위가 축소되고 사람들은 제 때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이 과정에서 마약성 진통제의 판매량은 급속도로 늘었고 수요는 폭발했다. 사회적 분위기와 다르게 제약과 신약 분야산업은 호황을 맞은 것이다. 제약사들은 더 많은 사람을 고용했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이어갔다. 김수필도 그 파고에 몸을 실었다. 취업은 수월했고 하는 일도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나자 그는 의사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의사들에게 외환위기는 다른 행성의 일이었다.
김수필은 의사들 골프모임에 참여해 주말마다 라운딩을 나가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한 의사는 룸살롱에서 술을 마실 때마다 김수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업무카드로 결제를 하기 위해서 택시에 몸을 실었다. 개업식 화환 나르기 의사 장인의 장례식장에서 일을 하는 것은 쉬운 편에 속했다그렇게 10년을 보내자 서서히 그의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김수필은 며칠 전 한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차장으로 승진해 그는 일선의 업무보다는 관리에 좀 더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부하직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대학병원의 굵직한 매출건수가 나오면 그동안의 인맥을 이용해 본인이 직접 영업을 나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리 흔치는 않았다. 평범한 날이었다. 김수필은 부하직원이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해 그를 불러 나무라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어이, 김수필 차장, 이제 차장 됐다며. 통 연락이 없어.
누구신가 했더니 김 선생님이시군요. 오랜만에 연락 주셨네요. 혹시......
하하, 역시 김 차장은 눈치가 빨라 오늘 밤에 연합회 모임이 있어서 말이야. 청담동에 J 알지? 와서 한잔하고 가. 김수필은 부아가 치밀었다.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도 자신들이 필요할 때마다 연락을 해온다. 부하직원을 보낸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아니, 우리가 어디 한두 해 알고 지낸 인연인가. 김 차장도 우리한테 너무 무심해. 그는 지난번 처방을 약속했던 약을 다른 업체로 바꾸고 접대까지 받았지만 자신에게 물을 먹인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김수필은 인사고과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하하, 물론이지요. 김 선생님이 보자 하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달려가야죠. 김수필의 말을 들은 부하직원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통화가 끝나고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아이 씨발. 그는 옆에 있던 서류를 집어 문 쪽으로 집어던졌다. 그는 부하직원을 보고 갑자기 큰소리를 냈다.
웃음이 나와? 이 상황에? 영문을 모르던 부하직원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 웃음이 나오냐고. 내 통화가 그렇게 우스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키보드를 직원의 얼굴에 집어던졌고 얼굴을 맞은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전화에 맞은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수필은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를 생각했다. 김수필은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실수를 저질렀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갑자기 총을 쏜 것처럼. 그는 갑자기 이방인의 그 구절이 떠올랐다. 하지만 뫼르소는 삶의 부조리를 대표하는 이방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자신은 무엇인가. 불합리한 이 제도와 구조에 저항하지 못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애꿎은 직원에게 분풀이를 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닌가. 수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옥상으로 나갔다. 피우다 만 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는 긴 장초를 하나 집어 들었다. 수년간 끊었던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며칠 후 김수필은 직무에서 배제됐다. 한 달간 그는 혼자 동료도 업무도 없는 공간에 갇혔다. 부하직원이 소송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말들이 나왔다. 회사는 그에게 퇴사를 종용했다. 한 달 후 보직이 또 바뀐다는 말을 인사부서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버터야 했다. 이 좁은 바닥에서 이대로 회사를 그만둔다면 동종업계의 취업은 어려울 수 있다. 아니면 전혀 다른 분야로 재취업을 해야 한다. 약품 영업을 주로 하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가 퇴직의사를 밝히지 않자 회사는 뜻밖의 발령을 내기 시작했다. 그를 신약개발보조와 화장품 자재 관리부로 인사 발령을 낸 것이다. 김수필은 맡은 업무가 없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창밖을 보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사부는 교묘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십 년이 넘게 지나 약품의 원재료도 생소했고 무엇보다 알아야 할 내용들이 너무 많았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약품을 관리하고 재고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수월하다. 회사는 이 점을 노린 것이다. 김수필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다. 그나마 이곳은 최소한의 업무를 할 수 있다. 비록 연구 직원들과 자재부원들이 자신을 유령 취급한다고 해도 자재 수급과 물품관리는 누군가가 해야 하는 일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그에게는 업무라고 불리는 것을 할 수 있다. 다행인 것은 그의 연차가 이 회사에서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를 신입사원처럼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외부의 도움 없이 김수필은 스스로 하나씩 약품의 특성과 자재 및 재료 수급에 대해서 이해를 넓혀 나갔다 그의 성격도 쉽게 상황을 포기하지 않도록 했다. 집요하고 편집증적인 그의 성격은 이런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몇 달이 지나자 부서에서도 조금씩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조만간 그만둘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스스로 업무에 적응하고 필요한 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수필도 이런 상황을 알아챘고 조금씩 자리가 잡혔다. 인사부에서는 그의 이런 태도와 상황 적응에 혀를 내둘렀다.
김수필의 인생을 뒤바꾼 사건은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일어났다. 회사는 신약의 임상실험을 앞두고 분주했다연구진들도 야근과 철야작업을 번갈아가며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김수필의 업무는 신약 임상과 크게 관련은 없었지만 업무량이 늘어나는 바람에 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재고 정리를 하면서였다. 그는 특정한 성분 화합물이 과도하게 사용되고 실험 양이 늘어나는 것을 파악했다. 피페리돈과 페닐에틸브로민 화물의 재고의 변동 폭이 심했다. 물론 사용량의 차이로 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 물품들을 살펴본 뒤 뭔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가 아무리 전공을 잊었다고 하더라고 화장품과 피부트러블을 막기 위한 연고 성분의 일부를 펜타닐로 합성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재고량이 지속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은 누군가 이를 다른 용도로 전용하고 합성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특히 임상을 앞두고 야근을 틈타 누군가가 일을 벌이고 있다면 재미있는 게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애사심은 없었다. 상황 자체가 흥미로울 뿐. 임상과 신약 개발 일정이 거의 마무리 돼 갈 때쯤이었다. 연구 산업단지는 인천 외각의 위험물 취급 장소 근처에 있었다. 몇 주 후 신약 임상은 실패로 결론이 났고 회사의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연구진과 경영진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수필은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수필은 일과를 정리하고 저녁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5년 전에 이혼한 후 그는 혼자서 살고 있었고 자녀는 없었다. 집에 들어가야 썰렁한 공기만이 감돌아 가급적 사무실에서 버티다 늦게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 불이 꺼진 사무실에서 그는 혼자 멍하니 인터넷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슬슬 집에 가려하다가 주머니를 살펴보니 메모리 스틱이 없었다.
그는 지하 연구 시설에 재고 파악을 위해 들렀다가 주머니의 물건을 그곳에 빼놓고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김수필은 연구 시설로 향했다. 연구동은 사무실과 떨어져 있었고 자재창고를 가로질러야 했다. 신약의 실패로 연구진들의 분위기가 침체돼 이른 퇴근으로 연구실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디지털 도어록을 열고 지하계단으로 들어갔다. 연구실 가장 안쪽에 희미한 불빛이 눈에 띄었다. 환풍기와 공기순환기가 최대한 돌아가고 있었지만 코를 찌르는 매캐한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신약개발팀 한 명이 방독면을 착용하고 뭔가를 집중해서 만들고 있는 듯했다. 혼자서 은밀하게 뭔가를 작업하고 있다면 뒤가 구린 뭔가가 있을 수 있다. 김수필은 재빨리 몸을 숨겼다. 재고량을 파악해 방독면을 쓴 자가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증거를 수집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신약개발팀의 한수민 차장이었다. 김수필은 며칠간 고민했다. 내부 고발자가 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회사와 협상을 다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은 회사에 마음이 떠났다. 잘해봐야 몇 년 더 버티다 퇴직금을 받고 나가면 그만이다. 그러면 한수민은 그는 대체 왜 약을 제조한다는 말인가. 급전이 필요해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가. 제일 빠른 방법은 그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인트라넷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한수민 팀장님. 자재 관리부 김수필입니다. 사고 치고 이 부서로 왔기에 누군지는 잘 아실 것이고 따로 소개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자재 활용에 문제가 있어서 한번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만. 민감한 약품과 재료에 문제가 있어서요.
음……제가 말씀드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뇨 만나야 합니다. 뭔가 좀 알아낸 것이 있어서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해서요. 방독면 쓴 모습이 잘 어울리십니다. 내일 저녁 최근 후 옥상 휴게실에서 잠시 뵙죠.
.........
아 네……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김수필이 방독면 얘기를 꺼내자 한수민은 잠시 말이 없었다. 김수필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냥 부딪혀 보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만나기로 한 장소로 나갔다. 한수민은 제법 덩치가 있었다. 곱슬머리에 두터운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체크무늬 셔츠를 입었다. 피부는 검게 그을린 편이었고 얼굴은 넓었다. 콧방울이 크고 양 볼에는 여드름 자국이 흉터로 남아 있었고 광대가 발달했다. 완고함이 느껴졌다.
한수민 팀장님 이렇게 만나자고 해서 놀라지는 않으셨는지요. 김수필이 말을 꺼냈다. 한수민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재부서의 김수필과 자신이 딱히 관련이 있을만한 일은 없는 듯했다. 다만 방독면 얘기를 꺼낸 것이 좀 걸렸다. 한수민은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지난주 수요일에 제가 일이 있어서 좀 늦게 까지 회사에 있었습니다. 그날 자료를 좀 정리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하 연구실에 비품을 점검하러 갔다가 usb 메모리와 서류를 남기고 와서 다시 갔다 왔죠. 김수필은 한수민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대로 그의 얼굴빛과 표정이 좀 달라져 있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물건을 빨리 찾고 가려고 했는데 문을 열자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약품을 재고를 좀 파악해 놨는데 벤젠과 아세톤 메틸아민 등의 유독성 물질의 양의 차이가 있더군요. 그게 뭐에 쓰는지는 잘 아실 테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한수민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투였다.
한수민 팀장님은 어느 정도 근무 연차가 되는 것 같던데 제가 좀 자료를 모아 놓았습니다. 아무래도 증거가 필요할 듯해서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증거라? 무슨 증거 말입니까? 밤늦도록 합성물질 연구한 것 가지고 제가 김수필 씨한테 미리 사전에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허허.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연구를 하기는 하셨군요. 김수필은 뭔가 이해했다는 듯이 웃음을 보였다.
제가 확인한 것 몇 가지가 있는데 아직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업무에서 밀려나 이곳 자재부로 왔는데 그냥 회사에 보고하면 되지 굳이 한수민 팀장님과 이렇게 만날 이유는 없죠. 안 그렇습니까? 한수민은 곤란하게 걸려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수필의 마약 사업은 한수민의 만남과 함께 시작되었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한수민의 작업은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그는 한수민과 함께 물량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한수민이 보기에 김수필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한수민은 현실적인 목표가 있었다. 그가 약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은 유흥이 목적이었다. 강남의 유명한 단골룸살롱을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드나들었다. 그렇게 되자 모아놓은 돈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씀씀이를 위해서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은 결국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절대 약을 먹지는 않았다. 쾌락을 위해 약을 팔지만 끝을 알기에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그는 언젠가 김수필과 자신의 단골 술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같이 일한 지 1년 정도가 될 때였다. 이들의 역할은 이제 철저하게 분업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수민은 김수필에게 다크웹에 판매처와 자신의 아이디를 알려주었고 물량의 처리를 맡겼다.
김수필은 이때 처음으로 가상화폐를 통해 익명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르노산업이 전자결제 시장을 만들고 키운 것처럼 인터넷의 블랙마켓시장은 가상화폐라는 새로운 결재 시장을 키울 것 같았다. 김수필은 이 사업의 규모가 더 커질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한수민은 그에게 코가 꿰어 끌려가는 입장이었지만 몇 달이 지나자 김수필이 새롭게 보였다. 사고를 내기 전까지 그의 업무 평판은 좋았다. 그 평가의 이유가 있었다. 재고관리와 영업방식 그리고 일처리를 보니 자연스레 그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영업을 한 김수필은 자신의 분야에서는 철저했다. 이들은 자연스레 자신들의 분야에 집중하자 물량은 점점 늘어나고 수익도 쌓이고 있었다. 둘이 한수민의 단골술집에서 술을 먹을 때였다. 한수민은 궁금했다. 김수필은 무엇 때문에 위험을 자처하는지를.
김 형은 참 이상한 사람이네.
뭐가 말입니까? 김수필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나야 술 마시고 놀려고 돈을 벌지만 김형은 나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말이요.
그렇게 되나?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난 한 형한테 뭘 바라고 있을까? 그냥 처음엔 호기심이기도 했고.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 그런데 다크웹이라고 불리는 것 그리고 가상화폐가 실제로 쓰인다는 것을 보니 이거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한수민은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한잔 마시고 말을 꺼냈다.
뭐 번거롭게 생각하지 마쇼. 걸리지 않게 항상 조심하고 난 디텍티브 저지하고만 거래했어. 그 이상은 위험하기도 하고. 물량 더 달라는 거 난 못 만 드니까. 그 정도만 가져가라 했는데 김 형이 일을 더 하니 나도 수익이 늘어서 좋은데 위험한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그 바닥 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늪지대 같은 곳이지. 한수민은 아가씨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건배를 했다. 한수민의 권유에 김수필도 술을 몇 잔 마시자 취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그는 한수민에게 자신에 대해서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얘기를 몇 년 만에 처음 하는 것 같았다.
이봐. 한 형. 난 말이야.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르겠어. 난 사실 보육원 출신이거든. 이 세상이 좆같아서. 원장 부모는 겉보기로는 좋은 사람이지. 애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런데 사실 그게 아녔단 말이지. 그들은 애들을 이용해서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어. 연말이나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애들을 앞세워서 어떻게 해서든 후원금을 끌어들이려 생 쇼를 다 하는 거야. 이쁘장한 여자애들을 건드리는 건 다반사였지. 그래도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어. 거기서 쫓겨나면 끝이라고 생각했거든. 무시받기 싫어서 열심히 살았지. 어릴 때는 애들이 풀고 버렸던 문제지도 주워오고 지우개로 열심히 지워서 풀고 그게 들키지 않으려고. 날 무시하는 놈들은 끝까지 쫓아가서 대가리를 깨 줬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노량진에 들어가서. 독서실 총무를 하면서 공부를 했고 오백만 원을 들고서. 김수필은 술잔을 보면서 말을 꺼냈지만 한수민은 이미 술이 취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파트너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느라 김수필의 말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때 김수필의 파트너가 문을 열고 들어와 반가운 척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오빠 미안해. 내가 좀 일이 있어가지고. 호호호.
파트너가 말려도 김수필은 제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녀가 따라 주는 대로 술을 연거푸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한수민은 김수필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하며 그의 파트너와 여전히 둘이서 뭔가 얘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김수필은 대학시절 최연경에 대한 마음을 접었을 때가 생각났다. 희망이 없을 때 자신의 전부였던 무엇인가를 놓쳤을 때 그 상실감은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는 갑자기 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쓰러졌다. 김수필은 정신을 잃었다.
김형, 김형,......
한수민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김수필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사업시작 1주년을 자축하는 자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김수필은 몇 년 간 한수민과 일을 진행하고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일 년 간 벌어들인 돈을 계산해 보니 아파트 대출금을 조만간 상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작은 사업체를 꾸릴 정도는 된다고 판단했다. 물론 일이 오래 지속될수록 위험부담도 늘어난다는 것을 그도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 날을 정해서 회사 근처의 지하사무실공간에서 새벽에 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위험은 언제나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안개처럼 이들을 불쑥 찾아왔다. 동시에 이들의 사업도 더욱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그날도 둘은 작업을 마치고 구매자와 접속하려 하고 있었다. 약속시간이 됐지만 구매자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디텍티브 저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거의 이들은 일주일 단위로 연락을 주고받았고 이후 쭉 같은 시간에 연락을 취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한수민의 아이디는 한스였다. 이들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씨발, 이거 뭔 일이 생긴 것 같은데. 한수민이 말을 꺼냈다. 갑작스레 연락이 안 되니. 만들어 놓은 물량도 빨리 털어야 하는데. 김 형. 어쩌지 아무래도 답변이 없는데. 우리 이제 쫑난 것 같아. 이들이 없어졌으면 거래처 새로 파야 하는데 위험부담이 너무 커. 한수민은 체념한 듯했다. 다른 블랙마켓을 검색해 봐. 뭐가 더 있겠지. 새로운 판매책을 찾아보면 어때? 김수필이 말했다.
아냐, 김형. 이 이상은 위험해. 나는 이제 그만둬야 할 것 같아. 하려면 혼자 해. 실크로드(다크웹의 유명블랙마켓으로 비트코인을 통한 불법 거래가 이뤄졌으며 마약이 주로 거래된 인터넷 공간)가 이제는 안전하지 않을 거야. 새로운 다크웹(접속허가가 필요한 네트워크나 특정한 소프트웨어를 통해서만 접속할 수 있는 네트워크로 주로 인터넷의 암시장 역할)으로 다들 옮겨 다니겠지. 미국은 FBI, DEA( 마약단속국(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 DEA는 미국 법무부 산하의 법집행기관이자 수사 정보기관)가 이 블랙마켓을 주도 면밀하게 감시할 거고. 경찰에서도 여기를 주시하고 있을지 몰라.
김수필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다. 그는 한수민을 설득해 올해까지만 이어가자고 했다. 한수민은 결국 김수필의 설득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올해도 이제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물량을 만들어 팔아 치우고 손을 터는 것이 낫다고 그도 생각했다. 물량작업은 순조로웠다. 몇 주 뒤 같은 시각에 그들은 다시 다크웹에 접속했다. 디텍티브 저지는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지난번에 연락을 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큰 거래처를 확보해 추가로 물량을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거래가 가능할 수 도 있으며 현재 물량의 두 배 이상을 제안했다. 김수필과 한수민은 이들이 보낸 내용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한수민은 반대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혹시 모를 함정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수필은 달랐다. 올해까지 큰 거래를 하고 일을 접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