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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도중 정엽의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전화를 받았다. 수원이었다.
왔으면 전화나 좀 하지. 사람이 왜 그렇게 건조해? 잘 갔다 왔어? 개성의 공기는 좀 느끼고 왔나? 아 또 왜 그렇게 무게 잡고 그래. 말 좀 해. 형이 그러면 좀 무서워 뭔 일 또 있는 거 같아. 개성 갔다고 하니 복직은 한 모양이네.
총에 맞았지만 일단은 살아있고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 개성은 이미 사회주의 북한이 아냐. 검문도 있고 월경에 대해 제한을 하고 있지만 장마당만 보면 다국적 메가로 폴리스 같은 느낌이 든다. 북한 임시 정부는 이름만 남은듯 해.
천지개벽을 했나보네. 잠깐 아니 뭐라? 총에 맞았다고? 그런데 멀쩡해? 농담이야? 아님 뭐 개성에서 어벤저스라도 된 거야?
하여튼 이자식은 형이 다쳤다는데 시덥지 않게. 헛소리 할 거면 전화 끊어라.
아 왜 그래. 수원은 웃으며 빨리 화제를 돌렸다.
연희 누나는 잘 있어?
연희 안본지가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난다. 네가 통화해봐. 정엽은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뭘 했길래? 싸웠어?
싸우긴 이제 싸울 때도 아니지. 연희는 연희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길을 가는 거지.
설마? 헤어진 거야? 둘이 잘 어울리던데.
아냐. 그런 거. 조금 소원해 진거야. 서로 자존심 싸움중이다. 누가 먼저 연락하는지.
형 개성 갔다 온 것도 알아?
글쎄다. 모를 걸. 정엽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투였다.
왜들 싸우고 그래. 둘이 잘어울린다니깐. 나로 인해 만났다고 하니 뭔가 책임감 같은 게 있어.수원은 웃으며 말했다.
정엽은 아파트 근처 벤치 옆 플라타나스 나무를 쳐다보았다. 갈색의 나뭇잎이 벤치의 주변을 채웠다. 푸른 낙엽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짙은 나뭇잎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엽은 벤치 아래에 수북이 쌓인 나뭇잎중 하나를 집어 냄새를 맡았다. 그는 껍질이 떨어진 나무 밑둥에서 시선을 옮겨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나뭇잎은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마치 거인이나 거대한 초식동물이 혓바닥으로 나무를 한입 훑어서 먹은 듯 앙상한 가지에 누런 잎들이 붙어 있었다.
넌 개성 얘기가 궁금할 텐데. 그렇지? 수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때 네가 준 정보 중에 대량의 펜타닐과 마약의 유통과 생산이 개성에서 이뤄져 밀반출 될 수 있다고 했고 난 그 말을 믿지 않았어. 국내의 마약 문제가 심각하긴 해도 중국이나 동남아 트라이앵글 지역에서 밀반입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개성 장마당 얘기를 그쪽 관계자들 한테 들으니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해. 평화유지군이 그러더라고 갑작스레 마약거래가 늘어났다고. 사실 난 네가 김선배가 남긴 말에 너무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네 말대로 어느 순간부터 국내 유통되는 양이 늘더구나. 물론 동남아에서 들어오는 물량도 있을 테고 경찰자료를 좀 봤는데 그쪽에서 감당할 수 있는 물량이 아녔어. 분명 다른 루트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지. 더군다나 그 물건을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아직 알 수가 없었고.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는데 이렇게 대량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시중에 약이 풀리는것은 윗선의 개입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으음...... 그렇지. 수원은 추임새를 넣는듯 그의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 무의식 중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공단 폭발 사건은 하나의 계기였어. 부장은 집회와 시위의 배후에 북한 쪽이 있다고 보는 것 같아. 어머니 사건도 있으니 나를 보낸 것 같기는 해. 그런데 아직 나는 잘 모르겠어. 뭔가 숨겨진게 더 있을 것 같아연구소 폭발에 대해서 평화유지군이 자체적으로 조사한다고 했지만 국수본은 제3의 기관이 조사를 해야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그렇게 정리가 된 거야. 이 과정에서 뜻밖의 소득이 있었어.
뭔데? 수원이 궁금한 듯 말했다.
카르텔이 있다면 뒷배가 있을 거란 거지. 그게 평화유지군 간부든 개성의 고위급 인사든 누구든 간에. 물증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은데 실마리가 잡힌 것 같아. 누군가 정보를 줬거든.
호오 그래? 수원은 뭔가 흥미가 생긴다는 말투였다.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정엽은 usb 메모리 얘기는 아직 꺼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뒤 말을 계속했다.
얼마 전 있었던 광장의 폭력시위와 총격사건 기억하지? 내가 거기서 다친 것도. 최근 가장 격렬했던 시위 말야. 그 중 한 놈이 잡혀서 조사가 진행 중이야. 난 아직 만나보지 못했는데 곧 볼 생각이야. 그 놈은 운동신경이 반사적으로 빠른 놈이었고 인간의 범위를 넘어설 정도의 근력을 보여줬거든. 내용을 추려서 심문하면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을 거야. 부장말대로 만약 그놈이 공단과 엮여 있다면 말이지. 지금은 입을 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 계속 묵비권이라고.
아 나도 본 것 같아. 사람이 아닌 로봇 같던데. 프레임 빨리 돌린 거 아냐? 정보국에서 금방 지웠는지. 그 영상은 사라지고 없어.
영상 조작된 거 아니다. 난 직접 그곳에서 봤으니까. 수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정엽의 말에 집중했다.
시위가 조직적으로 연달아 계속 일어나는 거 보면 단순한 사건이 아닌 거 같아.
근데 너 설마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 같은 거 가지고 있냐? 마약사건이 나오면 넌 무조건 개성하고 연관 짓는 것 같아. 정엽이 물었다.
형, 내가 경찰이 된 이유는 그거 때문이야. 형이 어머니 사건에 관심을 놓지 않는 것처럼.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난 그들을 잡아서 반드시 죗값을 물릴 거야.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뭔데? 정엽이 물었다.
아냐 됐어. 다음에 차근차근 듣지 뭐. 수원은 정엽의 어머니 얘기를 꺼내려 했지만 타이밍을 이미 놓쳤다
일단, 상황을 보고하고 부장과 좀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 너도 그쯤만 알고 있어. 너희 팀 수사에 관심 좀 가지고. 별건은 좀 천천히 해. 아무리 아버지 건이라고 하더라도. 수원은 알았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밤하늘의 희뿌연 별빛이 정엽을 비추고 있었다. 정엽은 수원을 처음 만난 장례식장을 떠올렸다. 아직까지 코흘리개 같았던 고등학생이 어느덧 광수대 경찰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김 선배에게 진 빚을 어느 정도 덜어 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전부와 같았던 아버지를 잃었으니 그 막막함과 절망감은 그를 집어 삼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와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어느 날 수원은 다짜고짜 경찰이 되겠다고 방법을 알려달라는 얘기를 꺼내 정엽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정엽은 당시 수원에게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결국 들려주었다. 그 후 수원은 경찰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 사건을 스스로 조사해 나갔고 의심스런 정황을 정엽에게 전달했다.
개성과 서해산업에 대한 관심도 그렇게 이어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정엽도 그 사건을 놓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수원에게서 받은 유품 중 수첩에 대해 재 감정을 요청했고 그 사실을 팀장에게 알렸다. 하지만 팀장은 김선배 개인의 비위문제와 마약 조직 중 자신의 정보원 ‘잠망’과 갈등을 겪다가 살해 당 한 것이라 정엽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 당시 정엽은 더 이상 사건에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팀장은 김주영이 마약거래를 하고 약을 복용하기도 했으며 개인적으로 수익을 챙겼다는 혐의도 있다고 덧붙였다. 팀원들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는 그런 이유라고. 하지만 정엽은 믿지 않았다. 반복해서 이의를 제기했지만 사건 이후 부서는 해체되고 대부분은 자리를 옮겼다. 마약반과 수사에 관여 했던 인원들은 다른 인원들로 채워졌고 수사를 총괄했던 오정훈은 몇 년 후 총경이 되고 파격적으로 경무관으로 승진해 영전했다. 치안감급 대우였다.